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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억과 늙어감

평촌0505 2019. 1. 1. 17:54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가족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그 기억은 우리네 삶과 죽음을 다시 반추하게 한다. 내가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른 봄 눈발이 옅게 깔린 보리밭 들녘으로 할머니 상여가 나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영상처럼 스친 기억이 남아 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건너 방에서 내 울음소리가 나면 “아이 울리지 마라”고 이르셨단다. 그리고 막내 손주인 내가 태어나자 첫 새벽에 일어나 낙동강 물을 한 동이 이고 와서 첫 7일 동안 매일 그 물로 나를 씻기셨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어머니를 통해 내게 아련히 남아 있다. 그 할머니의 정성이 내 몸과 맘을 오늘까지 이렇게 지켜 주신지도 모른다.

 

그 때만해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 의식은 삼년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의 효성이 그만큼 지극했던 것 같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 의례였을 터인데. 게다가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사랑채 할머니 빈소에 상을 차려놓고 어머니가 구슬프게 소리 내어 곡하시는 게 참 신기하고 특이한 의례로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1899년생)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니 요즘으로 치면 요절하신 게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의 행적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고모부가 할아버지 시신을 지고 어린 아버지가 그 뒤를 따르는 애달픈 사연이 전설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한일합방 직전 곤궁한 민중의 삶을 짐작케 한다. 근데 생전에 인연이 없었던 할아버지를 나는 그분이 돌아가시고 70여년 후에 산소 이장을 하면서 내 손으로 건장한 할아버지 뼈를 가지런히 모시고 할머니 묘소 옆으로 옮겨드렸다. 그게 죽은 할아버지가 막내 손주인 나에게 유일하게 남긴 유적이었다. 그래도 내 몸에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핏줄이 흐르고 있을 터이다. 이처럼 할아버지와 나의 연(緣)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말한 <불연기연>이다. 즉, 불연(不然)이 기연(其然)이고 기연이 불연인 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간접경험의 토막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내가 가족의 죽음을 직접 목도한 것은 1969년 정초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였다. 아버지는 노환으로 일 년 남짓 몸져 누워계시다가 온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엄한 죽음을 맞으셨다. 여기 ‘장엄한 죽음’이라 함은 두 가지 면에서 뚜렷이 내게 남아 있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온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셨고, 게다가 친척들까지 임종 시에 함께 엎드려 곡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장엄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5일장에 이르는 죽음의례(상례; 喪禮)가 온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축제처럼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 때가 내가 대학졸업하기 직전이었는데,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장정들이 나서서 큰 상여를 메고 들판을 지나 빙판인 낙동강을 건너 5Km 이상이나 운구해 가야했다. 상여를 이끄는 구슬픈 앞소리에 상여꾼들의 뒷소리가 우렁차게 이어졌다. 이렇게 아버지는 죽어서도 마을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유감없이 보이신 게다. 나는 그 이래로 고향마을의 장엄한 장례를 목도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당대 동네에서 죽어서도 어른 대접을 받은 마지막 분이었다.

 

죽음에는 차례가 없다더니 6.25 한국전쟁 때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큰 형님께서 1984년 어느 초봄에 큰 길을 건너시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식물상태인 채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당했다. 죽음을 맞이하신 게 아니라 느닷없이 당하신 게다. 최근 몇 10년 동안 자동차 문화가 우리에게 일상화되면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지 않은 게 우리네 현실이다. 전쟁이나 질병에 의한 죽음보다도 더 일상화된 게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이다. 교통사고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사고사는 이 시대의 재앙이 되었다.

 

오남매의 막내둥이인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부산 큰 형님 집에서 공부를 했다. 내 결혼 때도 큰형님이 혼주 노릇을 해주셨다. 사고를 당하던 날도 큰형님은 둘 째 형님과 저녁에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두 분끼리 약속한 터였다. 평소 차분하던 분이 그날따라 왜 그리 급하게 길을 건넜는지 모르겠다. 졸지에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고사였다. 지금도 나는 식구들에게 차 조심하라고 입버릇처럼 당부를 한다.

 

그나마 나의 어머니는 96세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장수하셨다. 어머님이 장수하시는 걸 보고 나는 사람이 너무 오래 살아도 어른 대접받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노모를 내가 직접 모시지 못하고 큰댁에 가서 노년의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면 맘이 편치를 않았다. 나이가 드시니 아예 전화로는 대화가 되질 않았고, 직접 뵈어도 동문서답하기 일쑤였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치매증상까지 있어 그냥 혼자서 골방에 계시는 걸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가 뒷방 노인이 되어  그렇게 지나시는 걸 보기가 민망해 구미 큰댁 근처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입원절차로 간단히 병원에서 기본검사를 해보니, 노화에 따른 쇠약증세 외는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일반병실에서 어머니가 편안히 쉬실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부터 두 분 형님이랑 서울 누님도 내려 오셔서 교대로 어머니병실을 지켰다. 나는 정년하기 전이라 주로 집사람이 병원에서 수발을 들고 틈나는 대로 한 번씩 병원에 갔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BK21 후속작업을 하고 있던 차에 어머님이 위중하니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음력 정월 보름을 이틀 앞두고 햇살 좋은 아침에 어머님은 그냥 마른 짚불 사그라지듯이 그렇게 조용히 숨을 거두시면서 자연사(自然死)하셨다. 사람이 자기 목숨이 다하면 저리 평안히 잠자듯 죽음을 맞을 수 있는가 싶었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는 우리 가족 중에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런 임종을 맞으신 분이다. 아마 평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욕심 없이 살아오신 탓인가 싶다. 허물 벗듯이 육신의 헌 옷을 벗고 영의 세계로 홀가분히 떠나신 게다.

 

어머니 장례를 모두 치루고 집사람이 장례부조금도 좀 남은 게 있으니 어머님 49재를 올려드리자고 했다. 막내며느리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49재를 올리자는데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 49재를 외가와 인연이 깊은 도리사에서 모시기로 했다. 근데 그 49재는 평소 불심이 깊은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큰 공덕을 입게 되었다.

 

왜냐면 그게 인연이 되어 나는 불가(佛家)에 친밀감을 가지던 차에 그해 여름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이홍우 교수가 편역한 『대승기신론통석』(2006)을 손에 들고 빠져들었다. 지금도 평생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고전을 한 권 들라면 단연<대승기신론>을 꼽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연고로 지난 5월에는 대구시민대학에서 내가 읽은 고전강좌로 <대승기신론>강의를 하나 맡기도 했다.

 

내친 김에 기신론에 얽힌 사연을 털어놔야겠다. 기신론을 읽고 손에 딱히 잡히는 건 없었지만 뭔가 가슴에 확 와 닿는 걸 느꼈다. 누구나처럼 부처의 씨앗을 내장한 중생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가? 딱히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로부터 나는 기신론을 열 번은 더 읽었을 게다. 한 동안 서점에 있는 기신론은 뭐든 보이는 대로 구입해 읽었다. 그 중에도 『대승기신론통석』(2006)은 내게 각별한 함의를 안겨 주어 거듭 읽었다.

 

오죽하면 정년 직전 대학원 강의에서 이 통석을 기본교재로 택한 적이 있었고(개설 강좌와 직접연관이 없었음에도), 그 후 「대승기신론의 특수교육 교사론적 함의」라는 논문도 한 편 발표하기도 했다. 아직도 기신론의 가르침이 확실히 내 안에 자리 잡지는 못했으나, 그 가르침이 주는 신비성은 여전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은 신비다. 이게 모두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게 얻어진 공덕이다. 어머니가 내게 준 유지(遺志)이자 공덕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2010) 가로 늦게 세계인명사전인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제되고,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에서는 21세기 지식인 2천명에 나를 선정해주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인명사전 첫줄에 아버지 Kim, Hong Sang(김홍상; 金泓相), 어머니 Park, Bong Seok(박봉석; 朴奉石)이라는 영문 이름이 표기된 것을 보고, 그나마 내가 교수로 살아오면서 부모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자식 노릇한 것으로 위안 삼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한글도 해독하지 못한 문맹으로 살아온 고달픈 일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언어는 모진 세월을 인고한 생동감과 영감이 배어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내게 ‘천강스럽다’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이것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어머니는 내게 구비철학자였다.

 

내가 정년하고 이듬해(2013) 내 생일날에 둘째 형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님이 나를 나은 날에 병모 형님을 데리고 가신 게다. 그 형님은 술과 담배를 좋아했고, 평생 교직생활을 했으나 자유분방한 면이 있었다. 형님은 형제들 중에 공부를 잘해서 1950년대에 대학을 졸업했으나,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굴곡진 삶이었다. 나는 그런 형님의 모습이 속으로 마뜩찮았지만, 마지막 죽음에 임하는 형님의 강단이랄까 내공에 놀랐다.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아 큰 수술을 몇 차례 받았지만 그냥 하시던 대로 술과 담배를 즐기셨다. 그러나 말년(83세)에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만큼은 확실히 행사하신 분이다.

 

돌아가시기 3일 전까지만 해도 과원 밭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는 쉬고 싶다더니 그길로 누우셨다. 병원에도 가질 않고 조카들이 전화를 해도 올 필요가 없다고 만류하셨단다. 그러고는 혼자서 이른 새벽에 거처하는 방에서 조용히 운명하신 게다. 그야말로 자기 의지대로 살다가 마지막 죽음도 자기의지로 그냥 의연히 맞이하신 게다. 죽어감과 죽음문제에 관한한 나는 둘째 형님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난다.

 

평소에 지족(知足)을 강조하신 탓인지 당신의 죽음도 그냥 기꺼이 맞이하신 게다. 다만 자녀들에게 임종의 기회마저도 주지 않은 걸 두고 아쉽다 할 수 있지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차피 혼자서 가야할 길인걸. 나는 형님 시신 곁에서 부디 어머님계시는 곳에서 편히 쉬시라고 명복을 빌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 중심의 죽음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내 위의 셋째 형님은 지금 80대 중반인데, 투석을 하신지가 오래되어 건강이 퍽 좋지 않다. 그런데도 용케 잘 견디시는 편이다. 첨단 의술 덕분에 어렵사리 버텨 오신 게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병원에 가서 장시간 투석을 해야 하니 참 힘든 삶이다. 내가 보기에 한 분 계시는 형님의 삶은 이제 죽어감의 연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싶다. 어쩌다가 뵈면 형님은 눈물을 지우시곤 한다. 그래도 옆에서 형수씨가 형님을 따뜻이 잘 보살펴 주시니 큰 다행이다.

 

세월과 함께 늙어가면서 나는 어찌될까? 뭐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나는 죽음을 반추하면서 살고자 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문제는 정신력이다. 끝까지 내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노인들에게 암보다 무서운 게 치매다. 80대 중반을 넘어서면 노화에 따른 치매증상은 정도의 차이 일뿐 일반적 현상이다. 그래서 끝까지 정신 줄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게다. 까딱하면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다. 오래 사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답이 없다. 다만 늙어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끝까지 행사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게 남은 지난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