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작가의 『용서』를 읽고
-작품에 담긴 두 가지 함의-
구미가 낳은 해방둥이 작가 박도가 자전적 참회록으로 장편소설 『용서』를 냈다. 작가의 나이 어언 70대 중반에 접어들지만, 작가로서 그는 지금이 전성기 인양 농익은 필력을 과시한다. 글쓰기에 몰입하는 박도 작가의 집중력과 에너지가 놀랍다.
나는 박도의 장편소설 『용서』를 읽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느꼈다. 그 하나는 나이 들어 늘그막에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참회’(懺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일이다. 불교에서 ‘참회’는 곧 깨침이다. 기존의 내가 깨져야 붓다(즉,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도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다고 했다. 여기 ‘회개’(悔改)는 그냥 자기 죄를 반성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의식변혁으로서의 메타노이아(metanoia; 우리나라 성경에 ‘회개’로 번역되어 있으나, 총체적 ‘의식변혁’을 의미함)다.
우리는 근대 문예사에서 가장 진솔하고 위대한 참회록으로 흔히 루소의 『참회록』과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든다. 더 가까이에서 우리의 민족시인 윤동주는 이런 ‘참회록’(1942)을 남겼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참으로 순결한 시인의 참회록이다.
박도 작가의 『용서』첫 장에 실린 농부시인 홍일선의 <용서……라는 씨앗>의 헌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빛 없는 어둠 속에서/ 오랜 날 증오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여/ 그대들이었구나/ 어머니 첫 마음의 언어/ 용서라는 씨앗/ 용서……라는 귀한 꽃말/ 잊어버리고 살아야만 했던/ 용서라는 말씀 찾아 일생 헤맸던/ 우리 장지수들 강숙자들 이도영들 조현들/ 그대들 그대들이었구나/ …(중략)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눌 시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나니/ 오늘 무릎 꿇어 받으시게나/ 용서……라는 은유한 법문/ 용서……라는 씨앗. 그렇다. ‘용서’는 우리네 삶의 씨앗이다. 씨앗은 그냥 두면 말라서 죽는다. 보살펴 가꾸어야 열매를 맺는다.
우리 모두는 나이 들면서 ‘용서’(容恕)라는 말을 거듭 되새김질 할 수 있어야겠다. 뜻글인 한자의 容은 계곡을 큰 갓머리가 덮어씌운 형상이다. 노자는 ‘곡신불사’(谷神不死)라 했다. 계곡은 모든 것을 품어 안기에 죽지 않는다는 게다. 그 계곡을 다시 위에서 덮어 감싸는 게 ‘용서’의 容이다.
공자 가라사대인 『논어』열쇠 말은 어질 인(仁)이다. 어느 날 제자가 공자에게 ‘仁’을 한 마디로 줄여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공자 답하길 ‘서’(恕)라 했다. 여기 恕는 여여(如如)한 마음(心)이니, 불가에서 말하는 하나인 마음(一心)이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인, 이른바 하나인 마음이다.
해서 어느 스님은 “용서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작품에서도 스님의 법문처럼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랬다. 우리 인간은 사는 동안 이런저런 모습으로 죄를 지으며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는 게다. 우리가 설사 때와 먼지 속에 살고 있더라도, 그 때와 먼지를 부단히 걷어내는 동안 좀 더 좋은 삶이된다. 거울에 때와 먼지가 겹으로 쌓이면 거울이 거울 구실을 못한다. 그렇더라도 거울(즉, 明鏡)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때와 먼지를 걷어내기만 하면 거울은 명경으로서 어김없이 제 본질을 회복한다. 『용서』이후 박도 작가의 정신세계 나아가 영성은 그 전보다 고양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보기에 박도의 『용서』가 주는 또 하나의 함의는 죽은 자의 영혼과 살아 있는 자의 만남이다. 작가는 『용서』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우리에게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라는, 이른바 ‘생사불이’(生死不二)를 말해 준다. 죽은 후에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적 세계는 그냥 믿음의 문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즉, 믿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게다.
그러나 최근 근사체험/임사체험(near dead experience)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보고에 의하면, 죽음 이후의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세계적인 죽음학자로 알려진 로스(E. Q. Ross)는 『사후생: 죽음이후의 삶에 대해(On Life after Death)』(1991; 최준식 역, 1996/2008)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문제는 믿고 안 믿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다. 죽음에 대해, 제대로 그리고 정말로 알기를 원하는가? 나는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건 알고 싶지 않다고 해도 좋다. 어차피 한 번은 죽게 마련이고, 그 때는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죽음학(dead studies)의 대가인 로스 박사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더라도 자신이 죽어보면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게다. 필자가 보기에 예수의 부활은 영적 부활이다. 예수처럼 영성이 아주 강한 사람에게는 온전한 육신의 부활도 가능한 게다.
소설 『용서』에는 영혼이 맑은 장지수와 조현이 심층세계에서 ‘용서’를 매개로 죽음과 삶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정겨운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가 퍽 진솔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필자가 보기에 그 백미는 소설 말미의 ‘신원’(伸寃)에서 절정을 이룬다. 여기 ‘신원’은 원통하고 후회스런 일을 털고 풀어버리는 것이다. 신원과 비슷한 의미로 ‘해원’(解寃)이라는 말이 있는데, 원한을 풀어준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개벽종교 가운데 증산교를 창도한 강증산(姜甑山)은 농학농민혁명 때 일본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수십만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원사상(解寃思想)을 내걸었다.
박도의 『용서』는 늘그막에 참회하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고백이자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이야기다. 누구나 차마 말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기 마련. 그 이야기의 열쇠 말이 작가 박도에게는 ‘용서’다. 작품에서 조현은 태평양 건너 북미대륙을 가로질러 뉴욕까지 찾아가 죽은 장지수를 불러내어 ‘해원’의 살풀이를 벌린 게다. 끝으로,『용서』이후 심출가(心出家)한 작가 박도의 평안한 노후를 빈다. (2018.10.20. 구미 삼일문고 북 콘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