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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사랑: 성산 이영식 목사 평전

평촌0505 2019. 4. 24. 18:46

 

 

  종교사회학자 정태식 교수(경북대)는 성산(星山) 이영식(李永植; 1894-1981) 목사의 전기 『담대한 사랑』(2019)에서 “19세기에 태어나 21세기 정신으로 20세기를 산 이영식 목사”라는 부제를 달았다. 독립운동가로 일제치하의 압제에 저항한 이영식 목사는 광복기념사업으로 남한에서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대구맹아학교를 설립(1946)하고, 그 후 장애아동 교육․복지 분야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사회사업대학(오늘의 대구대 전신)을 설립(1956/1961)하였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대구대학교 포털 화면에는 “대구대학교는 독립운동가 성산 이영식 목사가 설립한 민족대학”이라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 글귀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우리나라에서 광복 후에 독립운동가가 직접 설립한 민족대학이 정말 있기나 한가 싶었다. 친일세력이 설립한 거대 사학은 경향 각지에 깔려 있지 않은가! 3․1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투옥 형량이 3년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영식 목사는 서울과 대구 형무소에서 2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이 사실은 대구에서 독립운동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이영식의 비중을 가늠케 한다.

 

정태식 교수는 『담대한 사랑』(2019)에서 이영식의 삶과 사상을 어째서 “19세기에 태어나 21세기 정신으로 산 사람”으로 압축 했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영식은 다음 두 측면에서 21세기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남다르게 체현하고자 했다. 그 하나는 목사로서 기독교적 제도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당대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몸으로 함께 살고자 했다. 그는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다. 늘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현장의 사람’이고자 했다.

 

일본에서 고베신학교를 졸업(1927)하고 버젓한 교회담임목사로서 신분이 보장되었음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센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하고자 했고(1945년 대구 애생원 나환자 교회), 이어서 음지에 갇혀있던 벙어리 봉사들에게 재활의 빛을 안겨주고자 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낮은 곳을 향하여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했다. 하여 이영식은 21세기 정신으로 살아온 선각자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다른 하나는 그가 신학을 공부한 기독교 목사였지만, 결코 ‘기독교주의’에 머물지 않고 심층종교의 가르침을 폭넓게 수용하는 대자유인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팔은 벌리는 만큼 껴안는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자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삶 속에는 동양의 노장사상이 녹아 있었고, 티니언 섬에 버려진 한국인 유해봉안 위령제에서는 고혼(孤魂)들을 달래기 위해 불교의례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에게 어떤 ‘주의’(-ism)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중심의 ‘인광(人光)주의’일 뿐이다. 여기 ‘인광주의’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인광’은 “사람이 곧 세상의 빛”이라는 이영식의 열쇠 말이다. 그에게 인간은 우주의 주인이자 빛이다. 그는 인간의 낙원은 ‘지금 이곳’의 지상에 있다고 했다. 지금 이곳의 낙원을 위해 인간은 높은 정신력과 영성적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영식의 ‘인광주의’는 사람이 곧 하늘(人是天)임에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事人如天)하라는 동학의 가르침과 맞닿는다. 물론 이영식에게 동학과의 직접적인 연관이나 그 영향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다만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든지, 사람이 곧 빛이라 하든지 간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높은 자각은 다르지 않다는 게다.

 

물론 이영식의 종교적 뿌리는 기독교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근로 장학생이라는 어려운 조건으로 대구의 최초 미션계 근대학교인 계성학교를 졸업(1919)하고, 일본에서 고베신학교(1923-1927)를 나와 목사가 되었다. 귀국 후에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대구중앙교회 담임목사(1929)가 되었으나, 기존의 교회중심 목회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나환자(한센병인) 시설의 애락원 원목을 택하게 된다.

대구나환자 시설은 1913년 미국 의료선교사 프렛처(대구동산의료원의 전신인 대구제중병원 원장)가 설립했다. 그는 한센인들이 거리를 떠돌며 걸식하는 것을 보다 못해 제중병원 부근의 초가집 한 채를 매입해 10여 명을 격리수용했다. 그 후 더 많은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영국구라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달서면 내당리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1916년 대구 나병원을 개설했다. 이 병원은 1924년경에 한센병인 요양소로 체계를 갖추고, 이름도 대구 애락원으로 바뀌었다. 애락원은 한센인 600명 이상을 수용할 능력을 갖추었는데, 이영식은 바로 애락원의 원목으로 자원해 1936년까지 약 7년간이나 시무했다. 이영식의 이런 파격적 선택을 정태식은 『담대한 사랑』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에게 있고, 예수의 삶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삶이었다. 여기서 이영식은 흐르는 물과 같은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물은 높고 깨끗한 데로 올라가려 하지 않고, 낮고 더러운 곳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고요히 스며든다. …(중략) 이런 생각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노자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이영식의 삶의 의미체계가 기독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기에 앞서 동양인이며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정태식, 2019, 77쪽).

 

그렇다. 이영식은 예수처럼 낮은 곳을 향해 살고자 했다. 목사로서 기독교제도권 틀에 머무는 삶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게다. 결과적으로 이영식은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삶의 형식을 체현했지만, 그게 반드시 노자철학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을 게다. 다만 이영식은 나이 듦에 따라 자연히 동양의 노장사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했을 뿐이다.

이영식은 노년에 스스로 구안하고 실천한 <장수비결>에서 결국은 생사가 하나라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양생(養生)을 위해 (1) 줄여야 할 것으로 소식(小食; 과식하지 말라), 소언(小言; 말을 절제하라), 소노(小怒; 화를 내지 말라), 소욕(所慾; 욕심 부리지 말라)을 말했다. (2) 늘려야 할 것으로 다동(多動; 많이 활동하라), 다휴(多休; 자주 휴식하라), 다보(多步; 많이 걸어라), 다욕(多浴; 매일 목욕하라), 다설(多泄; 잘 배설하라), 다면(多眠; 숙면하라), 다소(多笑; 많이 웃어라), 다망(多忘; 잊어버려라), 다애(多愛; 많이 사랑하라), 다정(多靜; 고요함을 유지하라), 다용(多容; 두루 용서하라), 다인(多忍; 끝까지 참으라), 다용(多勇; 용기를 가져라) 등을 말했다. 이런 양생법은 이영식의 체험적 건강요법이긴 하지만, 다분히 노자의 양생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센인 시설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생활에 이어, 이영식 목사가 두 번째로 택한 낮은 곳을 향한 결단은 벙어리․봉사들과 함께하는 장애아교육이었다. 일제치하에 독립운동가로 2년간이나 옥고를 치룬 이영식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광복기념사업으로 기꺼이 택한 사업이 장애아를 위한 특수교육이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각장애아와 청각장애아를 위한 특수교육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게다.

이영식 목사가 장애아동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살아오면서 얻은 개인적 체험과 일정한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심한 안질로 실명 위기에서 벗어난 어머니에 대한 회상,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으로 한쪽 고막이 손상된 데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방에서 만난 농인과의 인연은 그에게 장애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 계기가 되었을 게다. 그는 일본에서 훈맹원(1880년 설립)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맹인 목사 이바와시 다케오(岩橋武夫)가 내한해 대구에서 시민강좌를 할 때 통역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게다가 대구의 기독교계에서도 진적에 장애아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해 청원한 적이 있었다. 1924년 4월 12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교인 김명도는 경북노회에 맹아학교 설립을 청원했다. 당시 대구 제일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이영식 목사의 장인, 즉 박두순(朴斗淳) 여사의 부친 박문찬 목사가 당회장으로 회의를 주제하였다. 그 청원이 당시에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장애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었던 게다. 이 사실(史實)을 기념해 이태영(이영식의 장남) 대구대 초대총장은 부설 특수학교로 포항에 ‘명도학교’(위 청원자 김명도의 이름을 딴 것임)를 1988년에 설립하기도 했다.

김명도의 청원이 있은 지 22년이 지나 마침내 이영식 목사는 대구의 뜻 있는 유지들을 규합하여 1946년 4월 19일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대구맹아학원 발기 회의를 열었다. 개원은 대구 중앙교회에서 맹․농학생 12명으로 시작하였다. 맹교육에서 점자지도는 박영생 선생이 맡았고, 농아동의 수화지도는 농인 동생을 둔 김정희 선생이 맡아 했다. 그러나 수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장애학생들로 인해 교회시설이 파손된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고, 그 후 제일교회로 옮겼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성교회의 장애인에 대한 이런 배타적 태도를 정태식은 다음처럼 적시한다.

 

훗날 신앙인이라고 스스로를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기성교회를 이영식 목사가 멀리하게 된 것도 이러한 교회의 행태 때문이었다. 교회는 죄인이 모이는 곳이며 교회당은 만민이 거하는 집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작금의 교회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수준이 엇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동질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친교를 나누는 사교모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교회에 대한 독점욕과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성이 강화되어 갔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대구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그 정도로 폐쇄적이고 차별적일 줄은 몰랐다(정태식, 2019, 99-100).

 

이영식 목사가 기성교회로부터 멀어지고, 목사로서 목회철학이 바뀌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이런 배타적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터이다. 사회적 냉대와 경제적 궁핍으로 공적 지원 없이 사인의 힘으로 장애인교육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힘겨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이영식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발상의 전환이 왔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세인의 인식태도를 계몽하고 더불어 대구맹아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맹학생과 농학생 몇 명을 데리고 전국의 학교, 관공서 등을 순회방문하면서 이들 장애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표하게 하였다. 이런 기발한 시연을 통해 이영식은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장애아동과 함께하는 전국 투어는 마침내 국회의사당까지 이르게 되었다.

 

국회의장(신익희)의 양해로 의장단상에서 이영식은 웅변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기회를 얻었다.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그의 장애인교육과 복지에 대한 연설은 호소력에 넘쳤다. 국회의장은 이영식 목사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한센인들과 함께한 경력을 알고 있었기에 신뢰와 존경을 표했다. 이영식은 장애아를 위한 재활복지법이 하루 속히 발의되기를 청원하면서 연설을 끝냈다. 국회를 나설 때 국회의장은 의원들의 자발적 성금이라면서 거금을 건네주었다. 다음 날 도하 신문에는 이 목사의 국회연설이 사진과 함께 기사화되어 전국적으로 장애인교육과 복지문제에 관심을 갖는 민간독지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6․25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대구맹아학교도 휴교령을 내리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은 동족 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기도 했다. 이 전쟁의 와중에 이영식 목사는 대구에서 낙동강을 건너 고향 성주에 남아 있는 사촌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갔다가 다시 낙동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결국 인민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 목사는 미제국주의의 고등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인민군들로부터 사형 확정 통보를 받았다.

1950년 9월 24일 11시에 부근 산골짜기에서 사형 집행을 위해 인민군들이 구덩이를 파고 있는 동안 사형집행 간부는 이 목사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그는 곧 대구를 점령하면 가족들에게 유언을 전해주겠다고 했지만 조롱하는 빛이 역력했다. 마지막으로 이영식은 가족들은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 갈 것, 특히 그가 어렵게 시작한 벙어리 봉사 사업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 줄 것을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유언을 마치자 인민군 간부는 들고 있던 권총을 내려놓고 가슴속에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마지막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이영식은 어린 시절 나무꾼으로 살아온 내력,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2년간 감옥생활을 한 것, 한센인촌에서 목회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대구에서 처음으로 맹아학교를 세운 이야기를 조리 있게 이어갔다. 약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듣던 간부는 지서의 책임자를 불러 “이 영감은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면서 즉석에서 석방을 명하였다.

사형장의 총구 앞에서 한센인과 벙어리 봉사들이 이영식을 구해 낸지도 모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사가 둘이 아니란 걸(生死不二) 극적으로 깨치게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게다. 이 사건은 이영식에게 신앙체계와 세계관을 되짚어 보는 자기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정태식은 <총구 앞에서의 신앙체계와 세계관 정리>에서 이영식을 이렇게 기술한다.

 

이영식 목사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그 본질적인 가르침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왜곡되고 변질된다. …(중략) 이영식 목사는 모든 종교가 근본이념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다고 설파한다. 유교도, 불교도, 그리고 기독교도 종교적 의례와 형식은 다르지만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봉사한다는 근본이념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이영식 목사가 보기에는 공자의 안중에는 유교가 없었고, 석가모니의 안중에는 불교가 있지 않았으며, 예수의 안중에는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정태식, 2019, 130-132).

 

사형장의 총구 앞에서 ‘죽일 수 없는 사람’이 된 이영식에게 이 사건은 일생을 통해 자기성찰을 향한 중대한 고비가 된 게다. 정태식은 『담대한 사랑』(2019)에서 이영식의 정신세계를 심층종교 차원에서 ‘담대하게’ 해석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심층에서 하나로 만난다. 갠지스 강 원류를 형성하는 네팔의 구릉에는 <God is one>라는 문구가 눈에 확 뛴다. 그들에 의하면 불교든, 힌두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그 뿌리는 하나이니 하나님은 ‘하나’이다. 진적에 표층종교의 제도적 의례에 한계를 느낀 이영식은 노년에 접어들수록 심층종교의 내면적 만남(회통)으로 경도되어 갔다. 이런 정신적 바탕에서 도출된 이영식 목사의 삶과 사상의 열쇠 말이 곧 사랑․빛․자유다.

 

전란이후에 대구맹아학원의 학생 수가 계속 불어남에 따라 교지확보는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백방으로 물색 끝에 대구시유지인 대명동 공동묘지 터를 불하받을 수 있었으나, 그곳에는 오갈 데 없는 한센인들 400여명이 움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구시는 한센인촌을 철거하면 그 땅을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시에서 당연히 조처해야 할 일을 이 목사에게 떠넘긴 게다. 그곳 한센인촌의 대표가 과거 이 목사가 시무하던 애락원 교회 장로였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애락원에서 동고동락하던 한센인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거주할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목사는 이들에게 대구 근교에 거주할 만한 곳을 물색해보라고 권고한 끝에 마침내 한센인들은 칠곡군 신동제의 남쪽바지를 그들 삶의 터로 선택했다. 하지만 문제는 칠곡군에서 반대를 했다. 칠곡 신동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택상의 고향이었다. 이 목사는 궁리 끝에 국무총리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여, 만약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냥 그곳 마을 이곳저곳에 흩어져 한센인들이 살 수밖에 없다고 공박했다. 그리고 국회 보사위원회 위원들과 보건사회부 관계자들에게 탄원을 내고 그러는 과정에서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성사 시켰다. 후에 이영식은 “안 되다가도 되는 기 인생인 기라.”는 말을 즐겨 했다. 이 말속에는 이영식 일생의 ‘아리랑고개’가 농축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대명동 공동묘지 터에 마침내 ‘맹아동산’이 탄생하게 된 게다. 1953년 12월에 원생들의 기숙사를 먼저 건축하고, 이듬해에 대구맹아학교 본관 건물을 완성했다. 기숙사는 네모꼴로 동편은 농학생 숙소, 서편은 맹학생 숙소로, 남편에는 원감 사택과 창고, 북편에는 목욕탕과 식당으로 배치했다. 이영식과 그 가족들은 모두 이곳에서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살았다. 이 목사의 손자들도 이곳에서 태어나 음성언어와 수화언어 어느 쪽을 먼저 배웠는지 헷갈릴 정도로 장애아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장손 이근용의 회고)고 한다.

 

대구맹아학교는 1955년부터 고등과도 설치하여 마침내 초․중․고등 과정에 이르는 편제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과정을 끝낸 장애학생들이 더 이상 공부할 기회가 막혔다. 궁여지책으로 이영식은 고등학교과정을 졸업한 장애학생들에게 실업교육을 할 수 있는 특수대학을 만들고자 일반인도 입학이 가능한 ‘한국이공학원’ 설립을 추진했다.

이사회는 ‘한국특수교육재단’을 구성하여 ‘한국이공과대학’을 설립하기로 하고, 그 전단계로 ‘한국이공학원’ 설치인가를 경북도지사로부터 1956년 6월에 받아 내어 유기공업학과, 무기공업학과, 가정과학과 등 6학급 300명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대구대학교의 전신이 되었고,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공학원대학을 졸업하고 귀국(1956년 2월)한 장남 이태영(李泰榮; 1929-1995)의 역할이 컸다. 이영식은 1961년 2월에 정규 4년제 대학인 한국사회사업대학 초대 학장을 맡았으나, 그 해 9월부터 장남 이태영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이사장 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필자가 이영식 목사를 처음 뵌 것은 서울서 철학과를 포기하고 한국사회사업대학 특수교육과에 재입학한 1965년 봄이다. 작은 체구에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자” 했고, “안 되다가도 되는 기 인생”이라고 설파했다. 흰머리 할아버지는 캠퍼스와 맹아동산 이곳저곳을 산책하면서 우리들에게 인자한 모습을 선사하셨다.

1967년 겨울방학 때 내가 대학생파월장병위문단으로 월남을 다녀온 후에 이태영 학장이 목사님께 월남소식을 전해주라고 하여 라이트하우스원에 들렸다. 그 때 목사님은 미국의 월남전쟁 개입을 퍽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목사님을 뵙게 된 게 인연이 되어, 그 후로 나는 목사님 원고를 정리해 주기도 하면서 라이트하우스원을 가끔 들렸다.

 

그 후 필자가 모교 특수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첫 저서인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1977)에 발간사를 부탁드리니, “광복기념사업으로 ‘유무생사 일치의 정신으로” 특수교육을 시작한 걸 꼭 명기하라고 일러 주셨다. 독립운동가인 당신께서 광복기념사업으로 장애아동교육을 시작하였고, 유무생사(有無生死)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不二)을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자 천명하신 게다.

 

이영식 목사는 팔순의 노령에 괌에서 손자들을 돌보면서 생활하던 중에 티니언 섬 어딘가에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끌려간 한국인 전몰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 있을 거라는 말을 현지인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이 일에 팔을 걷고 나섰다. 1976년 10월 연 3일 간이나 티니언 정글 숲을 뒤지던 중에 콘크리트로 된 초록색 묘비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해 보니 ‘朝鮮人之墓’(조선인지묘)라고 한자로 쓰인 게 분명했다. 묘비를 확인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콘크리트로 만든 큰 유골 항아리가 새 개가 보였다. 그 속에서 당신 손으로 꺼낸 유골에 입맞춤을 하고, 82세의 노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전율 했다.

이영식 목사는 이국땅에서 억울하게 총알받이가 된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解寃) 위해 조국 산하로 유골을 송환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여러 각도로 노력한 끝에 사이판 군도 티니언에서 무참히 숨진 5천여 한국인 유해가 전쟁이 끝난 32년 만에 천안 천향의 동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77년 12월 티니언에 ‘평화기원 한국인 위령비’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제1회 위령제를 지냈다. 그 후 1980년에 사이판에도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이영식 목사는 젊어서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광복 후에는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한센인, 장애인)을 위해 앞장서 일했고, 노년에는 티니언 섬에서 일본의 총알받이로 고혼(孤魂)이 된 영혼들을 고국으로 송환하는 일에 혼신을 바쳤다. 당신께서는 노령임에도 괌에서 해외희생 동포 2세들에 대한 후원 사업을 전개 하던 중에 1981년 12월 8일 심장마비로 일생을 마금했다. 생사불이(生死不二)일진데, 사랑․빛․자유의 세계에서 영생할 터.

 

필자는 정태식 교수로부터 『담대한 사랑: 19세기에 태어나 21세기 정신으로 20세기를 산 이영식 목사』 책을 건너 받으면서 물었다. “이영식 목사의 삶과 사상을 한 마디 줄이면 뭐라 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는 서슴없이 “다이나믹한 삶, 열정적인 사람”이랬다. 『담대한 사랑』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밤이 되어도 별빛이 희미해지는 시절이다. 이 밤에도 이영식 목사의 별이 우리의 길을 환히 밝혀주고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