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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청소년의 성장과정과 미래의 삶

평촌0505 2017. 11. 13. 20:15

 

 

1. 문제 제기

듣지 못함(deafness)은 농청소년의 성장과정에 복잡하고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농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농은 장애가 아니다”고 하지만, 청인중심 사회는 농인에게 끊임없이 ‘장애’를 재생산한다. ‘농’은 질병이 아니지만, 의사들은 ‘농’의 상태를 병리적 문제로 규정한다. 듣지 못함을 개인의 병리적 문제로 규정하는 다수 청인들의 편견은 농청소년의 성장과정을 굴절 시킨다.

게다가 현대사회가 고도 문명사회로 접어들면서, 문명화에 따른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농인에게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짙다. 미래는 농인에게 행복한 세상을 안겨 줄까? 결국, 미래는 준비하고 만드는 사람의 것이다. 평생학습의 시대에 미래는 농인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본 발제에서는 다음의 측면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농청소년들이 성장과정에서 겪는 발달특성과 그 문제는 무엇인가?

둘째로 미래사회의 특성과 그것이 농청소년의 삶에 어떤 함의를 주는가?

셋째로 제4의 물결인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그에 따른 농사회의 변화전망은?

마지막으로, 결론에 대신해 우리나라에서 농문화와 농(인)학의 정립과제를 간단히 짚어본다.

 

 

2. 농청소년의 성장과 발달 특성

맹․농 중복장애였던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함은 사물과 단절을 초래하고, 듣지 못함은 사람과 단절을 초래한다.”고 했다. 자신의 장애 체험에서 우러난 절실한 고백이다. 같은 감각장애지만, 농아동은 맹아동에 비해 성장과정에서 훨씬 복잡한 문제를 지닌다. 이하에서 농아동의 발달특성을 인지적, 사회․정서적, 언어적 발달, 그리고 학습능력의 측면에서 그 문제의 성격을 짚어 보고자 한다.

 

인지적 발달: 기본적으로 농아동의 인지능력은 일반아동과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 즉, 농아동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언어적 동작성 지능 측정(nonverbal-performance test) 결과에 의하면, 농아동의 인지능력은 일반아동과 동일한 정상분포 곡선을 보인다.

하지만 농아동은 피아제의 형식조작적 인지과제에서 일반아동에 비해 다소 지체될 뿐만 아니라, 문제해결 전략상에 차이를 보이곤 한다. 이른바 지능의 양적인 발달에서는 일반아동과 차이가 없으나, 질적 특성에서 농아동은 미묘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게다. 그러나 그 차이는 보편적이라기보다 특수한 사례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되는 차이다. 즉, 농이기 때문에 수반되는 필연적 차이는 아니다.

 

사회․정서적 발달: 지능이 불확실한 과학이라면 사회․정서적 발달문제는 막연한 예술과 같은 영역이다. 인지능력은 0세에서 18세까지의 ‘발달기’에 끝나지만, 사회정서 발달은 출생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생애에 걸친 발달과제다. 에릭슨(Erikson)은 출생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심리사회적/사회정서적 발달 단계를 8단계로 제기했다. 각 단계는 그 단계에서 거쳐야(수행해야) 할 특별한 의미의 발달과제가 있다. 8단계 발달과업에서 1-3단계는 영유아기 발달과제이고, 4단계는 아동기(6-11세), 5단계는 청소년기(12-18세), 6단계는 청년기(18-24세), 7단계는 장년기(24-54세), 마지막 8단계는 노년기(54세 이상)에 해당된다. 이 발달 단계들은 각 단계마다 당면하는 위기와 과제가 있으며, 각 단계들은 불변적 순서이면서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반영하지만 문화적으로 보편성을 지닌다.

1단계의 ‘기본적’ 신뢰 대(對) 불신은 생애 첫 단계(출생 후 2년)로 영아와 어머니(양육자) 간의 신뢰 형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단계의 발달과제는 ‘기본적’이기에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아기들은 듣는 걸 보고자하고, 보면 잡으려하고 손에 잡히면 빨려고 한다.”는 데, 듣지 못함은 이 단계의 발달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단계는 자율성 대 수치와 의심이다. 자율성은 ‘배변싸움’에서 잘 드러나지만, 이 시기에 농유아는 부모와 ‘말훈련’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3단계는 주도성 대 죄의식이다. 유치원 단계에서 주도적으로 뭔가 활동하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하지만, 부모의 지나친 통제는 아이에게 열등감을 안겨주기 쉽다. 4단계는 근면 대 열등감이다. 학령기에 읽고 쓰기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공부를 통한 근면성을 맛보게 되지만, 학습에 실패하면 열등감이 더욱 깊어 질 수 있다. 5단계는 청소년기의 발달과제로 정체감 대 역할 혼돈이다. 이 시기에 정체감을 안정되게 유지 하느냐 못 하느냐가 평생 동안에 영향을 미친다. 농청소년은 이 단계에서 청세계와 농세계의 틈바구니에서 남다른 자기 정체성 혼란의 홍역을 치르게 된다. 이 시기에 청소년들은 결정할 과제는 많고 결정할 능력은 부족하다.

6단계는 성인기의 발달과제로 친밀감 대 고립감이다. 이 시기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단계로, 이성에 대한 친밀감과 성공적인 결혼생활 경험이 중요하다. 7단계는 장년기의 발달과제로 생산성 대 자기침체다. 여기 생산성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에 일차적으로 연관되지만, 일을 통해 생산적 보람을 맛보는 게 중요하다. 그러지 못 할 때 자기침체의 늪에 빠지기 쉽다.

마지막 8단계는 노년기의 과제로 자아통정 대 절망이다. 노년기에는 누구나 철학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고 나름 긍정적 보람을 느끼면 성공한 삶이다. 반대로 생각할수록 후회스런 일들이 많으면 노년기의 절망에 빠질 위험이 있다. 농인들은 늘그막에 나이 듦과 빈곤의 심화라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다.

흔히 농인들의 인성적 특징으로 고집성, 자기중심성, 충동성 등을 들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문제일뿐더러, 대부분은 청인들의 편견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농인들 가운데도 청인 이상으로 인성적 장점과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언어능력의 발달: 언어능력(language competency)은 인간존재의 문명화 과정에서 필수적 도구다. 인간의 언어능력 발달은 일차언어 획득과 이차언어 획득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일차언어 획득은 출생 후 일차적으로 획득되는 언어로서 대개 음성언어가 모어(母語)로 자연히 획득되지만, 농유아의 경우 일차언어의 안정된 획득자체가 간단하지 않다. 인간은 생득적으로 언어능력 획득을 타고난다지만, 후천적(사회문화적)으로 그 능력이 자연히 발휘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농유아는 다른 청유아와 같이 언어획득 능력을 타고나지만 그것을 발휘할 적절한 언어 환경이 뒷받침 되지 못함에 따라, 구어와 수어의 갈등적 틈새에서 일차언어 획득 자체가 극히 불투명하다. 이를테면 농부모를 둔 농유아(전체의 5〜10% 이내)는 일차언어로 수어를 안정되게 획득하지만, 청인부모를 둔 농유아는 대부분 언어양식에 관계없이-즉, 구어냐 수어냐 라는 언어양식에 관계없이- 언어획득 자체가 퍽 불안전하고 불투명하다.

문자언어(written language)인 이차언어의 획득은 기본적으로 일차언어의 안정된 획득 기반 위에 그 발달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농아동은 일차언어 획득이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만큼 이차언어로서 읽고 쓰기 능력의 획득이 더욱 불확실하다. 농교육에서 진작부터 ‘9세 벽’이라는 말이 회자된 건, 대부분의 농학생들이 학년이 올라가도 9세 일반(청인)학생들의 문어능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2Bi(bilingual/bicultural) 접근에 따라 농학생들의 문어능력에 현저한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2Bi 접근의 긍정적 수용 자체에 한계를 지닌다. 2Bi 접근에서는 언어획득 초기에 일차언어로 농인세계에서 두루 통용되는 ‘자연수어’를 적극 투입하는 한편, 이중문화로서 농문화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농아동에게 언어양식의 선택은 냐냐주의(or/neither)가 아니라, 도도주의(and/both)를 지향하는 게 합당하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언어권과 발달권에 기반 해야 한다.

 

학습능력의 발달: 농학생의 읽기와 쓰기능력이 지체되는 것에 상응해서 그들의 학습능력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지체된다. 학습의 기본도구인 읽기와 쓰기능력이 부실한 만큼 학습능력의 결손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진다. 일찍이 R. E. Johnson 등(1989)은 열린 교육과정(Unlocking the curriculum)이라는 논문에서 농교육의 실패이유를 두 가지로 적시했다. 그 하나는 농학생의 언어능력 결핍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농학생에 대한 낮은 기대수준 때문이라 했다. 농학생의 언어능력 결핍은 곧 학습능력의 결손으로 직결되며, 동시에 부모와 교사들의 낮은 기대수준은 농학생의 학업성취 동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농학생은 지적능력의 결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능력을 발휘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학습능력에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 압축해서 말하면, 학교에서 농교육의 실패는 곧 교과교육의 실패다. 즉,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배우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 그 실패의 책임은 가르치는 쪽(교사)에 있는가, 배우는 쪽(학생)에 있는가? 물론 책임은 양쪽 모두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농교육 관행에 의하면, 그 책임을 지나치게 농학생 쪽의 학습능력 결핍 탓으로 돌렸다. 농학생의 학습능력 결핍은 일차적으로 언어능력 결손에 기인한다지만, 아동의 언어능력을 비롯해서 학습능력의 저하를 초래케 한 근원적인 책임에서 농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일차적으로 농학교 교사들은 농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자료로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쳐 낼 수 있어야 한다.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를 교답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이 곧 ‘교과적 삶’으로 체화(體化)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교사가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쳐 낼 수 있을 때, 학생들은 누구나 교과를 잘 배울 수 있다.

 

 

3. 미래사회와 농청소년의 삶

『총․균․쇠』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래드 다이아몬드(J. Diamond)는 『나와 세계』(2016)에서 인류문명의 쟁점과 미래를 종합적으로 집약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세계적 문제로서 그는 다음 세 측면에 주목한다.

첫 번째 문제는 지구의 ‘기후변화’다. 기후변화는 물리적 원인, 생물학적 원인, 사회적 원인이 혼재된 복잡한 문제여서, 전 지구적으로 10년 안에 우리 모두의 삶에 큰 파장을 일으킬 위험을 안고 있다. 그 문제의 출발점으로 그는 세계인구와 1인당 평균 ‘인간영향’(human impact)을 제기한다. 여기 1인당 평균 인간영향은 한 사람이 소비하는 평균 자원량과 배출하는 평균 폐기물량을 뜻한다. 현재 인간의 자원소비량과 폐기물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인간 활동은 주로 화석연료를 태우기 때문에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대기로 배출되어 이른바 ‘지구온난화’ 현상을 초래케 된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당면하는 주요문제는 가뭄, 식량생산의 감소, 열대성 질병의 전반적 확산, 해수면의 상승 등이다. 이런 문제들을 과학기술로 해결하기 위한 ‘지구공학’(geoengineering)적 노력이 등장했지만, 예상되는 비용이나 그 효과 면에서 아직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이제 인간들은 화석연료를 덜 태우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더 많이 의존해야 한다. 당장 미국과 중국이 이산화탄소 배출에 관한 쌍무협정을 맺는다면 현재 배출량의 41%나 줄일 수 있다. 현재 지구에는 70억 인구도 먹고살기가 힘든데, 금세기 말에 90억이 넘는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을지가 문제다. 우선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게 급선무다. 1년간 지구가 제공하는 생태자원(즉, 식량, 에너지, 폐기물 자정능력 등)을 모두 써버린 날짜를 ‘생태환경초과일'(Earth Overshoot Day)로 잡았을 때, 1970년에 12월 31일까지 던 것이 그 이후부터 점차 앞당겨져 2017현재는 8월 2일로 당겨졌다. 그만큼 지구가 과부하 상태라는 게다.

두 번째 문제는 국가 내와 국가 간에 심화되는 ‘불평등’ 현상이다. 우선 국가 간에 불평등 문제를 보면,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높은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 비해 400배나 부유하다. 한국도 가장 가난한 국가들 보다 100배 쯤은 부유하다. 국부(國富)는 우리들의 삶에 넉넉한 식량, 깨끗한 물, 아동교육, 직업훈련, 공중보건 등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세계화된 지구촌에서 질투하고 분노하며 절망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신들의 질투, 분노, 절망감을 우리 모두와 함께 공유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이민 물결과 난민 문제, 테러문제가 끊이지 않는 세계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 나라 안에서 불평등 문제는 폭동으로 연결되는데, 그 심각한 사례들이 세계 곳곳에서 늘어나고 있다. 미국이 불법 이민자 문제를 트럼프 대통령 식으로 밀어붙인다고 그 문제가 해결될까? 크기가 늘어나는 풍선은 언젠가 터져버린다. 터지면 끝장이고, 때는 늦다.

마지막 세 번째 문제는 ‘환경자원의 관리’다. 생태계는 우리에게 더러운 물보다는 깨끗한 물, 혼탁한 공가보다 맑은 공기, 척박한 토양보다 비옥한 토양을 궁극적으로 제공한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공짜로 제공되는 생태계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장회익(2014) 교수는 생태계의 온생명 덕분에 우리 낱생명은 원천적으로 온전한 생존이 가능하다고 했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우리 인간생존의 파멸로 이어진다.

인간에 의한 자연자원의 소모량은 인구수에 일인당 평균 자원소모율을 곱한 값이다. 현재 서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부유한 나라의 1인당 평균 자원소모율이 가난한 나라의 그것보다 32배나 높다고 한다. 따라서 세계적 자원고갈의 위험은 가난한 나라들의 높은 인구증가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미국인 3억과 유럽전역의 8억 명의 높은 자원소모율에서 비롯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중국과 인도에서 부유층의 자원소모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결국, 지구자연자원을 적정하게 관리하려면 정치경제적인 면과 개인적 노력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을까? 문제는 단기적 개발이익에 눈이 어두워 장기적으로 자국뿐만 아니라 세계자체를 파멸로 이끄는 정치지도자들이 여전히 득세하는 데에 있다. 그런 정치지도자를 지켜주는 정치제도는 물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하는 우리들 자신이 문제다. 결국 열쇠는 깨친 시민의 손에 쥐어져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 교수는 『사피엔스』(2015)에서 인류역사 이래 인간은 세 차례의 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첫 번째가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 두 번째가 1만2천 년 전의 농업혁명, 마지막 세 번째가 500년 전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가올 역사를 물리학-화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연속체의 다음 단계라고 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지난 40억 년이 자연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지적인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 방법은 주로 세 가지인데 첫째가 생명공학, 둘째가 사이보그 공학(유기물과 무기물을 하나로 결합시킨 공학), 셋째가 비유기물공학이다.

생명공학은 생물학적 수준에서 인간이 계획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예컨대 유전자 이식이 그 사례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것으로, 생체공학적 의수(이를테면 인공와우이식수술 장치 같은 것)를 지닌 인간이 그런 예다.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유전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이제 결코 허망한 상상이 아니다.

7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사피엔스는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가 세상의 고통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 역량은 엄청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 혹은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 책 말미에 하라리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 그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라 했다. 과연 그럴지 어떨지는 저자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하라리 교수는 『사피엔스』에 이어 『호모데우스; 미래의 역사』(2017)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여기 ‘호모데우스’는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을 지칭한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인류는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역사에는 공백이 없다. 기아, 역병, 전쟁이 줄고 있다면 다른 과제가 미래 인간의 의제에 올라와야 한다.

그럼 무엇이 21세기 인류 최상위 의제에 오를까? 하라리 교수는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물론 핵전쟁 위험을 안고 있지만)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종합해 볼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호모 데우스』, 2017, p. 39).

 

이제 현대인에게 죽음은 해결 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다가온다. 모든 인간은 살 권리가 있고, 그 권리에는 만료일이 없다. 유전공학, 재생의학, 나노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은 2100년쯤에 죽음을 극복할 거라 내다본다. 더 낙관적인 사람들은 2050년에는 몸이 건강하고 은행잔고가 충분한 사람들이 불멸을 시도할 거라고 본다. 때가 되면 그냥 죽는 우리와 달리 그들의 생명에는 만료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 의제에 오를 두 번째의 큰 주제는 ‘행복권’이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상가들과 예언자는 “생면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행복을 최고선”으로 규정했다. 지금까지 국가의 성공 측도는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주로 GDP의 증대였다. 산업화된 나라들은 대규모의 공교육제도와 보건복지제도를 만들었지만, 그것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기보다 국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치인은 물론 경제학자들조차 GDP(국내총생산)를 GDH(국내총행복)로 보완하거나 대체할 것을 요구한다.

하라리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생산성이 높지만 불만족스럽게 사는 싱가포르인이 좋겠는가, 생산성은 높지 않지만 만족스럽게 사는 코스타리카인이 좋겠는가?” 이래경은 『다른 백년을 꿈꾸자』(2017)에서 경제총량 지표로서 GDP 개념을 폐기하고, 사회개발지수를 중심으로 한 발전종합지수(TDI, Total Development Index)의 도입을 주장한다.

그가 제기하는 ‘발전종합지수’(TDI)는 사회개발지수 + 경제후생지수 + 지속가능지수 + 제도평가지수의 총합에서 주관적․심리적 행복지수까지 조사하고 참조할 것을 권고한다. 이것은 계량적(경제) 발전모형에서 질성적(행복) 발전모형에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반영하는 시도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목표나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에 내재하는 과정(process)이 중요하다.

이처럼 21세기 인류의 세 번째 큰 과제는 신처럼 창조하고 파괴하는 힘을 획득해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될 게다. 이 세 번째 과제는 앞의 두 과제를 포괄할 뿐 아니라, 두 과제에 또한 의존한다. 인간이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 있다는 건 곧 ‘신성(神性; divinity)의 획득’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은 ‘다시 만들어진 신’을 말한다.

21세기 인류를 이끌 새로운 종교와 이념은 무엇일까? 하라리는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는 21세기를 지배할 신흥 기술종교를 기술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데이터교)로 대별한다.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업그레이드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경험과 의식 상태에 접근하려 한다.

21세기 인간은 스스로 데이터 흐름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저장)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이 지점에서 데이터 중심의 실용적 혁명이 일상의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미래에 의식 없는 데이터 중심의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참으로 불안한 미래다. 윤석만은 『휴마트 씽킹』(2017)-스마트하되 휴머니티를 갖춘 생각-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지식의 개념은 일종의 탑을 쌓는 것과 같았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무질서 속에 보이는 무수한 정보 사이에서 규칙을 찾아냈다. 그 안에서 인과관계를 조사하고 이를 체계화해 견고한 지식의 탑을 만들었다. 각 분야에서 탑을 높이 쌓은 이들을 전문가로 불렀고, 전문가가 되면 한 세대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4차 혁명시대는 이런 지식의 반감기(半減期)가 매우 짧아진다. 과거처럼 탑을 얼마나 높이 크게 쌓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knowhow)보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how to know, howknow)이 더 중요하다(윤석만, 2017, p.15).

 

인류는 지금까지 1차 농업혁명, 2차 산업혁명, 3차 정보혁명을 거쳐 왔다. 이제 4차 혁명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윤석만은 과거 1차 혁명시대에 토지가, 2차시대에 산업기술이, 3차시대에 정보혁명이 그랬듯 4차 혁명시대는 교육과 문화가 새 시대의 핵심자원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럼 미래에 대비해 교육과 문화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그는 미래 인재의 핵심역량은 ‘인성역량’이랬다. 즉, 다양한 사람들과 지식․생각․감정을 공유하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역량, 그리고 유연하게 사고하고 통섭할 줄 알며,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휴머니티’ 역량을 말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가 말하는 ‘인성역량’이니, ‘휴머니티’라는 것이 4차 혁명시대와 연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기는 하지만, 좀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당대의 농청소년들에게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미래는 준비하고 그것을 만드는 자의 것이라지만, 차세대의 미래는 퍽 불안하다. 그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 학교교육을 받고 있는 청소년들은 그들이 학교교육을 마치고 세상에 발을 디딜 때쯤, 학교에서 배운 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농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겪는 교과교육의 실패 경험은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해쳐가는 데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4. 4차 산업혁명과 농인의 미래

21세기에 4차 산업혁명은 목하 진행 중이다. 그 혁명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빠르게 진행되는 반면에 다른 분야에서는 느린 ‘진화적’ 변화 속도를 보인다. 이 혁명은 3차 산업혁명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그 속도와 범위와 깊이, 그리고 충격 면에서 전면적인 패러다임 이행을 초래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은 유비쿼터스(ubiquitous) 모바일 인터넷, 저렴하고 강력해진 센서, 인공지능과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이 그 특징이다. 다년간 세계경제포럼(WEF)을 이끌어 온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은 『제4차 산업혁명』(2016)에서 이 혁명을 이끄는 핵심 기술로 물리학 기술, 디지털 기술, 생물학 기술을 들고 있다. 물론 이 세 분야는 서로 깊이 연관되고 상호 보완적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물리학 기술은 자율주행차를 비롯한 무인운송수단, 디지털 견본을 사용해 유연한 소재로 3차원의 물체를 만들어 내는 3D 프린팅, ‘인간과 기계의 협업’을 일상적 현실로 만들어 로봇공학의 진보, 그리고 가벼우면서 강하고 재생 가능한 신소재의 활용을 가져 왔다. 이를테면, ‘그래핀’(graphene)과 같은 최첨단 나노 소재는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하면서 두께는 머리카락의 100만분의 1 정도로 매우 얇고 뛰어난 열과 전기 전도성을 갖추고 있다.

‘디지털’기술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실물과 디지털의 연계 기술의 하나인 ‘사물인터넷’은 이제 ‘만물인터넷’(internet of all things)으로 불린다. 하여 실생활과 가상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는 센서와 장비들이 놀랄만한 속도로 쏟아져 나오고 그것은 우리들 삶에 혁신적 변화를 안겨준다.

생물학적(biological) 기술 혁신은 인간의 생명과 유전자 형질을 단지 기술적 문제로 다룬다. 생명과학의 기술적 진전은 유전자 염기서열분석을 훨씬 간소화했으며, 최근에는 유전자 활성화 및 그 편집기술까지도 가능해졌다.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의 발전은 의학 분야뿐만 아니라, 농업과 바이오 연료생산에도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의료분야에서 유전표지(genetic markers)와 질병 사이에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개인별 맞춤의료 서비스와 표적치료법이 용이해질 수 있다. 이미 IBM 슈퍼컴퓨터 시스템은 단지 몇 분 만에 질병과 치료기록, 정밀검사와 유전자 데이터 등을 거의 완벽한 최신 의학지식으로 비교분석하여 암 환자들에게 개인별 맞춤형 치료법을 권고한다.

『세계경제포럼보고서』(2015)는 과학기술이 이끈 변화가 기존의 주류사회를 강타해 미래의 디지털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를 구축하는 21가지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즉,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어느 시점에서 돌연히 큰 변화를 초래하는 지점)를 밝히고 있다. 2025년까지 일어날 티핑 포인트 20개 중 그 가능성이 높은 순서로 일곱 가지를 뽑으면 다음과 같다.

 

• 인구의 10%가 인터넷에 연결된 의류를 입는다.(91.2%)

• 인구의 90%가 (광고료로 운영되는) 무한용량의 무료 정보저장소를 보유한 다.(91.0%)

• 1조개의 센서가 인터넷에 연결된다.(89.2%)

• 최초의 로봇 의사가 등장한다.(86.5%)

• 10%의 인구가 인터넷이 연결된 안경을 쓴다.(85.5%)

• 인구의 80%가 인터넷상 디지털 정체성을 갖게 된다.(84.4%)

• 3D 프린트로 제작한 자동차가 최초로 등장한다.(84.1%)

 

가령 인구의 10%가 인터넷에 연결된 의류를 입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처음에 컴퓨터는 큰 방에 둬야했지만, 후에 책상으로 옮겨졌고, 이어 사람들의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우리 주머니 속에 모바일 폰이 담겨 있듯이, 머지않아 의류와 장신구에 칩이 내장될 것이다. 칩이 내장된 의류나 장신구를 착용한 사람은 인터넷에 연결되어 스스로(자동적으로) 건강관리를 하게 되면 수명연장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사생활 침해와 감시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은 2016년이 지능정보사회(제4의 물결)의 원년이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알파고는 컴퓨터에 사람이 일일이 가르치지 않고 규칙을 알려준 뒤 필요한 데이터만 제공하면 패턴을 보고 스스로 학습해 최고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 기술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인공지능 기반 기술 혁신은 산업, 고용, 서비스, 삶의 방식 등 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을 불러 올 것이다.

1차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해 주었다면, 4차 산업혁명에서는 기계가 인간의 뇌를 대신하게 된다. 최근 인공지능과 관련된 ‘상호학습 로봇’의 출현은 스스로 일하는 ‘노동자 알파고’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 상호학습 로봇은 인간의 개입 없이 인터넷망을 통해 로봇들끼리 학습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능력을 키워간다.

노동경제학자인 리쳐드 프리먼(하버드대 석좌교수)은 “미래에는 로봇을 소유한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 했다. 하여 우리는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제8회 아시아미래포럼 연사에게 듣는다’, 한겨레, 2017.10.17). 기술혁신에서 가장 큰 우려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일자리의 절반 이상을 없앨 것이라는 전망이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은 주요 국가에서 앞으로 5년 동안 500만 개의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되고, 초등학교 입학생 중 65%는 미래에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프리만 교수는 기술발달 과정에서 기술혁신이 생산성을 끌어 올려 소득이 늘고 그것이 고용의 증대로 이어진다고 본다. 기술이 없앤 일자리보다 결국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게다. 하지만 기술혁신의 성과가 로봇과 인공지능 같은 고성능 자본을 소유한 소수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리먼 교수는 “소수의 사람들이 기술혁신을 독점한다면, 우리는 로봇시대 봉건제(robot-age feudalism)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이를 피하려면 기술혁신에 따른 과실을 자본과 노동이 공정하게 나누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는 “소수에서 다수로 자본소유구조를 분산해서 디지털화의 이익이 로봇 소유자에게 온전히 흘러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4차 산업혁명 이후 기업 소유권의 광범위한 분산을 변화된 자본주의의 미래상으로 제기한다. 이런 맥락에서 전체 국민에게 일정한 이익을 배분하는 ‘기본소득제’가 하나의 대안으로 논의될 수 있다.

우리에게 4차 산업혁명은 놀라운 혁신을 초래하게 되겠지만, 그에 따라 발생되는 예기지 못한 문제들은 오롯이 우리가 자초한 일이어서 그 해결도 우리의 몫이다. 클라우스 슈밥(2016)은 4차 산업혁명의 성공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다음처럼 제기한다.

 

•상황 맥락(contextual)지능(정신): 인지한 것을 전체 맥락에 비춰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

•감성(emotional)지능(마음): 사고와 감정을 조절하고 결합해 자기 자신 및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능력

•영감(inspired)지능(영혼): 변화를 이끌고 공동선을 위해 공공 목적, 신뢰성, 박애를 발휘하는 능력

•신체(physical)지능(몸): 변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건강과 행복을 유지하는 능력

 

‘지성-감성-영성-몸’이 하나로 어우러져 내면적으로 통합되어야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4차 산업혁명의 안정적 성공을 위해서는 특히 감성과 영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요하다고 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인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변화의 물결이 완만하면 그에 몸담은 우리네 삶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하지만 21세기 한반도의 문명사적 흐름은 지나치게 압축적이어서 그 물결은 중층적․동시다발적이다. 전근대와 근대성, 근대와 탈근대성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한 때(서울 월드컵 무렵) 외신 기자들은 한국을 ‘다이내믹 코리아’라 했다. 그게 지금도 우리나라 국가 브랜드로 유효한지 스스로 되짚어 봐야 할 때다. 10년 전 우리나라는 국가경쟁력 11위로 세계 10위 권 내를 내다보았으나, 그 후로 현상유지는커녕 지금 26위로 밀려났다. 중국은 10년 전에 36위였으나, 지금은 27위로 우리 코밑에 와 있다.

게다가 한반도는 분단체제하에 세계적으로 가장 위험한 핵전쟁의 위기를 안고 있다. 당면한 위기들을 절호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이만열(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휴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은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2017)을 말했다. 우리에게 더 큰 한국을 만들 용기와 지혜가 있는가? 그것은 우리 각자 모두의 몫이다.

4차 산업혁명은 농인들에게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이질문은 당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농인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젊고 디지털문화와 친숙한 사람에게는 제4의 물결은 축복이다. 하지만 청인 가운데도 나이 들어 디지털문화와 거리가 먼 아날로그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4차 산업혁명은 소외와 불안 그 자체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변화가 충격적․파괴적일수록 지구 전체적으로 계층․지역간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다. 그 불평등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에는 더욱 심화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를테면,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에게 4차 산업혁명은 그들 삶과 아무관계 없는 바깥세상 혹은 외계의 이벤트일 뿐이다. 왜냐하면 ‘도가니’는 언제나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어떤 명분이든 분리된 장애인 ‘시설’은 없어져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농인들이 4차 산업사회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다음 두 측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하나는 모든 농인들이 최소한 ‘기능적 문맹’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농교육에서 ‘9세 벽’은 신화처럼 존재한다. 세월이 지나도 그 벽이 좀 채로 허물어지지 않으니 그냥 신화처럼 되어 버린 게다. 지식정보 사회에서 읽고 쓰는 문해능력은 인간됨의 필수조건이고 그 기준은 더욱 엄격해 지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문자해독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람(소위 ‘까막눈’)을 문맹이라 했지만, 지금은 글을 읽고 쓰되, 일상생활에서 신문이나 TV 자막 글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자기소개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으면 그는 곧 ‘기능적 문맹’으로 분류된다.

다른 하나는 1차 언어로서 농인사회에서 통용되는 ‘자연수어’(natural sign language)가 안정되게 획득되게 함으로써, 농인의 언어권은 물론 2차 언어로서 문자언어(읽고 쓰기)의 획득에 긍정적으로 연관 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인공와우이식수술(CI)의 급속한 확대는 농인세계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수반한다. 특히 이것은 농인의 정체성 정립과 농문화의 자존성에 큰 혼란을 초래한다. 2015년 말에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은 수어를 모어로 한 농인의 자존성과 품위 있는 농문화의 정립에 기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길은 닦아야 길이 된다.

 

 

5. 맺음: 농문화와 농인학의 과제

마지막으로 농청소년의 미래를 그들이 몸담고 사는 농문화(deaf culture)와 그들이 주체가 되는 농인학(deaf studies)의 관점에서 성찰해 보자. 우리나라에 농문화가 하나의 하위문화로서 그 자존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농인 스스로가 권리의 주체로서 농인학 담론을 당당히 정립․생산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농인 세계를 향한 질문이지만, 상대적으로 청인세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농문화를 품위 있게 유지하는 것은 농인 스스로 삶의 형식과 그 질에 의존한다. 하지만 동시에 청인세계에서 농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인정해주어야 건강한 농문화가 정립된다. 농인학의 담론은 농인당사자 중심의 권리 신장(Nothing about us without us)에 꾸준히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농인학은 청세계와 농세계의 갈등적 간극을 넘어서는 상호이해와 파트너십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상극이 상생으로 이어지는 ‘생극’(生克; becoming-overcoming)의 담론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정립된 농문화와 농인학 담론의 특수성이 세계의 보편성에 기여하게 되는 그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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