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인류세에서 온생명 삶과 동학의 가르침

평촌0505 2019. 11. 9. 19:42

 

 

   약 40억 년 전에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하고 거듭 진화해온 이래로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다섯 번의 ‘대멸종’은 모두 빙하와 화산폭발, 운석층 등으로 인한 기후변화가 주원인이었다. 피터 브레넌의 <대멸종연대기>(2019)에 의하면, 가장 심각했던 것은 세 번째 대멸종으로 생물종의 96%가 사라졌고, 6600만년 전 ‘백악기’의 다섯 번째 대멸종에선 76%가 멸종했다고 한다.

 

그간 인류의 누적된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로 6번째의 대멸종이 100년 안에 올 수 있고, 이 때 지구 생명종의 70%가 멸종할 것으로 내다본다. 이미 ‘더워지는 지구’가 기록적인 폭염․홍수․태풍․한파․산불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것은 최근 우리가 직접 체험하거나 보고 듣는 일상이다. 이제 홀로세(holocene)의 안정은 막을 내리고 지구의 힘과 인간의 힘 사이에 균열(파열)을 야기한 인류세(anthropocene)가 도래했다.

 

나는 지구가 인류세의 문턱을 넘어서는 1945년에 태어나, 한반도에서 산업사회의 압축발전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세대다. 하지만 그 혜택은 지구를 기후위기로 몰아넣는 엄청난 부담을 후대에 안겨주었다. 당대 우리에게 인류세가 함의하는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대멸종의 위기 앞에서 ‘생명’이 갖는 본질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혹여 이런 질문들이 함의하는 교훈을 우리 역사 속의 가르침에서 찾아낼 길은 없을까?

 

인류세의 역사철학적 함의

 

호주 캔버라의 찰스스튜어트 대학교 공공윤리 교수인 클라이브 해밀턴(C. Hamilton)은 <무례한 지구: 인류세에서 인간의 운명>(Defiant Earth: the fate of humans in the Anthropocene, 2017)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작년에 <인류세: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2018, 정서진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해밀턴은 이 책은 그냥 경고하는 생태학적 책이 아니랬다.

 

45억년 된 지구에 지구생태계의 막내격인 현생 인류가 등장해 살아 온지 불과 20만년이 지난 현시점, 즉 지금 우리에게 ‘인류세’가 도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심층적으로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게다.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에 인간의 힘이 아주 강력해져 지구 시스템 기능(힘)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인간이 지구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그 힘이 강력해 졌음에도, 자신의 힘을 스스로 조절하는 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기이한 상황’은 인간존재에 대한 근대(계몽사조)의 긍정적 믿음과 명백히 상치된다.

 

해밀턴은『인류세』(2018)에서 과학적 생태담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류세의 도래에 따른 역사철학적 함의를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우리가 목하 기후위기를 온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화할 수 있는 ‘한시적 마지막 기회’에 과학과 역사철학을 아우르는 통합적 성찰이 절실하다는 게다. 그는 새로운 인간중심주의(new enthropocentrism)를 제기하면서, 이것이 함의하는 것을 이렇게 적시한다.

 

인간의 행위성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작용에 맞물려 항상 제약을 받고 있는 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인간행위에서 필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가르는 근대철학의 근본적인 구분은 허물어졌다. 인간 행위성의 재구성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지구 시스템 과학을 넘어 철학 분야까지 다뤄야 한다. …(중략) 현재 인류세에서 지구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과 얽혀 있으며, 우리의 책임감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선 새로운(반성적) 책임감이다. 우리 자신의 복지, 미덕,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의무에 앞서(혹은 그와 함께) 지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은 우리를 엄격한 도덕적 존재로 규정한다(해밀턴, 2018, pp.91-92).

 

여기 ‘새로운 인간중심주의’가 덜 휴머니즘적인 이유는 오늘날 인류의 운명이 단지 인간의 손(힘)뿐만 아니라 ‘가이아’의 손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류세에서 인간을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의 참여자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전회를 요구한다. 해서 인간은 자연과정의 선순환 존재로 회귀하지 않을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가 우리 지구행성을 우주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격하시킨 후, 다윈은 우리를 원숭이의 후손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마음(의식)조차 통제하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지구역사학(geohistory)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근대적 계몽신념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목하 우리가 만들어야 할 무대는 역동적이고 변덕스런 힘들이 얽혀 복잡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구 시스템 과학은 필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통합한 특별한(메타) 과학이다. 과학만으로는 인류세에 함축된 유별나고 광범위한 의미를 해명해 낼 수가 없다.

 

이제 인간의 운명은 지구와 인간이 맺고 있는 ‘위험한 동맹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정치적 선택은 운명이 되었다. 우리에게 자유가 정말 위대한 것은 그 자유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의 힘과 재량을 부여한 오늘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가 생겨난다.

 

인간의 자유가 자연이 품고 있는 필연과 엮여 있다는 데서 인간(인문학)과 자연(자연과학)이 합쳐지는 인류세의 철학적 토대가 형성된다. 인간과 자연, 필연과 자유 간의 새로운 ‘이중교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자연과 뗄 수 없는 합(친/필)자연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지구의 역사 속에 인류역사는 당연히 통합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그 통합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결혼이 아니라 이혼할 수 없는 부부간의 갈등(전쟁)에 비견된다.

 

인류세에서 인간의 행동은 인간끼리의 선악척도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심과 무관심의 척도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오늘날 지구 시스템의 불안정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침에도 우리가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 것은 ‘고의적’ 무시다. 이런 무시는 무모하고 방종하기까지 하다.

 

해밀턴(2018)은 다른 종류의 윤리가 아니라 지구에 대한 인간의 특별한 윤리성, 즉 지구에서 우리의 뛰어난 능력과 고유한 책임을 통찰하는 힘을 강조한다. 세계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인간이 자연의 순리(순환원리)에 따라 그 리듬을 따를 것인지는 21세기 인류에게 주어진 최대 난제다. 탄소배출량을 줄이자는 제안은 경제성장의 명분으로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당장 우리나라를 보라. 해서 인류세는 곧 자본세(capitalocene)가 되었다.

 

<스턴 리뷰>(Stern Review)에 실린 기후변화의 경제학에 관한 불후의 문장은 기후변화야 말로 “세계가 경험한 가장 막대한 시장의 실패”라는 게다. 본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과연 어떤 계산법에 따라 행동할지는 미지수다. 우리는 아직 인류세에 대응할만한 윤리적 책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찬장이 텅 비어 있는 상태다. 해밀턴은 『인류세』(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 유럽인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진실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이제 우리는 가이아를 두려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이아는 구세주가 아니다. …(중략)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류의 지대한 중요성에 뿌리를 둔, 새로운 ‘우주론적 감각’을 통해 인도되는 그런 존재로 거듭 나야 할 것이다(위의 책, p.242).

 

이제 인간은 홀로세와 인류세의 두 지질시대 사이의 이행기(절벽)에 서 있는 운명의 존재가 되어버린 게다. 우리에게 인류세의 도래는 근대(물질)문명이 치러야 할 위험이 극단의 수준까지 치달은 것을 의미한다. 아주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는 유토피아 없이 살아가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지평선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21세기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는 전적으로 당대를 사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지구 살리기에는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는다. 당장 우리에게 ‘기후정의’(climate justice) 행동이 긴요한 이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허다한 고통까지도 감내해야 할 게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다. 지구에서 이 운명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온생명과 다중적 주체의 삶

 

이론생물학자 로위(G. W. Rowe)는 생명의 특성을 세 가지로 집약했다. 즉, 주변으로부터 자유에너지를 흡입하여 자체 유지가 가능한 대사(metabolism), 개체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복제 능력을 갖는 생식(reproduction), 그리고 변이와 선택에 의해 적응력이 증가하는 진화(revolution) 등이다. 장회익 교수는 과학이 파악한 생명의 모습을 ‘온생명’(global life)과 ‘낱생명’(individual life)으로 나눠 개념화했다.

 

약 40억 년 전부터 태양과 지구 사이에 일정한 온도 차이가 유지되면서 지속적인 자유에너지의 흐름이 형성된 것을 ‘온생명’이라 했고, 이 1차적 온생명의 흐름을 바탕으로 2차적으로 부분적 국소질서가 형성되어 나타난 게 ‘낱생명’이다. 여기 온생명은 그 자체가 독립된 자족적 생명인 반면에, 개체 생명으로서 낱생명은 온생명의 하위에 종속된 ‘조건부 생명’으로서의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개체생명(낱생명)은 근원적으로 자유에너지의 원천인 태양-지구계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음은 물론, 그 안에서 안정적인 생태조건 아래서만 생존이 가능하다. 거듭된 생명의 진화 끝에 우리 인간은 마침내 온생명을 의식하는 주체로서, 마치 우리 신체에서 중추신경계가 하는 것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전체 생명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생명이 출현한 것만큼이나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에 해당된다.

 

장회익 교수는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2014)에서 오늘 우리 인간이 온생명 속의 자기 존재를 의식하는 깨어남의 첫 단계에 놓여 있지만, 아직 그 깨어남이 자신의 몸을 움직여 각성된 삶으로 체현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게다. 이제 만일 이 깨어남이 완성되어 우리 온생명이 그 자체로 의식의 주체가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우주사적 사건에 해당되는 일이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일은 아니고 각성을 지닌 우리 인간의 집합적 의식을 통해 이루어내야 할 과제다. 온생명 안에서 중추신경계로서의 기능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오늘의 인간은 신경세포 간의 상호연결이라는 지적통합 활동을 통해 온생명이 하나의 통합적 의식에 도달하게 만들고 이 의식 안에서 자신의 모습, 즉 온생명의 존재를 자각하게 만들어 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바로 이 시기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 자신이 바로 이 놀라운 우주사적 과제에 직접 그리고 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장회익, 2014, p.238).

 

이처럼 ‘온생명의 자의식’은 곧 ‘인간의 온생명’ 의식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해서 온생명이 바로 우리의 몸이자 바로 나의 생명이며, ‘큰 나’임을 깨치는 것이 뭣보다 긴요하다. 우리 인간은 마침내 온생명의 ‘큰 나’와 개체생명인 낱생명의 ‘작은 나’가 2중적 자기정체성 혹은 주체로서 오늘 지구의 삶 무대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온생명은 30〜40억 년에 걸쳐 이어달리기 경주를 해왔으면서도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바통을 주고받으며 달려온 대부분의 주자들은 자신이 이러한 이어달리기 경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참여해 왔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늘날 우리는 내가 여기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이 온생명의 우주적 승부가 판가름 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위의 책, p.248).

 

더없이 소중한 내 삶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 손에 들린 생명의 바통이 의미 있게 이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주적 심층에서 떠오르는 내면의 나침반이 내 삶의 준칙이 되게 해야 한다. 이는 곧 『중용』에서 말하는 천명(天命)의 삶이자 지성(至誠)의 삶이다.

 

인류세에서 온생명이 신체적으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건 우리의 선택을 더욱 절박한 상황으로 내 몬다. 목하 우리 인간은 온생명의 정신세계를 펼쳐나가기는커녕 암세포와 같이 온생명의 생리를 크게 교란시키고 있다. 장회익 교수는 최근의 저술인『자연철학강의』(2019)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인간은 지금 암세포처럼 온생명의 중요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온생명의 정상적인 생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번영과 증식만을 도모하며 온생명의 몸 곧 생태계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극단적 역설이다. 우리 온생명이 태어나 40억 년 만에 드디어 지성과 자의식을 가지고 삶의 주체로 떠오르려는 시점에, 이것을 가능케 하리라 기대되는 인간이란 존재가 암세포로 전환(전락)해 온생명의 생리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장회익, 2019, p.426).

 

우리 인간의 삶은 개체로서의 ‘나’ 그리고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나’ 나아가 온생명으로서의 ‘나’가 중층적이면서 동심원적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정립한다.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이 곧 내 몸이며 우주가 곧 내 집임을 투철한 앎의 눈으로 파악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적 사건이랬다. 그것은 동시에 ‘우주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개체로서의 내 삶뿐만 아니라 온생명의 주체로서 나에 대한 각성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생명현상을 철학적으로 통찰한 한스 요나스(H. Jonas)는 신적 존재라고 할 수도 있고 존재의 근원((the ground of being)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가 태초에 끝없는 ‘되어감’(becoming) 속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했다. 해서 우주 속에서 ‘나’라는 존재(being)의 목적은 ‘되어감’ 속에 내재할 뿐이다. 인간의 삶에 진정한 의미와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요나스가 말한 것처럼 “신이 인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구해낼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장회익 교수는 “우리가 지금 나서서 신을 구하겠다는 이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가 온생명의 주체로서 우주 안에 놓인 우리의 자리를 신에게조차 양도할 수 없다는 깊은 자성의 목소리”(장회익, 2014, p.289)라 했다. 지금의 나는 그냥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지어나가는 과정적 존재다. 그 과정에는 신의 속성까지도 내재한다. 해서 우주의 신비는 곧 내 삶의 신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동학의 가르침: 인류세는 개벽세

 

주지하는 것처럼 ‘인류세’는 21세기에 등장한 지질학적 개념이다. 동학은 19세기 중후반에 한반도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한 개벽종교이자 사상이다. 시공간적으로 어느 모로 보나 인류세와 동학 간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동학의 가르침 속에는 인류세의 도래를 예견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다시(후천) 개벽의 세상을 말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동학의 21자 주문에서 열쇠 말은 ‘시천주’(侍天主)의 ‘시’(侍), 즉 ‘모심’에 있다. 『동경대전』의 <논학문(동학론)>에서 ‘모심’(侍)은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기화(氣化)하는 기운이 있어(外有氣化), 이를 어김없이 일평생 내 몸에 모시어 자리 잡게(定)하는 삶이다. 이는 곧 온생명을 의식하는 주체적인 ‘나’의 삶이다. 이것은 또한 『용담유사』에서 말하는 “무궁한 이울 속에 무궁한 나”를 체현하는 과정이다.

 

이병한은 『개벽파선언: 다른 백년 다시 개벽』(조성환, 이병한, 2019)에서 <또 다시 개벽 - 인류세의 시대정신>을 말한다. 그는 작위적인 지리적 구획을 복제하기보다 사상적 지향에 방점을 두고, 다시 개벽의 동학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동학은 ‘자각적 학문’이고 개벽은 ‘자각의 탄성’이다. 이병한은 인류세의 긍정적 대안으로 ‘개벽세’를 말한다.

 

목하 한 치 앞도 가리어 버린 저 기후변화와 현대문명의 폐기물은 동서와 남북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지구가 있을 뿐입니다. 그 둥근 지구, 하나의 하늘 아래 동서남북은 갈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온누리와 온생명과 한 살림이 있을 뿐입니다. …(중략) 세계체제론(world system)의 국가간 경쟁을 훌쩍 뛰어넘는 인류와 지구의 공진화, 지구체제론(earth system)을 모색합니다. …(중략) 인류 활동이 지구 물질대사는 물론이요 우주 물질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지 이미 오래인데도 혁신과 갱신에 게으릅니다. 인류사와 지구사가 합류하여 도달한 인류세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 ‘다시 개벽 2.0’을 갈구합니다(『개벽파선언』, 2019, pp.38-39).

 

인류세의 그림자가 ‘자본세’라면 인류세의 빛은 ‘개벽세’로의 전회다. 이병한은 “신동학이 인류세의 학문이요, 다시 개벽이 인류세의 시대정신”이랬다. 다시 그의 말에 기대어 보자.

 

160년 전 노이무공(勞而無功), 아무리 노력해도 헛되었노라, 하늘의 탄식을 들은 이가 최제우입니다. 유학의 천인합일에서 동학의 천인합작으로 도약하는 비상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1848년 <공산당선언>이 20세기를 추동했다면, 1860년 『동경대전』은 21세기를 격동시킬 것이라고 호언하고 다니는 연유입니다. 만인과 만물이 얽히고설키는 21세기, 경천(敬天)과 경물(敬物)과 경인(敬人)의 삼경사상이야말로 자유-평등-형제애를 능가하는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자유-평등-형제애’라고 해 보았자 ‘경인’ 단 두 글자로 족합니다(위의 책, pp.40-41).

 

삼경사상(경천․경인․경물)은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내세운 독특한 사상체계이다. 그는 땅에 침 뱉는 것은 어머니 몸에 침 뱉는 것과 같다면서 함부로 침 뱉지 말라고 했다. 경천과 경인에 경물(敬物)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생명사상의 지극한 반영이다. 김삼웅은 『장일순 평전』(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학의 종교․사상․철학의 기본사상은 생면사상이었다. 동학은 사람과 천지만물의 생명을 절대가치로 두었다. 장일순 같이 눈썰미가 밝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동학의 이런 생명사상에 주목했다. 인류는 지금 물질문명의 발달과 끊임없는 욕망으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구촌이 이상기온으로 시달리고 있다. 장일순은 동학의 경천․경인․경물의 정신을 현재화하는 것이 지구촌을 살리는 길이라 믿고, 이를 자신의 철학으로 정립하고 실행했다(김삼웅, 2019, p.197).

 

해월의 삼경사상에 터하여 장일순은 밥 한 사발, 좁쌀 한 알에 우주적 만남이 있다고 했다. 해서 김지하는 ‘밥이 하늘’이랬다. 해월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은 이렇게 우리에게 이어져 왔다. 이병한(2019)은 “개벽은 목하 한국은 물론이요 전 인류에게 ‘6번째 대멸종’을 몰고 오는 죽음지향의 현대문명을 되살리는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다.”고 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은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2019)에서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은 인류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자기파멸적인 시간이었다고 했다. 서구 자본주의 산물인 산업경제와 그에 의존해온 근대문명은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자원을 사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인 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종말의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가능한 방식인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적 대사가 원활하게 순환하는 순환적 삶의 패턴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는 게다. 이미 우리가 지구온난화의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라가는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개벽세의 복원이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원불교를 창도한 소태산 박중빈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했지만, 지금 우리는 정신을 개벽해서 물질을 개벽하는 다시 개벽의 세상을 열어가야 할 게다. 그게 우리에게 동학하는 삶의 복원이자 다시 개벽의 삶이다. 우리에게 개벽세는 곧 온생명의 삶이다. 해서 인류세는 개벽세로 전회 되어야 한다.

 

마무리

 

근대성을 이끈 휴머니즘은 계몽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인류세라는 지질시대에는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인간중심주의(new anthropocentrism)가 요청된다. 이는 지구역사와 인간역사를 통합한 휴머니즘이다. 이것은 우주적 감성을 지닌 과학적․성찰적 휴머니즘이다. 이런 휴머니즘은 온생명의 삶을 주체적으로 체현하는 삶이다.

 

놀랍게도 온생명 삶의 각성은 동학의 가르침에 내재해 있다. 동학은 과학적으로 인류세를 진단하고 온생명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직관적 영감으로 “무궁한 이 울 속의 무궁한 나”의 존재성을 말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신통하게 안팎이 꼬여 과학과 철학(개벽종교)이 만난다.

 

3․1백주년 만북울림 추진위원회는 <만북으로 열어가는 새로운 100년 선언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둥! 둥! 둥!

만개의 북이 울린다. 새로운 백년, 다시 개벽을 알리는 북소리. 생명․평화․홍익․밝음이 동터 오는 한민족의 땅. 그 꿈의 땅으로 가는 8,000만의 심장이 만 개의 북으로 울린다.

 

이렇게 3․1대혁명 100주년을 맞아 하늘과 만천하에 우리의 뜻을 선포한 게다. 그것은 ‘다시 개벽’을 알리는 북소리로 한반도에서 전 세계로 울려 퍼져가야 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대한민국부터 뱃머리를 돌리는 대전환이 절실하다. 하승수는 『배를 돌려라: 대한민국 대전환』(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후위기야말로 인류 최대의 위기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그리고 위기의 해결을 위해서는 경제․사회․정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중략)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돈과 자원은 최우선적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곳에 써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하승수, 2019, p.21).

 

게다가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기후악당국가’라는 불명예스런 부담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인류세에서 개벽세로의 전회가 절실한 과제다. 당대 우리에게 동학의 가르침을 한반도에서 법고창신(法故創新)하는 당위가 막중하다.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이상 높아짐에 따라 가뭄, 홍수, 태풍, 산불 피해가 해마다 증폭하고 있다. 작년(2018.10)에 인천에서 개최된 IPCC(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체)에서는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을 45% 감축해야하며, 2050년까지는 이산화탄소 배출과 흡수처리가 서로 완전히 상쇄되는 ‘배출 제로’상태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기후정의를 위해 신속하고도 포괄적인 대전환이 절실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우리네 행동은 여전히 게으르고 유보되기 일쑤다. 물신주의에 빠져 각자도생하기에 바쁜 나머지 상생은 여전히 외면된다. 인류 공멸의 날이 한 밤의 도둑처럼 찾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