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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리뷰

평촌0505 2020. 2. 12. 18:06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저자>에 대해

 

Edward Seid(1935-2003)

1935년에 영국이 위임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에는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온 유태인들이 대거 입국해 큰 혼란이 일고 있었다. 혼란을 피해 그의 가족은 1948년 이집트로 이주했고, 사이드는 카이로의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5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비교문학 교수로 일했으며, 당대의 뛰어난 문학평론가로 평가받았다. 대표적 저술로는 『오리엔탈리즘』(1978, 박홍규 옮김, 1999)과 『문화와 제국주의』(1993, 박홍규 옮김, 2005)가 두루 알려져 있다.

그는 1977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국회격인 팔레스타인평의회(PNC) 의원으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그가 말하는 동양은 주로 중동중심인 반면, 그 연장으로서 『문화와 제국주의』는 제국주의에 저항한 문화를 제3세계권에 걸쳐 폭넓게 다루고 있다. 노엄 촘스키는 『오리엔탈리즘』은 우리가 ‘권력의 노예’가 아니라 ‘정신적 행동인’ 혹은 ‘정신적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고 했다. 사이드는 ‘서구(제국주의)정신’의 위선을 폭로한 반권력 지식인 혹은 중심에서 변방을 고집한 외로운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책의 구성>

 

본문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

 

서설(pp.13-63)에서 책의 성격과 배경을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으며, 다시 책 말미의 <1995년판 후기>에서 200년에 걸친 유럽과 미국의 권력과 학문 및 상상력의 오랜 전통이 중동과 이슬람 사회를 보는 눈을 되짚어 보고 있다. 이 후기(pp.571-609)에 이어 박홍규 교수는 다시 <옮기면서>(pp.610-676)라는 장문의 역자 후기를 적어 놓았다.

 

<서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칼 마르크스(우리에게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서구의 산물이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단지 유럽에 인접되어 있다기보다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 가장 광대하고 오래된 땅이고, 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연원이기도 했다. 동양은 유럽인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반복되어 나타난 ‘타인의 이미지’(images of the Other)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문화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갖는 언설/담론(discourse)으로 기술되고 표상된다.

사이드에게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생성하는 담론이 곧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오리엔탈리즘’이란 말보다는 동양연구/동양학(Oriental Studies)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ontological & epistemological distinction)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오리엔탈리즘을 논할 때 그 출발점을 18세기로 잡는다면, 그것은 동양을 취급하기 위한 동업조합적인 제도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다. 해서 사이드는 미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감시와 처벌>에서 기술된 ‘언설/담론’(즉, 지식과 권력의 연관성)이라는 개념을 원용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을 밝히는 데에 퍽 유효하다고 본다. ⟹ 일리치와 푸코로부터의 영향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규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동양’이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가 문제로 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불가피하게 그것에 조준된 관심의 네트워크 총체라 할 수 있다. …(중략) 이 책은 유럽문화가 일종의 대리물이자 은폐된 자신이기도 한 동양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스스로의 힘과 정체성을 획득했다는 점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오리엔탈리즘』, p.19).

 

오리엔탈리즘의 출현 과정과 그 성격

 

19세기 초엽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가 동양과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고, 과거의 영국 및 프랑스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동양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관계의 역학은 모두 서양의 동양에 대한 우월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생산력(영향력)은 거대한 것이었다. 이런 접근관계의 내부로부터 내가 오리엔탈리스트(오리엔탈리즘적인 것)라고 부르는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즉, 오리엔탈리즘의 규준을 정하는 텍스트)가 출현했다(이 책, pp.20-21).

 

동양과 서양의 관계성 정립에 대한 사이드의 입장

 

동양은 단순히 ‘그곳’(there)이라는 식으로 표시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서양이 ‘그곳’이라고만 표시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과 같다. 우리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지리적으로도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실체는 말할 것도 없고 지리적 실체이자 문화적 실체이기도 한 ‘동양’과 ‘서양’이라는 장소, 지역으로서 지리적 구분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서양 그 자체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양도 또한 사상, 형상, 어휘의 역사와 전통을 갖춘 하나의 관념의 실체이다(이 책, pp.21-22).

 

하지만 서양과 동양의 관계는 권력관계, 지배관계, 그리고 복잡한 헤게모니에 관련된 것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관해 진실을 말하는 측면보다는 동양을 지배하는 유럽적인 권력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믿는다. 그에 의하면 동양에 관한 지식체계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의 의식 속에 동양을 여과하여 주입하기 위한 필터로 만들어졌다. 동시에 그것은 참으로 생산성이 높은 것이었다. 그것은 서양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동양에 작용한 결과이기도하다.

유럽인의 동양관이 갖는 헤게모니는 동양인의 후진성에 대한 유럽인의 우월성을 계속 주장하게 하여, 서양인은 동양과의 모든 관련 속에서 언제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게다. 18세기 말 이래 동양에 대한 서양의 헤게모니 우산 아래에서 대학의 연구, 박물관의 전시, 식민지 관료기구 재편, 인류와 우주에 대한 인류학적․생물학적․언어학적․인종적․역사적 명제는 기본적으로 서양의 절대성(표준)으로부터 나오는 의식을 기본으로 삼았다. 해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제국주의에 의한 일종의 불변적인 관념적 추상으로서 ‘동양적인 것’에 대한 교조적 견해로 표출되어 왔다. ⟹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사이드의 저술 논지>

 

1. 순수한 지식과 정치적인 지식의 상이성

 

사이드는 ‘인문과학자’(humanist)이다. 지식이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희망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나, 현실은 훨씬 복잡한 문제를 포함한다. 학자는 그 생활조건으로부터, 계급이나 신념체계 또는 사회적 지위와 관련(의식적, 무의식적으로)되는 현실로부터 결코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유럽인이나 미국인은 먼저 유럽인이나 미국인으로서 동양과 직면하며, 그 뒤에 한 개인으로서 동양과 만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결코 활동성 없는 실체가 아니라, 자신이 동양에 대해 명확한 이해관계를 갖는 강대국 국민이라는 자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문화, 학문, 제도에 의해 피동적으로 비추어지는 단순한 정치적인 연구주제나 연구 분야가 아니다. 또 동양에 대한 방대하고도 산만한 텍스트들의 집합도 아니다. 나아가 ‘동양적’ 세계를 억압하고자 하는 극악무도한 ‘서양적’ 제국주의의 음모를 표상하거나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정학적인 지식을 여러 종류의 텍스트로 ‘배분하는 것’(distribution)이면서 ‘주도면밀한 것으로 만드는 것’(elaboration)이기도 하다. …(중략) 무엇보다도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언설/담론이다. 그 언설은 살아 있는 정치권력과 직접적인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권력과의 불균형적인 교환과정 속에서 생산되고 또한 그 과정 속에 존재한다(이 책, pp.35-36).

 

사이드에게 오리엔탈리즘은 정치적인 것임과 동시에 지적인 현대문화를 표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동양이라기보다 ‘우리들의’ 세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해서 오리엔탈리즘은 하나의 정치적, 문화적 사실이므로 고문서의 저장고 빈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추얼리티(textuality)의 사실로서 컨텍스트 속에 존재하는 것(intertextuality)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것을 문화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인간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취급하는 동시에 그것에 내재된 실체를 밝히고자 했다.

 

2. 방법론상의 문제

 

인문과학의 연구에서 ‘원리의 발견’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연구에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를 백과사전식으로 이야기체로 서술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럽인의 동야인관을 밝히기 위해, 나아가 정치적이면서 지적인 컨텍스트에서 비평가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그의 업무와 방법은 다른(인문학적 원리발견과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먼저 동양을 둘러싼 프랑스인과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의 경험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역사적․지적 배경에 의해 매개된 이러한 경험들이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이런 경험의 질과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밝히고자 했다. 나아가 나는 여러 문제의 세트를 영국․프랑스․미국의 아랍 및 이슬람을 둘러싼 경험에 다시금 한정했다. 왜냐하면 아랍과 이슬람이야말로 거의 1천년에 걸쳐 함께 동양을 대표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한정은 동양의 광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도, 중국, 일본을 제외하는 것이다.

 

‘권위’는 인간이 형태를 부여하고, 개발하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권위는 확고한 지위를 가지며 가치의 기준을 확립한다. 이 책에서 사이드가 연구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권위 그리고 개개인에 의해 체현된 오리엔탈리즘의 권위에 관한 서술이다. 동양에 관해 무엇인가를 쓰는 모든 사람은 자신을 동양과 대치되는 위치에 선정 지운다. 그들은 동양을 밀봉하고, 그것이 동양을 표상하는 교묘한 방법이 된다. 오리엔탈리스트란 동양에 대하여 말하고 동양에 관해 서술함으로써, 동양의 신비성을 서양을 위하여(서양의 기준으로) 파헤치는 사람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은 총체적으로 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동양 때문이 아니라 서양 때문이다. 그 의미는 동양을 ‘그곳’이라는 존재로 위치지우는 서양의 다양한 표상기술에 의존하고 정립되어 있다. 하지만 필경 더욱 중요한 일은 과연 오리엔탈리즘에 대체될 수 있는 담론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타인을 억압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입장에 서서 상이한 문화나 민족을 연구할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런 것들이 이 책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3. 개인적인 차원

 

사이드는 자신이 『오리엔탈리즘』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내가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개인적인 동기는 두 개의 영국식민지(즉,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인간으로서 지녔던 나의 ‘동양인’의식에 있었다. 이들 식민지와 미국에서 내가 받은 교육은 모두 서양의 그것이었다. 나의 오리엔탈리즘 연구는, 동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지극히 강력하게 규율해 온 문화가 동양의 피지배자 중의 한 사람인 필자 위에 새겨진 그 흔적을 기록하는 시도였다. 내가 특히 이슬람적인 동양에 주목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중략) 나는 기록을 만들고자하는 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에 따라 나는 가능한 한 엄격하게, 또 이상적으로 스스로의 비판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운 좋게도 나는 자신이 받은 교육을 통해 역사적, 인문과학적, 문화적인 연구방법이나 수단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교육과정에서도 ‘동양인’이라는 문화적 현실과 함께 동양인으로서 역사적 구조화에 스스로 속박되어 있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이 책, pp.59-60).

 

사이드는 그 자신의 인문학적이자 정치적인 관심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오리엔탈리즘의 발생과정과 전개, 그 강화라는 현실적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서술(해석)할 수 있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구분을 소멸시키는 데에 스스로 헌신함으로써, ‘고유한 지배양식’을 ‘버리는 것’을 조금은 진전시키고자 했다.

 

☞ 인류세에서 지속가능한 지구공동체(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으로 실천하기)의 성원으로 살아가기와 역(逆)오리엔탈리즘의 경계, 지식인으로서 자기성찰의 엄격성

 

 

 

 

제1부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오리엔탈의 범위’에서는 역사와 경험, 철학적 주제와 정치적 주제 쌍방의 관점으로부터 오리엔탈리즘을 둘러싼 문제의 범위를 확정한다.

 

제1장 동양인에 대한 인식

 

1910년 6월 13일 아더 제임스 벨푸어(A. J. Balfour; 1848-1930/ 영국 외상으로서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국가를 수립하는 기초를 제공)는 ‘이집트에서 처리하여야 할 문제들’에 관해 영국 하원에서 주요 연설을 했다. 그가 이집트 점령의 필요성을 정당화할 때에 스스로 염두에 둔 주권 개념은 이집트에 관한 ‘우리들의’(즉, 영국인들의)지식과 연결되었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만 결부된 게 아니었다. 지식을 갖는 다는 것은 곧 그것을 지배한다는 것, 마침내 그것에 대해 권위를 미치고자 하는 것이다. 벨푸어에게는 이집트에 관한 영국인의 지식이야말로 곧 이집트 그 자체였다.

벨푸어의 논리에 의하면, 이집트란 곧 영국이 알고 있는 이집트이다.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이것을 확인한다. 이집트인에게 이집트란 영국이 점령하고 통치하고 있는 이집트 바로 그것이다. 동양인이 위대했던 시기는 과거였다. 지금 동양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강력한 제국이 그들을 비참함으로부터 구출하고 그들을 생산적 식민지 주민으로 만들기 위해 기능회복훈련을 실시해야 한다는 게다. ⟹ 서양인은 지배하고 동양인은 지배되어야 한다는 명제의 정당화/권력화

 

벨푸어의 ‘오리엔탈리즘’에 상응한 개념으로 크로머는 ‘종속적 종족’을 말했다. 그는 <에딘버러 리뷰>(1908.01)에서 “종속적 종족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선(善)인가를 알 힘이 없다.”고 했다. 크로머는 자신의 경험과 업적을 위엄스럽게 정리한 『현대 이집트(Modern Egypt)』(이 책은 1911년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참고문헌으로 이용되었다.)에서 “동양인은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둔감하고 의심이 많으며, 모든 점에서 앵글로색슨 인종의 명석함, 솔직함, 고귀함과 대조적이다.”고 했다.

크로머와 벨푸어의 언어에서 동양인은 마치 법정에서 재판받는 존재로서, 커리큘럼에 따라 학습되고 묘사되는 존재로서, 학교나 감옥에서 훈련받는 존재로서, 마치 동물도감에서 도해되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었다.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적인 사물을 조사, 연구, 훈련, 통치의 대상으로서 교실, 법정, 감옥, 도감 속에 배치함으로써 얻어지는 동양에 관한 지식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제도와 내용면에서 급속하게 진전된 시기는 유럽의 팽창시대와 일치하고 있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 영토는 지구면적의 35%에서 85%까지 확대되었다. 모든 대륙이 영향을 받았으나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심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2대제국의 동맹국으로 동반자였으나,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그들이 나누어 먹은 것은 토지나 이윤만이 아니라,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이름지운 공유의 정보도서관인 ‘하나의 관념군’(a family of ideas)이었다.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개막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시작되었으나, 근동과 유럽 사이에 오리엔탈리즘이 설정된 시기는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한 때였다. 나폴레옹의 원정은 이집트를 필두로 이슬람권에 대해 서양의 동양에 대한 지식의 유효성이 시험되고, 그곳은 역사적 실험실과 극장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현실을 몇 가지의 문화, 역사, 전통, 사회로 또는 몇 가지의 인종으로 분할하고, 나아가 그 분할의 결과에 관계없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일까?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인간을 ‘우리들’(서양인)과 ‘그들’(동양인)로 구분하는 것에 따른 적대성을 회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중략) 그런 구분으로부터 비롯되는 결과는―동양인은 더욱 동양적으로, 서양인은 더욱 서양적으로 된다― 구별을 극단적으로 분극화하여 상이한 문화, 전통, 사회에 속하는 인간들의 만남을 제약한다. 요컨대 이국적인 것을 취급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그 근대적 전개의 시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엄격한 구분 위에 기초 지워진 지식 특유의 지극히 개탄할 만한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향이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이론과 실천 나아가 가치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상, 동양을 위압하는 서양의 권력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과학적 진리’와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이 책, pp.92-93).

 

사이드에 의하면, 한 쪽에 서양인이 있고, 다른 한 쪽에 아랍인-동양인이 있다. 전자는 (특별한 순서가 아니라) 합리적, 평화적, 자유주의적, 논리적이고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을 가지는 반면에, 후자는 그러한 것들이 모두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규정된다)는 게다.

 

제2장 상상의 지리와 그 표상 : 동양의 동양화

 

오리엔탈리즘은 학술연구의 한 분야이지만, 그것은 서양의 기독교세계 속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오리엔탈리즘과 대칭적인 위치에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을 상상할 수는 없으리라(서양정신은 곧 세계정신이기 때문이리라). 오리엔탈리즘의 경우에만 지리상의 한 ‘분야’가 학문적 전문분야로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계시적인 사실이다. 다양한 사회적, 언어적, 정치적,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오리엔탈리즘만큼 고정적이자 개괄적인 지리적 위치를 점하는 분야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그 속에 포함된 ‘이즘’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다른 모든 학문분야로부터 구별한다.

 

마호메트(Mahomet; 570?-632)가 죽은 뒤 이슬람이 지닌 군사적 헤게모니나 그 후의 문화적․종교적 헤게모니는 엄청나게 성장했다(우리는 기독교 이상으로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세계적 종교의 실체를 인정해야 한다).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슬람은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그 지배력을 미쳤다.

 

(유럽인에게) 이슬람이 공포와 황폐, 악마적인 것, 가증스런 야만인의 무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된 것도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트라우마였다. 17세기 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을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중략) 유럽인이 마음속에 그린 이슬람교도, 터키인, 아랍의 표상은 언제나 가공스런 동양을 제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중략) 기독교도의 이슬람관은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고 자기충족적인 것이었다(사이드는 이슬람교의 마호메트도 기독교의 크리스트와 같은(연관) 관계에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완전히 오류라고 했다). 이슬람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사이드에게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을 놀라울 정도로 훌륭히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책, pp.117-118)

 

아랍, 이슬람교도, 인도인, 중국인, 기타 무엇이든지 동양과 동양인은 어떤 위대한 원형(기독교, 유럽, 서양)을 반복하여 모방하는 모조품이 되었고, 그들은 다시(계속해서) 그 원형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상당히 자기도취적인 서양의 동양관은 그 원천이야말로 시간과 함께 변하는 적이 있어도, 그 성격에서는 결코 변화하는 적이 없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학문분야로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이제 그 서술은 하나의 ‘표상=대표’로서 연극적인 무대가 되었다. 그때 동양은 유럽에 부속된(구성된) 연극무대로서 그 외관을 나타낸다. 오리엔탈리스트는 그런 지식의 전문가에 불과하고 그 지식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유럽 전체(자체)이다.

 

사이드는 철학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을 ‘진보적 실재론’(radical realism)의 한 형태로 명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수사학적으로 볼 때, 오리엔탈리즘은 해부학적이고 열거적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동양적인 실체를 개별화하고 다루기 쉬운 작은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은 ‘편집과’(paranoia)의 한 형태로서 통상의 역사적 지식과는 별종의 지식이다. 이것들은 상상의 지리와 그것이 묘사한 극적 경계선에 의해 생겨난 결과의 일부이다(이 책, p.140).

 

 

제3장 사업(project)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을 동양에 대한 서양의 접근을 서술하기 위한 총칭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에 의한 규율-훈련이며, 그것은 동양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행해져 온 것의 총칭으로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서 동양이란 일관된 지배의 대상이었음에도, 아랍과 이슬람은 정치적․지적․경제적 차원에서 유럽에 대해 도전적이었다. 이슬람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럽을 불안하게 할 정도로 기독교세계와 가까웠다. 실제로 이슬람의 중심은 언제나 유럽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하여 ‘근동’이라고 지칭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수평선에 그 최초의 모습을 나타낸 순간부터 ‘우리들 프랑스인이 참된 이슬람교도’라는 것을 그들에게 믿게 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나폴레옹은 모든 곳에서 자신이 ‘이슬람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위고는 ‘그들’이라는 다음의 시 속에서, 지략에 뛰어난 나폴레옹의 동양원정 영광을 읊었다.

 

나일 강변에서, 나는 다시 그를 만난다.

이집트는 그의 새벽빛과 함께 빛난다.

그의 제국은 동양에 떠오른다.

 

위엄에 충만한 정복자, 열광자.

…(중략)

장엄하게 그는 유목민 앞에 나타난다.

마치 서양의 마호메트처럼.

 

마스크리에(Abb Le Mascrier; 1679-1760 프랑스 성직자)가 정리한 <이집트지>(1735)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이집트지>는 1809년부터 1828년에 걸쳐 모두 23권의 방대한 규모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여러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과 동양, 역사적 기억과 현실 사이의 여러 관계에서 초점이 되었다. 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폴레옹)자신이 동양의 역사, 시간, 지리를 거의 마음먹은 대로 지배하는 유럽인이라고 느끼는 것. 새로운 전문영역의 설정, 새로운 학문분야의 확립, 시야의 내부(그리고 외부)에 있는 것 모두를 분할하고, 배치하고, 도식화하고, 도표화하고, 색인화하고, 기록하는 것. 관찰 가능한 모든 세부로부터 하나의 일반론을 만들어내고, 모든 일반론으로부터 동양적인 성질, 기질, 심성, 습관 또는 유형에 관한 불변의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현실을 텍스트의 소재로 전환시키는 것, 동양에는 우리들의 힘에 저항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주된 이유로 현실을 점유하는 것. 이런 것이야 말로 오리엔탈리즘에 투사된 여러 모습이며, 그것들은 <이집트지> 그 자체이다(pp.163-164).

 

하여 <이집트지>에 기록된 역사가 실제로는 유럽사의 완곡한 표현으로서 세계사와 직접적 매개 없이 일체화됨으로써 이집트역사 또는 동양사에 대체되었다. 동양은 이집트에서 나폴레옹이 기초를 닦은 담론세계의 내부로부터 해석된 것이고, 그런 담론세계를 지배하고 확산시킨 매체가 <이집트지>였다.

나폴레옹 원정의 부산물은 문서화된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프로젝트를 낳게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에즈 운하와 1882년 영국에 의한 이집트 점령이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은 서양과 동양을 긴밀히 연결시켜 다양한 문명을 하나로 통합하는 프로젝트가 실현되게 했다.

 

수에즈 운하의 구상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의 논리와 오리엔탈리즘적인 노력의 귀결이 같이 나타난다. 과거에 아시아란 거리감과 소원감의 표상이었고, 이슬람이란 유럽 기독교 세계에 대한 전투적인 적대심이었다. 이런 상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을 알고 이어 동양에 진입하여 소유하고, 이어서 학자나 군인, 재판관의 손으로 재창조하여야 했다. 곧 그들은 잊 혀진 언어, 역사, 민족, 문화를 발굴하여 그것들을 동양을 판단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이용하고 진열시켰다. 그들에게 동양인이란 아프리카인과 마찬가지로 종속민족의 구성원이고, 반드시 특정한 지리적 영역의 주민일 필요는 없었다(이 책, pp. 173-174).

 

 

제4장 위기

 

사이드는 텍스추얼(textual)한 기준이 오리엔탈리즘에 어떻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에 따른 한계는 무엇인가를 하나의 ‘위기’로서 말해 주고자 한다. 그는 텍스트의 도식적인 권위에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결점이라고 봤다. 그는 텍스추얼한 자세가 힘을 발휘하기 쉬운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위협적이며, 멀리 떨어져 있던 것과 가까이 접하는 경우다. 해서 여행기나 안내서는 이용자의 요청에 의해 생겨난 대표적인 텍스트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현실보다 더 큰 권위를 얻어 더욱 널리 인용되곤 한다. 텍스추얼한 자세를 낳기에 적합한 또 하나의 상황은 그 텍스트로 인해 실제로 성공(막강한 영향)이 초래되는 경우다. 그런 경우 텍스트는 현실적 성공이 보증하는 이상으로 큰 위신(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때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것이 서술하는 그 현실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 지식과 현실이란 하나의 권능으로서 담론을 생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은 침묵하는 존재로서 유럽인이 생각한 대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는 실험적 장소였다. 사이드는 서양인의 저작과 동양의 침묵 사이에 있는 이런 관계를 서양의 강대한 문화적 힘 곧 동양에 대한 권력의지가 결과한 것이자 그 징후라고 평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폴레옹과 (수에즈 운하를 개통한) 레셉스가 동양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양측이 그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상태 이상으로, 오리엔탈의 언설이 현실을 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시한 견해는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다. …(중략) 오리엔탈리즘은 이 두 사람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적어도 동양인의 견지와는 완전히 무관한 그들(서양인)의 견지에서 본다면 그것은 성공이었다. 그 성공에 이르기까지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서 서양인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야”라고 제멋대로 말하는 ‘배심재판’관과 같았을 뿐, 참으로 인간적인 주고받음은 전혀 발견될 수 없었다(이 책, pp.180-181).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 위에 던진 일종의 투영도이고, 동양을 지배하고자 하는 서양의 의지표명이라는 게다. 요컨대 동양을 단순히 텍스추얼하게 이해하고 규정해서 정의하는 것이 서양에 의해 실천적으로 그대로 행해졌고, 이런 ‘터무니없는’ 전환에 오리엔탈리즘이 깊이 관여 했다는 게다. 흑인연구나 여성학과 같은 분야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와 오리엔탈리즘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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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에게 식민지란 먼저 이해관계를 감정하는 것(실은 창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이해관계에는 상업적인 것, 교통과 통신에 관한 것, 종교적․군사적․문화적인 것이 함께 고려되었다. 오리엔탈리스트의 동양은 있는 그대로의 동양이 아니라 동양화 된 동양이다. 사이드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아프리카와 동양은 서양을 위한 지적인 구경거리라고 하기보다는 도리어 서양의 특권적 무대가 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영역은 제국의 영역과 정확하게 일치되었다. 이 완벽한 일치야말로 서양의 역사 속에서 전무후무한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 위기는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제국의 지배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응은 1920년에 시작되어 제3세계를 끝에서 끝까지 뒤덮었으나, 그것은 변증법적인 것이었다. 1955년의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 아시아-아프리카회의라고도 함) 무렵에는 이미 동양전역이 서양의 제국지배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획득했으나, 미국과 소련이라고 하는 제국주의적 세력의 새로운 포진에 직면했다. 오리엔탈리즘은 이 새로운 제3세계 속에서는 더 이상 ‘스스로의’ 동양을 인식할 수 없고, 이제 정치적으로 무장한 도전적인 동양과 대면해야 하게 되었다. 오리엔탈리즘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주어졌다. 그 하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같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해오던 대로 계속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래의 방법을 새로운 사태에 적응 시키는 것이었다(p.198).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서양이 직면한 것은 잘 속아 넘어가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쉬운 동양(이프리카, 아시아의 발전도상국) 여러 나라로부터 동맹자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 미국의 중남미 원조계획)이니 ‘동아시아조약기구’(South-East Treaty Organization) 등과 같은 엿과 매의 방책(병 주고 약 주는 식)이라는 교묘한 계략이었다.

반식민주의 운동의 파고가 동양 전역을 적시고 그에 따라 동양세계가 일체화되자 오리엔탈리스트들은 그 전체의 사건이 서양 민주주의에 대해 피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욕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세계적 주요문제들―핵에 의한 파멸, 자원결핍의 파국적 양상, 평등과 분배정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자 정치가들은 동양에 대한 통속적인 캐리커처를 동원했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공급원은 어중간한 지식을 가진 테크노크라트만이 아니라 고도의 학력을 과시하는 오리엔탈리스트였다.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는 다른 문화, 민족 또는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humanity)를 무시하고 그 정수를 뽑아버려 박탈하는 결과에서 파생되는 한계이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은 교묘히 이 한계를 넘어서 더욱 더 나아갔다. 그것은 동양을 단지 서양을 위한 구경거리로서 볼 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해 시공간적으로 고정된 그대로의 존재로 보고자함이었다. 서양은 어디까지나 행위자(actor)이고 동양은 수동적 반응자(reactor)이다. 사이드는 20세기의 역사가 동양의 내부에서 동양의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을 오리엔탈리스트는 여전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고 나무란다. 그는 이렇게 질타한다.

 

오리엔탈리즘의 끊임없는 야심은 하나의 세계 ‘전부’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은 이런 지극히 광대한 야망에도 불구하고 역사학․문학․인문과학과 같은 아카데믹한 안전장치의 모포에 휩싸인 운명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거만한 과학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애원 뒤에 숨고자 노력해온 세계적․역사적 상황에 스스로 말려 들어가고 있다. …(중략)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이 그 영역과 경험 및 구조로 인하여 분명히 말살시켜온 ‘인간론적 가치’를 엄중히 살펴보아야 한다(p.207).

 

인류세(Anthropocene)에서 진보적 휴머니즘의 복원과 공존하는 권리의 주체로서 인간성 정립

 

 

 

 

제2부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제1장 재설정된 경계선, 재정의된 문제, 세속화된 종교

 

1880년 구스타브 플로벨이 죽었을 때, 지식의 퇴폐와 인간노력의 공허함을 그린 백과전서적 해학소설인 『부마르와 뻐퀴세』가 미완성인 채로 남겨졌다. 그래도 기본적 윤곽은 분명히 드러나 있었고 소설의 풍부한 세부묘사에 의해 명료히 표현되었다. 프로벨의 스케치 속에는 두 남자가 인류의 미래에 관해 토론을 벌리는 장면이 나온다. 뻐귀세는 비관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보지만 부마르는 낙관적으로 본다.

 

현대인은 진보의 과정에 있다. 유럽은 아시아에 의해 소생할 것이다. 역사의 법칙에 의하면 문명은 동양으로부터 서양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두 개의 인간사회는 궁극에는 융합하리라.

 

플로벨은 부마르의 낭만주의적 비전을 통해 세계를 재구축하고자 한 19세기적 기호를 표상하고 있다. 사이드는 플로벨의 이 작품 속에는 지극히 압축된 형태로 오리엔탈리즘의 근대적 틀을 보여준다고 했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이란 19세기 유럽사상이 품었던 세속적(그리고 사이비종교적인) 신앙 속의 한 가지 규율-훈련에 불과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길을 열어주는 요소를 다음 네 가지로 든다.

제1요소로 동양은 유럽의 끊임없는 탐험야욕에 의해 이슬람 지역을 넘어 훨씬 멀리까지 서양세계에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이 밖으로 관심을 보이는 만큼 식민지가 확보되었고, 자민족 중심의 원근법이 확보되었다.

제2요소로서 동양의 이질적이자 엑조틱한 것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과 지적 태도가 단지 탐험가들뿐만 아니라 비교연구에 관심을 갖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중국에서부터 페루까지 확대되어 갔다는 것이다.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길을 열어가는 제3의 요소는 18세기 후반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통속적 상상력 속의 ‘동양적’이라는 카멜레온적인 성질의 반영이다.

 

오리엔탈리즘의 근대적 구조에 이르는 길을 준비한 제4의 요소는 자연과 인간을 유형적으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생리학적-도덕적 분류로서 야만인, 아시아인, 유럽인의 구분, 그리고 아메리카 인종은 ‘적색, 담즙질, 경직’이고 아시아인종은 ‘황색, 흑담질, 강직’ 등 이고, 아프리카 인종은 ‘흑색, 점액질, 이완’이라는 식이다.

위의 네 가지 요소-확대, 역사적 대결, 공감, 분류-가 근대 오리엔탈리즘에 내재한 18세기적 사상의 여러 조류이다. 근대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동양을 구출하는 영웅으로 자인했다. 이를테면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1799년 이집트의 로제타에서 발견되어 상형문자 해독의 실마리를 제공한 돌비석)으로부터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재구성한 것과 같이, 그들의 연구는 동양의 상실된 언어와 관습 나아가 심성(mentalities)까지도 재구성한 것으로 인식했다.

 

사이드에 의하면, 근대적 오리엔탈리즘을 가장 중요한 측면에서 파악하려면 동양에서 과거로부터 상속되어오고, 재배치되고, 문헌학과 같은 학문분야에 의해 변형된 한 세트의 구조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게다. 동양은 새로운 텍스트나 관념의 형태로 이런 구조 속에 순응되어진 존재다. 19세기에 유럽이 동양을 식민지화하고 침략하면 할수록 오리엔탈리즘은 더욱 대중적인 신용과 기반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의 양식은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반복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은 지구상의 85%를 식민지로 차지했다. 이것은 근대 오리엔탈리즘이 어느 정도까지 ‘축적’의 규율-훈련을 조직적으로 구현해 왔는가를 입증해 준다. 이런 재구성의 축적은 후에 동양의 대지에서 군대, 행정부, 관료조직이 시행되는 경로를 만들어 주었다.

 

 

제2장 실베스트르 드 사시와 에르네스트 르낭 : 합리주의적 인류학과 문헌학의 실험실

 

실베스트르 드 사시는 교육적․합리적 유효성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는 1795년 ‘현대동양어학교’ 초대 아라비아어교사로 임명되었고, 1806년에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75세에 금석연구소 소장에 취임했고 왕립도서관의 동양관계 사본 관리책임자가 되었다. 사시가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초창기 인물 가운데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아시아협회(1822년 창설)초대회장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의 체계화된 텍스트가 총체적으로 구성되고, 그것의 교육적 실천뿐만 아니라 학문적 전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동양연구는 신비한 것이지만, 그것은 동양을 조직적인 방식으로 더 잘 알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중대성을 더해준다. 그에게 동양연구의 교육적 규율-훈련은 매력적이고도 효과적인 것이었다. 사시에게 동양연구는 본질적으로 편찬의 성격이면서 훈시적 교사의 작업이고 개정자의 작업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초창기 연구에서 ‘역사적 일람표’는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시에게 지식이란 어떤 소재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일람표의 목적이란 일종의 ‘벤담식 원형감시시설’(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의하면, 원형감시시설이란 “주위에는 원형의 건물, 중심에는 탑을 배치하고 탑에는 원주 건물의 내부에 면한 커다란 창을 몇 개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탑에서 안뜰 너머의 원주형 주위 건물들을 감시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건설하는 것이었다.

사시는 퍽이나 지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와 그 실천을 항상 보강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동양’이 왜 자력으로는 유럽인의 지성과 인내력에 견뎌 내지 못하는가를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그에게는 객관적 동양이 자신의 주관적 재구성으로 치환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작업은 동양을 규범화하는 것이고, 그것은 전승되는 텍스트의 규범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해서 사시는 확실히 오리엔탈리즘의 아버지 자리를 굳혔다.

사시의 프로세스가 계속되게 한 것에는 르낭의 공적이 컸다. 그는 동양을 더욱 근대적인 비교연구로 결부시킴으로써, 문헌학으로서 오리엔탈리즘 연구를 한층 증진시켰다. 르낭은 <과학의 미래>(1848년에 집필하고 1890년에 출판)에서 “근대적 정신을 창조한 것은 문헌학자이다.”고 했다. 그에게 문헌학이란 근대인만이 소유하는 비교연구의 학문분야이자 유럽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문헌학을 자연과학에 결부시켜 “문헌학이란 정신적 산물(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정밀과학(exact science)”이라 했다.

셈어(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언어)연구는 르낭이 처음으로 행한 본격적인 오리엔탈리즘이고 과학적 연구이다. 그에 의해 인도-유럽어가 생생한 유기적인 지표로 사용된 반면에, 동양의 셈어는 ‘비유기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사이드는 이렇게 비판한다.

 

그는(즉, 르낭) 셈어란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비해 인도-유럽어와 그 문화는 실험실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가 갖는 문서관적인 존재성(archival existence)의 오류이다. …(중략) 그에게 과학자는 ‘건설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제국적인 권력의 상징임과 동시에 지배적인 문화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르낭이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부르는 유럽의 문화도 사실은 실습실 속에서 문헌학자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나는 그의 활동이 지녔던 권위는 그 근원을 찾아가 보면, 비유기적인 것을 구축하고 그것에 생명의 외관을 부여하는 기술에서 유래한다고 본다(pp.263-264).

 

사이드는 르낭이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문헌학적 실험실의 과학인가? 아니면 인간적 종속관계를 만들어 내는 문화적 산물인가? 라고 되묻는다.

 

 

제3장 동양체류와 동양에 관한 학문 : 어휘서술과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것

 

르낭과 사시의 문헌을 보면, 문화의 개괄적인 진술이 곧 과학적 진술이라는 갑옷으로 몸을 단단히 싸고 외국문화를 교정하려는 분위기를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사이드에 의하면, 이런 유의 비교연구는 서술적이라기보다 언제나 평가적이고 해석적이라는 게다. 이런 비교연구는 학문상의 필요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민족 중심에 근거한 인종차별적 편견의 반영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게다. 해서 동양과 동양인에 대한 비교연구들은 결과적으로 서양과 동양 사이의 존재론적 불평등을 말하기 위함 이라는 게다.

하여 오리엔탈리스라고 하는 현실의 직업은 이 불평등성과 그에 따른 독특한 역설을 합리적으로 나아가 성스러운 것으로 간직하고자 했다는 게다. 그들에게 학문으로서 동양세계는 역사가 아닌 역사(nonhistory)를 질서 있는 연대기나 초상화 혹은 플롯과 함께 포착하는 것이었다. 이런 불평등한 연결관계에서 사이드는 칼 마르크스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인도지배를 분석한 여러 논문 속에서 아시아적인 경제시스템이라는 개념을 확인했고, 그와 동시에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간섭, 약탈, 노골적인 잔혹성이 이 시스템 속의 인간에게 가한 참혹성에 대해 언급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서술을 거듭하면서 영국은 아시아를 파괴한다고 하는 바로 그것에 의해, 아시아에서 참된 사회혁명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견해를 되풀이 했다. 마르크스의 문체를 보면, 우리들은 동양사회가 격심한 변화과정에서 동양인 스스로가 당하는 여러 고난에 대하여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끼는 고통과 이 변화가 역사적 필연이라고 하는 인식을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하는 곤혹스런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p.277).

 

19세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인간을 집합적인 견지에서 파악하고 추상적인 일반개념의 틀 속에서 인식했다는 사실. 그들은 개인으로서 인간을 보고 논의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사이드는 그들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동양인, 아시아인, 셈족, 이슬람교도, 아랍, 유태인, 인종, 멘털리티, 민족 이라고 하는 것은 가축의 무리를 나누는 것과 같이 작용하여, 그 과정에서 인간을 한두 가지의 궁극적이고 집합적인 추상개념으로 환원시킨다고 비판했다. 이런 식으로 19세기에 근대적 전문용어와 직업적 학문이 관습화됨에 따라 오리엔탈리스트의 동양담론을 지배하게 된 게다. 다시 사이드는 말한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동양에 거주한다는 것은 보통의 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유럽인의 대표로서 특권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그 유럽제국은 동양을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적인 양팔로 ‘껴안고’있었다. 그리하여 동양에 산다는 것과 그 학문적인 성과는 르낭이나 사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텍스추얼한 자세를 지닌 서재파적 전통 속에 주입되었다. 이런 경험들은 하나의 엄청난 도서관을 구축했고, 그 도서관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조차도 비켜 지나갈 수가 없었다(pp.282-283).

 

사이드에 의하면, 동양은 유럽인이라는 관찰자를 통해 순례지로서의 동양, 구경거리로서, 또 ‘살아 있는 그림’(초상화)으로서 동양이다. 곧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구성되고 해석된 것은 사실상 서양에 의한 동양의 재해석이고 재구축이었다는 게다.

지금까지 동양은 개인적 조사체험의 연쇄였으나, 이제는 벽이 없는 일종의‘상상의 박물관’(A. Malraux; 1901-1976는 전세계의 여러 문명권에 속하는 고금의 예술작품을 그 역사적 및 사회적인 컨텍스트로부터 분리시켜, 때로는 사진과 복제도 이용하여 한 곳에 모은 사상의 미술관을 고안했다. 여기서 사이드도 그것을 의식해 미술관 대신에 박물관이라 표현했다.)으로 변모하게 된다. …(중략) 그곳에서 동양은 탐험가와 조사대, 파견단, 군대, 상인 등이 가져다 나른 조각들의 집합으로부터 재전환되고 재구성되며, 문헌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백화점식으로 ‘텍스트화’된 오리엔탈리즘적 의미내용을 갖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제4장 순례자와 순례, 영국인과 프랑스인

 

동양을 순례하고 거주해 본 유럽인은 모두 동양의 불온한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기류의 동양을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교정하고자 했다. 19세기에 동양은 순례의 땅이었고,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저작은 동양순례행이 낳은 ‘재생적 재구성’(restorative reconstruction)이 그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순례자는 누구나 사물을 자기류로 본다.

19세기에 동양은 유럽 여행가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사이드에 의하면, 영국인에게 동양이란 현실적으로 영국의 영토였던 인도를 가리켰다. 그들이 근동을 통과한다는 것은 식민지인 인도에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1880년대까지는 영국인에게 지중해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영국의 손바닥에 들어온 하나의 완벽한 제국영토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인 순례자는 동양에서 심각한 상실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들에게 지중해는 십자군으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오직 프랑스의 패배만을 되울리고 있었다. 프랑스인이든 영국인이든 동시대인으로서 동양인이 갖는 인간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힘을 기대한다는 것은 헛일일 뿐이다.

 

지식 특히 오리엔탈리즘의 전문화된 지식은 완만한 과정을 통해 양적으로 누적될 뿐만 아니라, 연구적인 함의라는 내부측면에서 지식의 선택적 누적, 배척, 말소, 재배치가 행해지는 과정이다.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은 계몽시대의 유산이라기보다는 선행하는 권위의 ‘보강적인 차용’으로부터 생겼다.

요컨대 지식의 한 형태로서 오리엔탈리즘은 그 분야의 선택된 학자들로부터의 인용을 그 주된 자양분으로 받아들였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새로운 소재를 발견했을 때조차도 선배들로부터 그들의 관점, 이데올로기, 준거해야 할 명제를 차용함으로써 그것을 판단하고자 했다. 동양에 관한 지식체계에서

동양이란 단순한 장소라기보다는 하나의 토포스(topos; 수사학적인 진부한 표현)에 불과했다.

 

19세기에 오리엔탈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동양연구 분야에서 대학교육을 받았다는 것이고, 동양 순례를 위한 보조금이 아시아협회 등을 통해 주어지고, 나아가 권위 있는 학술단체의 지원에 의해 저술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동양을 지배하고자 하는 유럽의 야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에 의한 동양 지배와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동양은 하나의 장소라는 것으로부터 현실의 학술적 지배의 영역, 잠재적인 제국지배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중략) 나아가 후에 그 무대는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일은 개인보다도 정부를 개입 시키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이 남긴 유산이고, 20세기는 그 상속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20세기의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하여 자유와 지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조사하여야 한다(p.355).

 

 

 

제3부 오늘의 오리엔탈리즘

 

손발이 마비된 커다란 아이와 같이, 우상을 팔에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스타브 플로벨>

 

이 지상의 정복이란 무엇인가? 대부분 그것은 단순히 피부색이 다른 인간, 다소 낮은 코를 지닐 뿐인 인간으로부터 무리하게 승리를 뺏는 것이다. …(중략) 정복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관념, 자신을 죽여서 그 관념을 믿게 되는 우리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생을 바치는 그런 관념이다. <조셉 콘라드>

 

제1장 잠재적 오리엔탈리즘과 명시적 오리엔탈리즘

 

제2부에서 사이드는 관념, 개념 혹은 이미지로서 ‘동양’이라는 말이 서양에서 광범위한 문화적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을 인정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을 일관된 주제로 삼는 ‘경제학’을 서술하고자 했다. 오리엔탈리즘은 누적적이고 집합적인 성질을 지니고 전통적 학문, 공적인 제도, 여러 종류의 작품들과 결부되어 그 효력을 발휘해 왔다.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에 대한 일련의 관점,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서 규칙화된 비전과 연구의 양식이다. 즉 동양은 어떤 독특한 방법에 의해 가르쳐지고 연구․관리되고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동양은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서양 제국지배 영역 속에 동양을 집어넣는 일련의 총체적 힘의 조합에 의해 구성된 표상세계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런 정의가 정치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고 보인다면, 그 이유는 오리엔탈리즘 그 자체가 정치적인 힘과 행위에 의해 산출된 것 때문이라고 사이드는 본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세계의 차이에 대한 감각을 더욱 경직화 시키고 문화일반의 압력을 증대시켜, 그런 문화적 압력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을 더욱 강화해 왔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억누르는 정치적 교의이고, 동양의 이질성(본래성)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게 사이드의 논지다. 유독 서양 쪽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분야’가 하나의 담론으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동양과 서양의 상대적인 힘의 차이를 시사해 준다.

서양의 군대, 무역상, 고고학적 탐험대가 언제나 동양을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을 접어두고라도, 1800년부터 1950년까지 아시아를 비롯해 근동을 다룬 책은 거의 6만권 이상에 이르렀다. 사이드는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의식적인 확신과 ‘명백한’ 오리엔탈리즘 이랄 수 있는 동양의 언어, 문학, 역사, 사회학 등에서 표명된 여러 견해를 구별하고자 했다.

사이드는 동양의 후진성, 퇴행성, 서양과의 불평등이라는 명제는 19세기 초 인종차별이론의 생물학적 근거에 입각한 관점과 가장 쉽게 연결된 것으로 본다. 서양세계에서 동양인은 생물학적 결정론과 유전적-정치적 교훈으로 구성되는 틀 속에서 관찰되었다. 동양인은 ‘종속 인종’의 일원이기에 반드시 종속되어야 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주요 연구자인 쟉크 워던부르크(J. Waardenburg; 1930년생 네덜란드 동양학자)의 <서양의 거울 속에 비친 이슬람>에는 이슬람 이미지를 만들어 낸 다섯 명의 중요한 학자들을 지적했다. 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엽까지의 오리엔탈리즘을 거울의 이미지로 나타냈다. 워던부루크는 이런 몇 명의 학자들이 어떻게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지적 방법론적인 전통을 공유했는가를 밝혀 준다. 1873년 제1회 오리엔탈리스트회의 이래로 이 분야 학자들은 서로의 저작을 공유하고 긴밀히 유대했다.

19세기 말까지 유럽은 무서운 문화적, 정치적 야욕으로 장기간에 걸쳐 아프리카를 포함한 동양의 식민지화 과정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의 동양에 대한 인식은 텍스추얼하고 관조적인 것으로부터 행정적․경제적․군사적인 것으로 변모해 갔다. 즉, 동양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와 공간의 개념이 질적으로 변화했다. 서양인이 그간 지배권을 가지고 동양을 대면한 누적적인 효과로서 동양은 이질적인 공간으로부터 식민지통치 공간으로 변화했다. 19세기 후반에서 서양이 동양을 침투해서 영유 했는가 혹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가 그 기정사실을 ‘어떻게’ 느꼈는가라는 점이다.

 

동양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공리주의적인 관리는 자유주의 혹은 복음주의 유산과 결부되어, 영국의 동양지배 철학으로서 합리성의 측면에서 각종 법률로 무장된 강력한 행정부와 지대문제를 확립하고 필요한 감독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동양에서 영국은 주인의 지위를 차지했고, 그곳에서 지리와 지식 그리고 힘의 삼위일체가 유지되어 왔다.

 

이처럼 과학적 지리학은 곧 ‘영리적인 지리학’에 그 길을 열어주었고, 그것은 식민지 획득의 기둥이 되었다. 르로이-보리유(L.-Beaulieu; 1842-1912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는 식민지 정책을 다음처럼 합리화했다.

 

사회는 고도의 성숙에 달하고 강력하게 되면 식민지를 개척하기 마련이다. 사회는 새로운 사회를 낳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낳은 새로운 사회를 양호한 성년에 이르게 한다. 식민지 건설이란 사회의 복잡하고 미묘한 생리현상의 하나다.

 

유럽의 식민지 건설과 자기증식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원기 왕성한 활동력을 밖으로 향하여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확대해 간다.”는 것이다. 해서 식민지 확장은 한 민족의 힘이 확장되는 과정이고, 곧 그것은 자기를 재생산하는 힘이 된다는 게다.

지리적 공간을 분할 점유하는 데에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갈등적이었음에도 동양을 하나의 지리학적, 문화적, 정치적 통치 대상으로 삼아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게 곧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여겼다. 20세기 초에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서양에 전수하는 방법은 주로 학문적 전파능력과 수렴적 해석 작용에 의거했다. 그럼에도 오리엔탈리스트는 언제나 동양의 외부에 서 있었고 자신은 서양세계 속에 계속 머물게 했다.

사이드는 동양에서 서양 여러 나라들의 영토획득이 진행됨에 따라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의 교의와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체험이 가장 극적으로 하나로 수렴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아시아에서 터키영토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해체되는 듯이 보이는 순간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이 유럽의 환자는 수술대 위에 오랫동안 뉘어졌고 그 약점을 폭로 당했다는 게다.

 

 

제2장 양식, 전문지식, 비전 : 오리엔탈리즘의 세속성

 

영국의 키플링이 식민지에서 ‘백인’이 걷는 ‘길’을 축복한 시는 당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위력)을 잘 시사해 준다.

 

지금, 이것이 백인이 걷는 길이다.

대지를 깨끗이 하기 위해 가는 때,

철로를 따라, 포도넝쿨 아래로

우리는 그 길을 왔다.

선택한 별을 길잡이로 삼아,

오! 백인이 손을 흔들며 그 큰 길을

걷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다.

 

키플링에게 ‘백인’이라는 것은 자기를 확인 시키는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은 백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곧 백인이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인의 시대’에 그 잔을 마시기 위해서는 역사적 숙명에 따라 개척 길에 나서야 한다는 게다. 그에게 ‘백인’은 하나의 관념이자 현실이었다. 요컨대 ‘백인’이라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세계 속의 한 존재형식이고, 현실과 사고를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도구)이었다. 그것은 독특한 ‘양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은 문화적으로도 광범한 일반화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현실은 언어, 종족, 유형, 피부색, 심성 등의 집합명사로 분류되었다. 각각의 범주는 중성적 호칭이라기보다도 평가적인 해석이다. 이런 범주의 근저에는 ‘우리들’과 ‘그들’이라고 하는 이원론의 대립이 존재하고, 우리들은 언제나 그들을 침식한다. 이 대립은 인류학적, 생물학적, 고도의 인문주의 수사에서도 강화되어 왔다.

 

백인의 창조와 오리엔탈리즘은 쌍방의 고유한 양식을 필요로 했다. 곧 백인이기에 유색인종을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으며, 오리엔탈리스트는 동양인을 백색인종의 관찰대상으로 고정시키고자 했다. ‘백인’은 오리엔탈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유색인종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경계선에서 생활했으므로, 자신이 보는 영역을 정의하고 재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어떤 동양인을 만나도 그 개개인이 ‘동양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양이란 시간과 경험을 초월한 시금석과 같았고, 그것은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하나의 관념이 되었다. 그들에게 동양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냥 동양인이고, 오직 제2차적으로만 인간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환원시스템은 행정관청에서 관료기구와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분류항목이 개개인의 파일 이상으로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사무관으로서 매우 다양한 파일을 함께 모아서 이를테면 그것을 ‘셈족’이라고 쓴 커다란 캐비닛 속에 집어넣는 모습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이런 고압적인 틀로부터 20세기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출현했다.

근대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학문적인 양식, 광범위한 일반화의 레퍼토리, 편향된 과학, 환원적인 정식(formula) 이런 것들이 그들 동양전문가에 의해 세련되었고 거기에 개인적인 취향이 부가되었다. 이제 오리엔탈리스트는 동양 역사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 되었고, 창조자로서 서양에 대한 특징적인 ‘기호’가 되었다. 마침내 동양의 비전은 궁극적으로는 그 소유자인 오리엔탈리스트의 지식과 언설에 의거하여 그 일관성과 힘을 부여받게 된다.

 

사이드에 의하면, 19세기말의 오리엔탈리즘을 채운 과학적인 범주가 고정적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전’이라는 것도 고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이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리는 일관되고 명료한 지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적인 ‘공시적 본질주의’(symchronic essentialism) 시스템은 모든 동양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 것이다. 해서 사이드는 이 시스템을 오리엔탈리즘의 ‘비전’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스트를 하나의 학자가 아니라 제국의 대리인 혹은 정책결정자로 주목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이 아카데믹한 자세로부터 ‘도구적’인 자세로 내부적으로 커다란 전환이 생겼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제 오리엔탈리스트는 자신이 속하는 서양문화의 대표자가 된 게다. 오리엔탈리스트의 저작 속에는 전문가로서의 자기와 서양세계의 대표로서 증언하는 자기와 동양을 바라보는 자기 사이의 교류가 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동양은 서양일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서양의 정신과 지식 및 그 절대권에 대해서 도전하는 듯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1928년에서 1935년까지 아시아협회의 회장을 지낸, 콜레쥬 드 프랑스의 산스크리트 교수이기도 했던 실뱅 레비(S. Levi)는 1925년에 동서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발언을 했다.

 

우리들의 의무는 동양문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적 차원에서 과거와 현재의 상이한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감에 가득 찬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는 “아시아는 고뇌하고, 그 고뇌로써 유럽을 위협한다.”고 했다. 현대의 오리엔탈리스트 가운데 레비가 위엄 있는 인물로 비친 것은 바로 이런 태도에 있다.

 

 

제3장 현대 영국-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 그 극성기

 

동양을 연구하는 현대의 전문가를 ‘지역학’(area studies) 연구가라고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오리엔탈라스트는 총괄적이면서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종합적 연구가’(generalist)로 인정되어 왔다. 오리엔탈리스트는 동양에 관한 단편적 개별연구를 하더라도 그 소재가 갖는 심원한 동양성을 총괄적으로 확증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동양은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결합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기에 오리엔탈리스트가 취급하는 동양적인 성격, 심정, 에토스, 세계정신 등이 훌륭한 이해에 기반하는 해석학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이전의 오리엔탈리스트와는 달리 기브(H. A. R. Gibb;1895-1971)는 『이슬람의 유산』(The Legacy of Islam, 1931)에서 이렇게 말한다.

 

19세기와는 달리 이제 동양의 문학은 그 자신을 위해 다시 연구가 개시되고, 동양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형성되고 있다. 이런 지식이 확산되어 동양이 인간사회 속에서 바른 위치를 회복해 감에 따라 동양문학도 다시 그 역사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학, 사상, 역사에서 모든 의미 있는 것을 우리들이 속하는 서반구에만 제한하고자 하는 협소하고 억압적인 관념으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해방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pp.448-449).

 

 

기브가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동양과 서양 사이의 ‘인문학적 상호교류’의 필요성을 주장한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정치적, 문화적 현실에서 생긴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오리엔탈리스트는 자국의 문화나 문학과는 다른 이민족의 문화와 문학 속에 담긴 인문주의적 전통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오리엔탈리스트가 만년의 성찰 끝에 이런 말을 한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화적 고향을 떠나면 떠날수록 참된 비전에 필요한 정신적 초연성과 관용성을 동시에 얻고, 그 고향과 전 세계를 더욱 쉽게 판단할 수 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자기 자신과 상이한 문화에 대해서도 친근감과 거리감의 조합을 통해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p.453).

 

마침내 오리엔탈리스트도 분석 장치로서 문헌학적 비교연구를 넘어, 눈에 익은 사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게다. 사이드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유태교, 불교를 연구한 결과는 본래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개척되고 주장된 영역의 한가운데로 흡수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오리엔탈리스트의 경제학적인 관념에 따르면 동양인에게는 본질적으로 무역, 통상, 경제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오리엔탈리스트에게 이슬람은 타락한(유해하고 위험한) 동양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이래 오리엔탈리즘에 일관되게 반영되어 세대거쳐 전달되어 왔다는 게 사이드의 기본 입장이다. 기독교 및 유태교와 특수한 관계에 있는 이슬람은 그 ‘기원으로부터’ 문화적으로 뻔뻔스럽다는 관념이 오리엔탈리즘에 계속 반영되어 왔다는 게다. 이슬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은 다른 인문과학에 비해 퇴행적이고, 그 방법론과 이데올로기도 총체적으로 후진적이라고 비판한다.

 

해서 이슬람 부문의 오리엔탈리즘은 그 형태와 양식에서 인류의 제반문제를 ‘동양’과 ‘서양’이라는 범주로 나누어 다루고자 했다. 그들은 동양인의 경우 해방이라든가 자기표현 내지는 자기 확장은 문제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브는 세속적 민족주의의 결과로서 동양과 서양이 결국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꼈고, 도리어 동서를 가로지르는 장벽의 붕괴에 대해 이해를 보이게 되었다.

기브는 본래 이집트에서 태어났고 루이 마시뇽(L. Massignon; 1883-1962, 이슬람의 가톨릭학자이자 가톨릭-무슬림의 상호이해를 강조한 선구자로 지칭됨)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종교적 경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극히 세속적이기도 했다. 오리엔탈리스트로서 그들의 두드러진 업적은 전통적인 학문을 정치세계에 응용한 것이다. 기브는 1963년에 마시뇽에 대한 추도사 속에서 “시공을 일관하는 인간정신”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현대 이슬람의 연구에서 마시뇽의 존재는 오리엔탈리스트에게 위협적이 되기도 했다. (마시뇽은 예언자 아브라함을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세 일신교의 ‘공통된 아버지’로 이해했다. 이 세 종교는 아브라함이 각각 모세, 예수, 마호메트에 내린 계시에 의해 생긴 것이고, 이슬람이란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하는 공통의 그릇에 근거한 종교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p.462)

 

사이드는 유럽문화 속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제시하는 여러 표상은 최종적으로 하나의 언설적 일관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일관성은 문화적인 프락시스의 한 형태이고 동양에 관한 진술을 행하는 기회의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스템에 관해 내가 역설하고자 하는 점은, 그것이 어떤 동양적인 본질을 잘못 표상한 것이 아니라, 통상 표상이라는 그렇듯이 그것이 특정의 역사적, 지적, 경제적인 배경 속에서 일련의 경향성에 따라 특정 목적을 위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상은 형성된 것(formation)이자 변형된 것(deformation)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표상으로서 동양은, ‘동양’이라고 불리는 지리적 영역을 향하여 더욱 특수화되어가고, 하나의 감성으로부터 형성된

것이자 변형된 것이다(pp.477-478).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스트가 자신의 사회에 제공하는 동양에 대한 표상은 (1) 그 오리엔탈리스트의 특징을 각인 시키고, (2)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할 동양에 관한 그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3) 타인의 동양관에 의식적으로 대항하고, (4) 오리엔탈리즘의 언설이 그 시점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영하고, (5) 그 시대의 일정한 문화적, 국가적, 정치적, 경제적 요구에 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실증적 지식도 역할을 하겠지만,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표상이 갖는 위의 다섯 가지 속성에 의해 ‘분배’되고 재분배될 뿐이라는 게다.

이장의 말미에서 사이드는 현대 오리엔탈리스트로 기브와 마시뇽은 서양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를 총괄하는 저작들을 산출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은 광의로 보면 앵글로색슨적인 것이고, 좁게 보면 미국중심의 사회과학적인 접근이라는 게다.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낡은 오리엔탈리즘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지만, 역시 그 각각의 부분들은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의 도그마에 계속 봉사했다는 게다.

 

 

제4장 최근의 전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래, 아랍 무슬림은 미국 대중문화의 문제꺼리가 되었고, 정계와 재계에서도 아랍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국제적인 힘의 배치에서 전환을 상징한다. 이제 세계정책의 중심무대가 프랑스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거대한 권력이 그 대신에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과거의 문헌학적이면서 유럽에 기반을 둔 학문분야도 사회과학의 분화와 더불어 축의 이동을 가져왔다. 잡다한 동양의 표상이 일본, 인도차이나,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의 얼굴과 더불어 등장하게 되었고, 그 중에 아랍과 이슬람은 여전히 고유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

 

1. 대중의 이미지와 사회과학적인 여러 표상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래로 아랍은 더욱 위협적인 존재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석유펌프의 배후에 아랍의 장로가 서 있는 만화가 반복되어 나타났다. 여기서 아랍은 분명히 ‘셈족’을 뜻했다. 그들의 날카롭게 갈고리진 코, 사악하게 코밑수염이 난 얼굴에 심술궂은 눈초리는 분명히 셈족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대중의 ‘반셈적’인 적대감정이 유태인으로부터 아랍인에게로 이행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아랍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부정적 가치 때문이다.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에 북귀시키고자 하는 유대민족주의자들인 시오니스트들이 보기에 팔레스타인은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텅 빈 사막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문화적으로나 민족적인 실체도 갖지 못하는 하찮은 유목민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아랍은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하나의 숙명에 연결되어 반응을 일으키도록 정해지고 명령되었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아랍인이 호색한이거나 피에 굶주린 악한을 연상시킨다. 노예상인, 낙타를 타는 사람, 환전상, 화려한 불한당 등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게 전통적인 아랍인의 역할이다. 이슬람이나 아랍에 관한 책이나 논문조차도 종래의 반이슬람적인 태도로부터 조금도 변한 게 없다. 사이드는 ‘미국 교과서에 나타난 아랍’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참으로 놀랄 정도의 잘못된 정보와 냉담한 표상으로 서술되어 있다고 했다.

 

이제 오리엔탈리즘은 더 이상 문헌학적인 학문분야가 아니고, 동양에 관한 일반적 지식도 아니며, 단지 사회과학 전문분야의 하나로 전락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이 미친 공헌이며, 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비워진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 시절부터이다. 미국에게 동양은 그냥 정치적 행정의 문제로 변화했다. 여기에 사회과학자와 새로운 전문가가 등장하고, 그들의 좁은 어깨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외투가 얹혔다. 새로운 오리엔탈리스트가 동양에 대해 문화적 적대감을 보이고 그것을 유지시킨 점에서는 하등의 변함이 없었다.

사이드는 동양에 대한 미국의 사회과학적인 관심은 기묘할 정도로 문학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현대 미국이 아랍이나 이슬람적인 동양을 인식하는 것에서 지역과 그 주민은 개념적으로 거세되고, 그냥 몇 가지 태도, 경향, 그리고 통계적 수치로 환원되었다. 요컨대 인간성이 박탈되었다. 그는 미국 오리엔탈리즘의 계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창설된 군대의 외국어학교, 그리고 동양인에 대한 선교사적인 태도의 잔재로 보았다.

 

2. 문화관계 정책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근동을 비롯해 아시아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조차 자신들의 역할은 신의 명령이라기보다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이해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중심적인 도그마가 오늘날까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랍과 이슬람연구라고 했다. 그 도그마를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첫째로 합리적으로 발전해 온 서양과 열등한 동양의 사이에 절대적이고 체계적인 상위(相位)가 있다는 도그마이다.

둘째로 ‘고전적’ 동양문명을 표상하는 문헌에 근거한 추상개념이 현대 동양의 여러 현실로부터 직접 나오는 증거보다도 언제나 더욱 바람직한 것이라는 도그마이다.

셋째로 동양은 획일적이고 자기를 정의할 수 없기에 서양의 관점에서 본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서술이 불가피하고, 그것을 통해 학문적으로도 객관적이라는 주장이 생겨나게 된다.

넷째로 동양은 통제되지 않으면 위험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이다(p.522).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 작품으로 지적 위신을 자랑하는 두 권으로 된 케임브리지 판 <이슬람의 역사>(1970)는 오리엔탈리즘 정통파가 공인하는 학문적인 집대성이다. 사이드는 이 케임브리판 <이슬람 역사>는 종교로서 이슬람을 근본적으로 오해하여 잘못 표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인식의 기본적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전반적으로 제3세계가 갖는 일반적 중요성(정체성)이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게다.

 

3. 단순한 이슬람

 

근대 오리엔탈리즘에 나타나는 셈적인 단순성을 반영한 이론의 뿌리는 매우 깊다. 사이드는 서양인의 믿음과 그 분석방법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본래 그 자체로는 발전의 여지가 없으나, 교의적인 차원에서 발전의 안티테제일 뿐이라는 게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셈족의 발전이 정지되어 있다는 신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셈족의 신화는 두 가지로 나뉘어 졌는데 하나의 셈족은 오리엔탈리즘의 길을 걸었고, 또 하나의 셈족은 아랍인으로서 동양의 길을 걸었다는 게다. 오리엔탈리스트에게 아랍세계를 쓴다는 것은 절대적 권력에 뒷받침된 절대적 진리를 아무런 의심 없이 확신을 가지고 쓴다는 것이다.

1974년 칼 알로이(G. C. Alroy; 1924년생 미국의 정치학자) 교수는 <아랍은 평화를 바라고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이런 논지의 글을 썼다. 첫째로 아랍은 피의 복수를 즐기는 성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고, 둘째로 심리학적으로 보아 평화를 실현할 수 없고, 셋째 실제로는 정의와 상반되는 정의 관념과 선천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게다. 사이드는 그가 아랍을 ‘알고 있다’고 자칭하지만, 분명히 이미지 조작의 전문가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오리엔탈리스트는 ‘쓰는’ 인간이고, 동양인이란 ‘쓰이는’(묘사대상) 인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스트가 동양에 암묵적으로 부과한 강력한 구별이다. 동양인에게 할당된 역할은 소극적 침묵이고, 오리엔탈리스트에게 할당된 역할은 관찰하고 연구하는(쓰는) 능력이다. …(중략) 동양인이란 고정된 정체적 존재, 조사를 필요로 하고 자기에 관한 지식조차도 (타인에 의해) 부여받는 인간으로 제시된다. 어떤 변증법도 요구되지 않고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단지 정보의 근거(출처)로서 동양인과 지식의 근거로서 오리엔탈리스트가 있을 뿐이다. 양자의 관계는 힘의 문제이고, 그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다(p.536).

 

게다가 중동과 서양의 관계는 유별나게도 성적인 종속관계로 정의되기도 한다. 중동은 처녀처럼 저항하지만 남성인 학자(오리엔탈리스트)는 그것이 ‘부담이 큰 과제’임을 알면서도 억지로 그 획득물을 확보하고자 한다는 게다. 아랍인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성은 아예 무시되고, 단 하나 아랍인들은 어떤 인간과도 다르다는 것이 강조될 뿐이다. 오리엔탈리스트의 언설은 언제나 진보된 사회가 낙후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이고,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다.

 

4. 동양인 동양인 동양인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의 허구를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은 오늘날 지구상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깊숙이 중동에 관여하고 있으며, 정책입안자들에게 조언을 주는 중동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오리엔탈리즘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게다. 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의 동양은 오리엔탈리스트가 묘사하는 동양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오리엔탈리스트는 서양인이므로 동양이 본래 무엇인가에 관해 그들이 내면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방법론적인 결함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의 또는 참된 동양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가 아니고, 또 ‘내부인’의 시야가 ‘외부인’의 시야에 대해 갖는 필연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도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은 ‘동양’ 그 자체가 구성된 실체라고 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어떤 지리적 공간에 고유한 종교, 문화, 민족적 속성에 근거하여 정의하고자 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흑인만이 흑인에 관하여, 또 무슬림만이 무슬림에 관하여 쓸 수 있다고 하는 식의 한정적 명제를 믿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pp.558-559).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오늘에도 그 힘을 과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동양’ 그 자체에까지 깊숙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확실히 우리들을 아연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게다.(박홍규는 책에 보주를 달아 “예컨대 일본의 학문 대부분이 그러하다고 단언해도 좋고, 한국의 경우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해서 동양의 전통에 대한 ‘관심’ 위에 (아랍의) 재화와 자원이 부가된 결과 지금의 오리엔탈리즘은 새로운 제국주의에 멋지게 적응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 패러다임은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적 기도에 항의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강화하는 역할조차 수행하고 있다는 게다. 다시 사이드 말에 기대어 보자.

 

내가 다소라도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는 일부의 동양에서는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한 지식계급이 오리엔탈리즘의 특별한(새로운) 승리로 간주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오늘날 아랍세계는 미국의 지적, 정치적, 문화적 위성국가가 되고 있다. …(중략) 아랍세계의 대학은 과거 식민지 권력으로부터 계승된 것이고, 또한 그 권력의 계승된 패튼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커리큘럼의 현실은 거의 그로테스크 한 정도로 만들어졌다. …(중략) 과거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 탁월성과 재력에 의해 동양의 지적인 지평선을 지배했다면, 지금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그 결과 소수의 가능성 있는 학생들은 더욱 고도의 연구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가도록 장려된다.

…(중략) 동양인 학생들(그리고 일부 동양인 교수들)은 지금 미국의 오리엔탈리스트에게 와서 그 밑에서 배우기를 희망하며, 그 뒤에는 내가 오리엔탈리즘의 도그마라고 특징지운 상투문자를 자국의 청중들을 향해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재생산 시스템에 의하여 동양인 학자는 오리엔탈리즘의 체계를 ‘조직’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이 자국민에게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인 또는 미국인 오리엔탈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단순히 ‘원주민 정보원’(native information)에 불과하다. 어쩌다 그들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뒤에 운 좋게도 서양에 머물 수 있게 된 경우에도, 그곳에서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pp.560-562).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승리에 기여하고 있는 제2의 요소로 동양에 대한 소비이데올로기의 침투를 문제 삼는다. 아랍과 이슬람 세계는 그들 지역의 최대 자원인 석유가 미국경제에 완전히 흡수됨으로써, 그 결과 석유로 부자가 된 아랍인은 즉시 미국 수출품의 거대한 소비자로 변용되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이 관계가 일방적인 것이어서, 아랍은 물질이든 이데올로기든 가리지 않고 미국제품 혹은 지식의 지극히 다양화된 소비자가 되고 있다는 게다. 특히 사회과학분야에서는 동양의 지식인계층 자체가 서양의 주된 지적 조류에 종속되어 가는 게 문제라는 게다.

사이드는 결론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대신하는 다른 선택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책은 단지 무엇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무엇을 주장하는 건설적인(대안적인) 논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자신의 프로젝트는 하나의 특수한 관념체계를 서술하는 것으로서, 그 체계를 새로운 체계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이 주력한 시도는 인간경험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대한 일련의 문제 제기를 하는 데 있었다는 게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우리는 상이한 문화를 어떻게 ‘표상’할 수 있는가? ‘상이한’ 문화란 무엇인가? 하나의 특정 문화라고 하는 개념은 유익한 것인가 아닌가, 또는 그것은 언제나 자기찬양이거나, (다른 문화를 논하는 경우에) 적대감과 공격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가?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차이는 사회-경제적 또는 정치-역사적 범주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관념이 어떻게 하면 권위 또는 정당성의 지위를 확보하는가? 지식인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이란 그가 속해 있는 문화와 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지식인은 독립적인 비판의식, 곧 갈등하는 대립적 비판의식에 얼마만큼의 중용성(개방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여전히 설득적인 사고유형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어, 상당히 우울한 문제라고 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슴 속에는 어떤 이성적 기대가 있다는 게다. 곧 오리엔탈리즘이 언제까지나 과거와 같이 지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그대로 통용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지 주의력이 없는 학자가 오리엔탈리즘의 길드적인 전통에 사로잡히는 경우다. 전문적 직업일수록 ‘상투형의 관념’이 쉽게 전달되어 가기 때문에 학자 개인의 의식이 그것에 대한 경계심을 품을 수 없는 경우가 더욱 문제라는 게다.

사이드는 동양 속에서 동양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자기를 열어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신의 방법을 재귀적으로 비판적인 검토에 붙이는 것(이 대목에서 노자의 ‘反者 道之行’을 떠올리게 됨)이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눈앞에 있는 소재에 대한 직접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의 방법론과 실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점검, 곧 스스로의 연구를 교조적인 선입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재(문제) 그 자체에 대하여 계속 감응하고자 하는 부단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게다.

해서 사이드는 우리가 단지 동양을 무한히 동양화한다는 목표만은 회피되어야 한다는 게다. 아마도 지식인은 인종적․민족적․국가적인 구별(기준) 이상으로 인간사회를 진보시킨다고 하는 공통의 기도를 보다 중시하게 될 것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결함이 지적인 것임과 동시에 인간적인 한계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은 자신과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지구 위의 한 지역에 대하여 확고한 적대자의 입장을 취해 왔기 때문에, (고유하고 독특한) 인간경험과 일체화될 수 없고, 인간경험을 인간경험으로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이드는 이 책이 오리엔탈리즘 세계의 거대한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하나의 신중한 기여이자 경고로서, 곧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사고체계, 권력의 언설, 이데올로기적인 허구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들어지고, 응용 혹은 보호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읽혀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특히 그가 독자들에게 바라기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해답이 곧 옥시덴탈리즘이 아니라는 게다. 그는 이렇게 책을 마무리한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에 쉽게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동양인’-곧 ‘서양인’이 된-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외적인)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 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지식의 유혹)을 성찰하기에 적합할 것이다(p.570).

 

 

진태원은 <오리엔탈리즘과 다른 동양은 존재하는가>(한겨레, 2014.12.11)에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속에는 학문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동양과 서양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분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조화하기위한 동업조합적인 제도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서로 얽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제기된 이래로 오늘날에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여전히 그 담론이 재생산되고 있다면, 그것은 서양의 정체성 자체가 오리엔탈리즘 없이는 구성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과 그것에 기반을 둔 서양 대(對) 동양이라는 이원론적인 상상의 지리학은 근대 서양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 형성의 이면이었다는 게다.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인에게는 서양의 옷이자 의식이었다면, 서양인에게는 자기 정체성 형성의 이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오리엔탈리즘과 다른 진정한(주체적) 동양을 사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당연한 질문이지만 쉽지 않다. 사이드조차도 이 질문에 조심스럽게 비켜가는 듯 여운을 남기고 있다. 진태원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된 지 10여년 뒤에 인도 출신의 여성이론가가 “서발턴(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첨예하게 제기하게 된다고 했다.

사회하층계급을 일컫는 ‘서발턴역사학’은 역사에 결코 등장하지 않는 수많은 민초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케 하자는 진보적(급진적) 역사학이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말없이 우리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다시금 되묻지 않을 수 없다.

 

 

 

 

 

     +<1995년판 후기>

 

1980년 프랑스판이 나온 이래로, 『오리엔탈리즘』은 약 30 종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스웨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이드 자신은 물론 출판사도 어리둥절해 했다. 사이드는 아직도(1994년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반응 가운데 하나는 이 책을 반서구주의로 보는 것이랬다. 그는 기본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엄격한 구분은 그 실체가 없다고 본다. 게다가 지금은 하나의 지구공동체 문제가 인류생존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지 않는가. 사이드는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사회의 개인들과 제도를 포괄하는 투쟁으로 벌어지는 매우 공들인 역사적, 사회적, 학문적, 정치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지속되는 소란스런 상황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운이 좋았다고도 나빴다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서구의 침략에 불안과 압박감을 느끼는 아랍과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말에 한 번도 귀를 기울인다거나, 동양이 동양이게끔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서양에게 진지한 질문과 대답을 던지는 최초의 책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책의 서두에서 인용한 짧은 문장,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마르크스가 암시한 주관적 진심, 즉 만일 자신이 말할 기회가 거부되었다고 느낀다면 그런 기회(즉,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지난(至難)한 시도를 거듭해야 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다. 실제로 20세기 (제3세계의) 해방운동 역사가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듯이 하위계급은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문화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인 두 라이벌 사이의 적대감을 내가 의도적으로 영구화시켰다고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그 구조를 성실히 설명하고자 했으며, 그 끔찍한 영향을 축소시키고자 노력했다. 오히려 동양과 서양의 대립은 오인된 것이었고,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행이도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외국인 혐오증과 공격적이고 인종편향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최근 다문화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의 실재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기록도 있어 기쁘다(pp.581-582).

 

하지만 사이드는 일부 완고한 미국과 영국 학회들로부터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그의 저서들을 묶어 ‘잉여’ 휴머니즘과 감정적이기까지 한 표현법으로 인해 비난 섞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말하길, “나는 그래서 기쁘다! <오리엔탈리즘>은 빨치산(Partisan) 책이지 이론상의 기계가 아니다.”고 했다. 그는 오리엔탈리스트의 ‘길드’가 제국주의 권력과 결탁한 역사가 엄존해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구소련의 붕괴이후 미국의 일부 학자와 언론인들이 오리엔탈리즘으로 점철된 이슬람에서 새로운 악의 제국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쇄도하고 있다. 사이드는 중동과 극동 지역에서 민족종교와 근본민족주의로의 귀환이 생겨 난 것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는 현대문화이론의 진보 가운데 하나가 문화란 잡종이고 이질적인 것임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가 『문화와 제국주의』(1993, 박홍규 옮김, 2005)에서 주장한 것처럼 각문화의 독자성을 통합되어 있거나 단순한 윤곽으로 무리하게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와 문명은 서로 연관되고 상호의존적이라는 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약소민족들-과거에 식민 지배를 받았고, 노예로서 억압받았던- 이 침묵한다거나 지배자였던 유럽이나 미국 남성들에 의해서만 침묵이 설명되지 않는 다는 게 매우 두드러지게 되었다. 여성과 소수민족, 그리고 주변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혁명이 너무나 강력해서 전 세계적인 사고의 주된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70년대에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쓰고 있을 때에 나도 그것에 대해 뭔가 감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문화에 관한 학구적이고 이론적인 연구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정도가 되었다(p.602).

 

그런가 하면, 세계화의 파고를 타고 소수 금융 엘리트가 이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 전 지구적으로 그 권력을 확장시키고,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독점하여 저소득층으로부터 고소득층으로 부를 공공연히 재분배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편승해 국경도 없이 남반구가 북반구에 굴종함으로써, 신식민주의의 초국가적 질서가 부상하게 된 게다. 사이드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하나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현상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시작되었던 그 원한과 불평등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제 이런 것들은 영구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 혹은 부분적인 완화는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일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지난 15년이라는 세월 사상과 인간관계에 채워진 제국주의적 족쇄를 완화하고자 하는 학문적 사명으로 되돌아보면 <오리엔탈리즘>은 적어도 스스로를 투쟁 속에 활짝 열어 놓았다는 공을 세운 셈이다. 이 투쟁은 물론 ‘서양’과 ‘동양’에서 함께 계속될 것이다(p.609).

 

필자가 보기에 그 투쟁은 지금 여기 한반도에 응집되어 있다. 해서 한반도가 풀리면 동아시아가 풀리고, 동아시아가 풀리면 세계가 풀린다.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빌 애쉬크로프트, 팔 알루와리아, 2001, 윤영선 옮김, 2005)

 

 

우리는 왜 에드워드 사이드를 읽는가? 뭣보다도 ‘땅에 발을 딛고 선’ 이론을 알기 위해서다. 모든 이론은 특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한 이유로 그곳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사이드만큼 강력하게 보여주기가 어렵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해 전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야 했던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늘 고통스러운 문제였다. 사이드가 보기에, ‘땅이 없는 민족(유대민족)에게 민족 없는(팔레스타인) 땅을’이라는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을 유럽제국주의자들이 그랬듯, 없어도 그만인 원주민들로 ‘가득 찬’ 빈 영토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사이드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자신에 의해 계속 퇴고되고 다시 씌어지는 텍스트이자, 그가 쓰는 다른 텍스트들에 의해 교차되고 분절되는 텍스트이다. 사이드는 자신을 전치되고 고향에서 ‘망명한’ 자로 집요하게 위치 지운다. 그는 어떤 본질적인 팔레스타인 문화의 실재를 고안해 내기보다는 모든 문화와 그 정체성은 그 자체가 ‘과정’이라고 본다.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 권력이 지식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양이 동양을 ‘아는’ 과정이야말로 서양이 동양에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는 게다. 그는 오늘날 구미에서 이루어지는 이슬람에 대한 ‘재현’이 19세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동양을 인식하고 구성했던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는 게다. 또한 거기에는 지배문화의 권력이 뚜렷이 반영되고 있다.

사이드에게 지식인의 역할 문제도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로서는 지식인이 권력을 향해 말하기 위해서는 당파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망명’의 중요성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하지 않음’(not-belonging)의 의식은 공적 지식인이 경계에 서서 말해야 하며, 교조적이고 당파적 담론들에서 부정된 것을 말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을 강화시켰다.

 

<오리엔탈리즘>의 대안은 무엇인가?

 

“『오리엔탈리즘』이후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제를 특집으로 1994년 <창조정신>(프랑스) 특별호에는 사이드의 이론적 한계들을 넘어서고자 하면서, 식민담론 분석에서 사이드의 작업이 지닌 구성적 태도에 주목한다. 혹자는 사이드가 권력관계를 “억압적 가정들이라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실제로는 불연속적이고 복수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전체화하는 해석적 틀을 구성한다.”고 비판한다. 해서 우리가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의 양가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사이드의 작업을 정교화하는 ‘지역별’ 비평체계를 제안하기도 한다.

혹자는 사이드가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 하나는, 연구 대상이 되는 민족을 지배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인본주의적 지식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게 가능한가? 다른 하나는, 침묵하는 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제 자신을 재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다.

 

사이드의 주장에서 핵심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며, 반대로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으로 그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어떤 대상’은 세계전역에 해당되며, 이 세계에서 수십 개의 인종과 민족과 언어가 ‘동양’이라는 거짓(하나의) 범주 아래 모아지고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가 분단체제하에서 같은 동족이면서도 ‘북한세계’ 혹은 ‘북한체제’ 실체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대부분 남한의 반공교육 산물이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지아대 명예교수인 박한식 교수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2018)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