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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을 추모함

평촌0505 2010. 12. 8. 12:37

리영희 선생을 추모함

 

  당대 지식인 사회의 사표로 불리는 리영희 선생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는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리영희 선생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내가 선생의 저서를 처음 손에 쥔 것이 1984년 12월 「분단을 넘어서」(1984)라는 책이다. 이 책 2장 ‘시대상황과 지식인’에서 ‘지식의 사회적 환원’의 실천을 선생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적 성취를 사회의 그늘에서 도와준 많은 무식한 이름 없는 대중을 우리와 같은 수준까지 향상시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다 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인간(동포)의 불행을 밑거름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란 사실은 ‘소외’의 별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와 같은 상품적 지식관은 ‘소외의 지식’이다. 소외의 지식을 생산하고 팔고 사는 ‘교육’은 처음부터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소외를 제도화하는 ‘소외의 교육’이다. 수라장 같은 입시지옥과 오늘날 이 사회의 큰 질병으로 된 출세주의 교육도 아울러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리영희, 1984, pp.117-118).

 

  위의 글에서 선생은 지식인의 책임과 함께 한국교육의 병폐를 적시하고 있다. 선생께서 제기한 ‘지식의 사회적 환원’ 실천론은 사르트르의 ‘지식인의 변명’에 대한 이 땅 지식인의 간증이다. 왜 간증인가? 선생은 말한 대로 살아 왔고, 살아 온 대로 말하고 글쓰기를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 젊은이와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은사’가 되었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2004)에서 리영희가 한국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을 압축하여 “은인이거나 원흉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젊은 학생들이 소위 ‘의식화’되어 가는 모습을 바람직하다고 본 사람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은인’이라 불렀고, 병영체제 수호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선생은 은인이거나 원흉이다. 선생은 90년대에 들어 자신의 소임은 다했다는 말을 되뇌었지만, 지난 8월 김삼웅(전 독립기념관 관장)과의 대담에서 리영희 선생은 거침없이 현 정부를 비판했다.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노예정권이야. 이보다 더 심할 때가 어디 있어. 이승만 정권도 이러지 않았어. (미국에) 큰 소리를 좀 쳤다고. 헛소리를 가끔 하면서도....(전시 작전권 전환을 연장시킨 것에 대해) 나는 이제 독립국가로 생각하지 않아. 노예가 뭐가 있어. 자주? 아무 것도 없잖아. 감히 미국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지금은 일본에 강제병합 되기 직전인 1905년과 같은 거지. 파시즘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어(프레시안, 2010.09.01).

 

  최근 벌어진 서해상의 한․미합동작전 훈련이나 FTA 합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리영희 선생의 말이 더욱 와 닿는다. 선생은 이미 26년 전에 ‘소외의 지식’을 사고 파는 한국교육 현실을 직시하면서 ‘교육의 소외’를 걱정하였다. 그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로 오늘의 학교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육 소외’의 한 복판에 장애아동의 특수교육이 존재한다.

 

  강준만은 위의 책 서문에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리영희의 대표작인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혀보게 한들 그들은 그가 왜 ‘은인’이거나 ‘원흉’ 이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강준만은 ‘리영희의 삶을 통해 본 한국 현대사’ 또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본 리영희의 삶’을 이야기해야만 리영희는 물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필자가 80년대 중반에 비교적 늦게 리영희 선생의 저술을 접한 이래,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와 임헌영과의 대담 형식으로 지식인 리영희의 삶과 사상을 정리한 『대화』(2005)이다. 리영희 선생은 『대화』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위하여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背信)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중략)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刑罰)이었다. 이성(理性)이나 지성(知性)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

 

  그래서 강준만 교수는 리영희 선생을 ‘독하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그에게 ‘독한’ 관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의 지적 신념과 글은 지독하게 독한 면이 있었지만, 원래 선생의 가슴은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지인들이 많다. 지식인으로서 선생의 삶의 지표는 ‘Live simple, think high'로 집약된다. 선생의 삶이 얼마나 소박했느냐는 것은 선생이 집에 책상을 하나 들여 놓고 지인들에게 “집에 책상이 새로 생겼다”고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그 동안 선생은 책상 하나 없이 밥상을 책상삼아 『전환시대의 논리』등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평생 만년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면서 “잉크로 피를 뽑듯이 글을 쓴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손호철 교수의 회고담). 이처럼 선생은 생각의 품위는 최고로 엄격히 관리하면서 물질적 삶은 최저로 단순화하고자 했다. 김동춘 교수는 『리영희 프리즘』(2010)에서 ‘리영희와 전쟁: 전생의 세기’라는 제하의 글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경제를 그렇게 강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여 순수하게 경제적인 득실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남북한을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득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남북한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끝내고,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이 남측의 자본과 결합하여 북한 주민들이 물질적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리고, 남한은 새로운 내수시장을 창출하는 것 이상으로 더 획기적인 경제적 사실이 있을 수 있을까? 과연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에서, 중국․미국․일본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전쟁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채 남한이 21세기의 세계문명을 주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 국가라는 우상, 시장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민중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리영희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도 이렇게 집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새가 좌우의 날개 짓으로 창공을 날듯이 언제 우리 사회가 좌우 어느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양쪽을 아우르는 평화통일을 가져 올 수 있을까. 그 날을 고대하면서 다시 한 번 리영희 선생의 명복을 빈다. 김병하(2010.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