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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글쓰기> 강의록(1)

평촌0505 2017. 2. 7. 18:55

 

 

1강 머리‧가슴‧발로 글쓰기

 

1.

   ‘지식과 세상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마련한 <마음으로 글쓰기> 교실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조합이 처음 출범하던 해(2014)에 테마로 읽는 고전 <마음공부>라는 주제로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글쓰기 교실에서 ‘마음으로’라는 말을 가져온 것도 크게는 저번 강의와 상통하는 맥락으로 봐도 좋겠습니다. 강의요지의 첫머리에 ‘마음먹기와 글쓰기’라고 했는데, 우리가 먹기 중에 가장 어려운 게 ‘마음먹기’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는 천당과 지옥을 수없이 왕래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나면서부터 부처의 씨앗을 내장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탐‧진‧치에 꺼달려 사는 동안 중생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겁니다. 마음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엉뚱한 데에 마실 나가서 객지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실 나간 마음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불러들여야 합니다. 이게 유학에서 말하는 ‘본성회복’입니다. 『중용』에서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품부되어 있는 성(性)인 본래성(human nature)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곧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즉, 道)이라 했습니다.

이 마음먹기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우리는 글쓰기를 합니다. 저는 글쓰기를 ‘적극적인 마음공부’로 규정합니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능동적․적극적인 사고와 마음의 표현이자 형식입니다. 사실 ‘마음공부’에서 ‘공부’라는 말에는 이미 ‘마음’이 붙박혀 있습니다. 한자로 ‘공부’의 ‘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뜻이고 ‘夫’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겁니다. 하여 공부란 하늘과 땅을 사람이 연결해서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가 하나로 합치되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그처럼 중시하는 점수 따기는 아주 조잔한 공부의 외적 지표일 뿐입니다. 진짜 공부는 점수로 쉽사리 표현(환산)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글쓰기는 제대로 된 공부의 징표입니다.

『창작과비평』50주년 기념으로 ‘공부의 시대’라는 주제로 연속특강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부(工夫)’를 (1) 세상의 겉과 안을 동시에 보는 일, (2) 더불어 나의 바깥을 이해하는 일, (3) 타인과 함께 사회를 고민하는 일, (4) 읽고 쓰고 말함으로써 참여 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21세기 한반도의 깨친 시민으로 살아가는 공부의 길을 명쾌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대어 우리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세상의 밖과 안을 내 마음속에 반추하면서 글쓰기 하는 일로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작년 이맘때에 세상을 떠난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마지막 강의를 엮은 『담론』(2015)이라는 책에서 학생들에게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순서를 <머리-가슴-발>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 틀을 바꾸는 탈 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 틀을 깨트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삶의 과정으로 공부의 숙성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내려가 실천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앎이 삶이되는 과정을 아주 명쾌하게 제시한 것이어서, <마음으로 글쓰기> 첫 번째 강의 제목을 ‘머리․가슴․발로 글쓰기’로 잡았습니다. 이런 제목을 빌려 쓰면서 다시 한 번 신영복 교수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장 먼 거리의 여행지는 남미 쪽입니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약 15시간 이상 걸려 캐나다 토론토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15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야 브라질 어디엔가 도착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만 꼬박 30시간 이상을 보내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근데 우리에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장거리 비행과 비견할 수 없는 거리의 긴 여행입니다. 비행시간의 거리는 아무리 멀어도 그 한계가 있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무한정입니다. 전자는 양적인 거리지만, 후자는 질적인 간격입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이 가슴에 확실히 새겨지면 글이 쉽게 씌어 집니다. 가슴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응어리져 있던 시인 윤동주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스스로 갈피를 잡기 어려운 마음으로 글을 억지로 쓰자니 잘 씌어 지지 않을뿐더러, 막상 써 놓은 글도 맘에 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글은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온당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억지 춘향이로 써 놓은 글은 대개는 남이 읽어주지 않습니다. 유시민은 공부의 시대에 글쓰기로 『공감필법』(2016)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고 쉽게 공감하는 글을 쓰자는 게지요.

그리고 글쓴이는 그가 글로 표현한 대로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지식인은 그가 말하고 글로 쓴 대로 살아야합니다. 말과 글, 그리고 그 삶이 각각 따로 놀아나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유치원 교사에서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에게 말한 대로 살고, 살아온 대로 말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살고자 노력하는 삶의 과정이 곧 아름다운 삶의 목적입니다. 목적은 그 과정에 내재합니다.

우리에게 글쓰기는 ‘자기성찰’의 전형적 과정입니다. 글쓰기는 부단한 성찰을 통한 자기실현의 과정입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내면적으로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이 곧 ‘철학함’이었습니다. 동양에서 ‘도’(道; tao)의 철학을 제기한 노자는 “되돌아봄이 도의 움직임”(反者 道之行)이랬습니다. 미국의 교육철학자 죤 듀이도 교육의 과정은 곧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의 과정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글쓰기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의 과정이기에 우리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말합니다.

니체는 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세정신에서 근세정신에로의 패러다임 이행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공부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의 틀을 망치로 깨트리는 것에서 시작되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이라 했습니다. 글쓰기는 이런 공부의 전형적인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공부하는 삶’의 전형은 진즉부터 『중용(中庸』에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중용』은 한마디로 말한 대로 이루는‘성’(誠)의 철학입니다. 하여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게 사람의 길이고(誠之者 人之道), 이미 성(誠)해 있는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誠者 天之道)라 했습니다. 이 대목을 도올 김용옥은 『중용, 인간의 맛』(2011)에서 이렇게 풀이합니다.

 

‘성자’(誠者)는 성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을 하늘의 길, 하느님의 길(天之道)이라고 말한 것이다. ...(중략) ‘성지자(誠之者)는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과정(process)이다. 그러니까 ’성자(誠者)는 성 그 자체이며 하느님 그 자체이다. 그것은 우주의 신성 그 자체이다. 그러나 ‘성지자’(誠之者)는 성해지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인간의 노력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의 길’(人之道)이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결국 성(誠)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칙칙폭폭 끊임없이 달려가는 성지(誠之)호 열차의 모습이다. 그 종착역(즉, 誠者의 역))에 도달할지 안 할지는 여기 질문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열차는 달리는 한에 있어서만 열차이기 때문이다. 열차는 과정이다. 인생은 과정이다. 인생의 목적이란 그 과정에 내재하는 것이다. ‘성자’(誠者)는 성지자(誠之者)에 내재하는 것이다(김용옥, 2011, 277-278).

 

하여 우리에게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하는 실천적 과정에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이상적 모습이 내재해 있는 겁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시각(始覺)은 본각(本覺)에 내재해 있을뿐더러, 시각은 본각의 현재완료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공부하는 삶의 전형적인 과정으로서 <마음으로 글쓰기>에 몰입하는 모습과 그 과정이 소중한 겁니다.

 

 

2.

   공부하는 삶=마음으로 글쓰기의 단계적 과정을 『중용』에서는, 성(誠)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즉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고 실천(擇善固執)하는 보통사람의 자세를 다음의 5단계로 명쾌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널리 배우는 박학(博學)-자세히 묻는 심문(審問)-신중히 생각하는 신사(愼思)-말과 글로 분명하게 표현하는 명변(明辯)-행하기를 힘쓰는 독행(篤行)입니다. 『논어』 첫머리에는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學而時習)을 삶의 으뜸 되는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오늘날처럼 지식정보사회에서는 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학습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삶의 첫 번째 단계는 널리 배우기를 즐기는 삶입니다. 널리 배우는 것의 전형은 두루 책을 읽는 삶입니다. 우리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읽기와 쓰기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근데 우리가 자라는 과정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이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 경우 책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 접했고, 그 책도 교과서가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초등 4학년 때 쯤 교편을 잡고 있던 형님과 대구에 나들이를 가서 서점이라는 데를 난생 처음 가 보았습니다. 대형 서점에 들어서자 책들에 압도되어 무슨 책을 골라 뽑아야할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서점 구경만하고 빈손으로 나왔지요. 중학교 때는 시를 쓰는 사촌 형님이 어려운 형편임에도 책을 사들여 읽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형님 책상 앞에 꽂혀 있는 책들을 나도 한 번씩 빼보곤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내 나름 책읽기에 차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 가정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일상적 삶에서 보여주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거실에 텔레비전보다는 책장을 먼저 들여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른 스스로가 책을 들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여 불학에서는 으뜸 되는 교육은 ‘말이 없는 교육’(不言之敎)이랬습니다.

두루 배우고 읽는 과정에서 혹은 그것이 축적되는 만큼 의미 있는 질문이 생성됩니다. 우리에게 공부는 질문 생성 혹은 질문 오르기의 과정입니다. 두루 읽고 배우는 과정에서 기왕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이 충돌하면서 물결이 일듯이 이런저런 질문이 생성됩니다. 공자는 한 수레의 책을 읽고도 생각하는 바-질문생성-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질문 오르기는 단답형의 구체적 질문에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추상적 질문으로 심화됩니다. 그런 질문이 샘물 솟듯이 풍부해 질수록 글쓰기의 소재와 내용도 풍요로워집니다. 글쓰기에서 질문생성은 곧 문제의식입니다. 연륜과 더불어 문제의식이 풍부하게 축적되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글의 깊이와 폭이 늘어납니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50여 년 전에 『고독이라는 병』이라는 수필집을 낸 후에 이제 100세를 앞두고 『100세를 살아보니』(2016)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분은 글쓰기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문제의식이 굳어지면 글감이 고갈되고 그 말이 그 말이 되곤 합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즈음에 절필(絶筆)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질문생성을 통해 내면의 문제의식을 돈독히 반추하고 곱씹는 동안에 생각의 길이 조금씩 트이게 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글쓰기에서는 “생각하는 만큼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글쓰기에서 성찰(省察; reflective thinking)은 곧 통찰(洞察; insight)입니다. 안으로 길이 트이면, 깨침이 옵니다. 불교에서 ‘선’(禪)은 생각을 한곳에 거듭 집중하는 과정에서 깨침을 얻기 위한 공부의 한 방편입니다. 성철 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가까운 제자들에게 “참선 부지런히 하거레이”라고 당부했답니다.

질문은 바람결에 일어나는 파도와 같습니다. 통찰이 줄기 있게 이어지면 파도는 잠잠해 집니다. 하여 <마음으로 글쓰기>는 ‘평정심’(平靜心)의 표현입니다. 퇴계 선생은 ‘잠심자득’(潛心自得)이랬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스스로 터득하는 바가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중용』에서는 ‘신사’(愼思)라 했습니다. 자세히 물어 성찰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생각이 가지런히 정리되는 상태입니다.

성철 스님은 공부하는 삶의 5계(五戒)로 적게 먹고, 적게 말하고, 적게 자고, 적게 다니고, 한 곳에 생각 집중하기를 권했습니다. 한 곳에 생각을 집중하는 공부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적게 먹고, 적게 말하고, 적게 자고, 적게 다니라는 겁니다. 『중용』에서는 공부하는 삶의 자세로 ‘신독’(愼獨)을 말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남이 보지 않는다고 몸과 맘을 아무렇게나 하지 말고 혼자 있을 때일수록 자신을 경계하라는 겁니다. 여기 ‘신독’은 글쓰기 하는 사람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사(愼思)의 단계를 거쳐 생각이 가지런히 농익어 있을 때에 말이든 글이든 사리에 밝게 표현됩니다. 이것이 ‘명변’(明辯)입니다. 도올 김용옥은 ‘명변’을 “분명하게 사리를 분변함”으로 풀이했습니다만, 여기서는 말이나 글이 명쾌하게 표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변’(明辯)이어야 말이나 글이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전달되고 소통됩니다. 이게 유시민이 말하는 ‘공감필법’의 요체입니다. 아무리 깊은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라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글은 읽혀지기 어렵습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쉽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교사가 교과 내용을 학생들에게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교과 내용이 자기 것으로 철저히 내면화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교사의 삶은 바로 교과적 삶으로 체화되어야 합니다.

잘 쓴 글은 글쓴이의 주인(필자)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자 인품의 반영입니다. 글쓰기의 개성이 잘 드러나면 우리는 그를 ‘문필가’(文筆家)라 부릅니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朴趾源)은 기행문학의 독특한 필법을 보여준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여 최한기(崔漢綺) 선생은 문장은 곧 그 사람의 신기(神氣)라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박학-심문-신사-명변)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만, <마음으로 글쓰기>에서는 그 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가슴에서 발로 내려와 실천으로 이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는 행하기를 힘쓰는 ‘독행’(篤行)입니다. 이로써 앎이 곧 삶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한 대로 살기는 지난합니다. 그래서 삶이 말(글)이 되고 말(글)이 삶이 되는 사람은 참으로 귀합니다. <마음으로 글쓰기>는 나이가 들수록 그 글이 일종의 참회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은 글쓰기의 단계적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단계는 동시에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연결고리입니다. 행함이 계속 돈독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배움이 더욱 깊고 넓어져야 합니다. 이런 게 공부하는 삶이자 <마음으로 글쓰기>의 전형적 과정이자 형식입니다. 우리에게 글쓰기는 삶의 어려움이자 각성된 삶의 형식입니다.

 

3.

   한글로 글쓰기를 하는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복 받은 민족입니다. 왜냐하면 ‘한글’은 세계문자사에서 가장 과학적이면서 익히기 쉬운 문자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문화적인 민족의 반열에 들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6.25 한국전쟁을 치루고 산하가 비참하게 초토화되고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특히 북한은 9백만의 인민가운데 무려 3백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고도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2백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빈곤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50년간 우리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압축발전’을 이루어, 지금은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통한 고급인적 자원의 성공적 공급 때문이라고 봅니다. 교육을 통한 고급인적 자원 공급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에는 우리민족의 남다른 교육열의도 한몫했지만, 그런 교육을 가능케 한 도구로서 한글의 우수성과 그 힘이 무엇보다 컸다고 봅니다.

평생을 한글연구에 바쳐온 권재선(대구대 명예교수) 교수는 『한글의 세계화』(2002)에서 ‘세계 음소 한글’과 ‘세계 음성 한글’ 등 새로운 세계 한글의 안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발성기관의 작용을 본떠 만든 표음문자로서 한글의 우수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글이 단지 발달된 음소문자의 하나일 뿐이라면 이미 선진 국가에서 국제문자로 제도화한 알파베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의 모든 글자가 발음작용 문자라면 알파베트보다 한 단계 더 발달된 문자이다. 따라서 한글의 세계화는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의 열정에 의한 세계 공략이 아니라 우수한 세계한글을 개발하여 우수 제품에 의한 자유경쟁의 승리여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한글의 발음작용문자로서의 우수성을 백분 살려서 인류에게 유익하고 쓸모 있고 편리한 세계문자를 개발하여야 하고, 그러한 제품이 개발되어 홍보되면 그 유익하고 쓸모 있고 편리함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용하게 될 것이다(권재선, 2002, 1).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음성)언어는 소수의 원어민 언어를 포함해서 수천에 이르지만, 문자언어는 그 10분의 1도 채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문자언어의 대부분은 상형문자이지 표음문자가 아닙니다. 표음문자 가운데도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지 않는 음절문자(일어의 경우)보다는 자모음이 분리된 음소문자(영어의 경우)가 더 발전된 언어입니다. 근데 한글은 그냥 음소문자가 아니라, 한글의 모든 글자가 발음작용을 나타낸 문자여서 영어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문자라는 겁니다. 위에서 권재선은 한글의 모든 문자가 발음작용을 본떠 만든 발음작용 문자이기에 한글의 세계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글은 글자로서 진화를 마쳤다고 할 정도의 찬사를 받을만합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 가운데 『훈민정음 해례본』(1997년 등재)이 있습니다. 이 책은 세계 문자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한글이라는 문자가 어떤 원리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자모음의 28자 각 글자를 어떻게 발음하면 되는가를 상세히 설명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 졌는가를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책이 우리에게 전해지게 한 데에는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공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 보존에 앞장선 분으로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을 당시 시세로 기와집 열한 채 값을 치르고 샀답니다. 선생은 이 책을 아주 귀중하게 여겨 6.25 전쟁 때 피난 갈 때도 이 책만은 직접 지니고 챙겼답니다. 오늘날 한글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한 데는 전형필 선생의 숨은 공로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이 해례본의 서문에서 정인지는 새로운 문자(한글)는 ‘간략’하고 ‘요령’이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가기 전에 터득할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10일이면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8개 자모음 문자로 바람 소리, 닭 우는 소리나 개짓는 소리 등 소리 나는 대로 다 표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19개 자음과 21개의 확장된 모음 글자를 모두 조합하면(즉, 19곱하기 21을 하면) 11,172개의 소리로 표기할 수 있습니다.

한글의 자음은 발성기관에서 글자가 발성되는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고, 모음은 점 하나와 작대기 두 개로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를 상징하는 우주 음양원리의 철학을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자음은 ‘닿소리’라고도 하는데, 목구멍에서 숨이 나올 때 그 숨이 발음기관에 닿으면서 만들어진 소리라는 겁니다. 우리 입안에서 닿소리가 만들어지는 자리는 어금니, 혀, 입술, 이, 목구멍 모두 다섯 곳입니다. 그 발음기관 또는 발음하는 모양을 본떠 만든 기본자음이 바로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자입니다. 모음은 ‘홀소리’라고도 하는데, 목구멍에서 숨이 나올 때 발음기관에 닿지 않고 홀로 나는 소리라는 겁니다. 모음의 기본자는 ‘하늘(․), 땅(ㅡ), 사람(l)'의 모양을 본떴습니다. 이처럼 한글은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다.”는 장엄한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노마 히데키(野間秀樹)는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2011)에서 한글은 “나는 이런 문자다. 누구를 위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 졌고, 나를 이렇게 발음해 달라.”는 점을 스스로 밝힌 세계유일의 문자라는 겁니다. 그는 한글의 탄생은 산수화의 세계에 컴퓨터그래픽이 등장한 것처럼 파격적이라 했습니다. 컴퓨터로 업무를 처리할 때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 한글이 일곱 배나 빠르다고 합니다. 연산과 표기 방식이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처리의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문자에 의한 지식 혁명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 덕분에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문화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 한글을 도구로 한 문해(문식)-읽고 쓰기- 능력의 보편적 향상 덕분에 우리나라는 글의 에너지가 왕성한 ‘문기’(文氣)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마음으로 글쓰기>를 자기 나름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 안에 내재된 ‘문기’를 유감없이 실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