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김용옥, 1986)
1.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주로 근동 혹은 중동의 이슬람 문화권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도올 김용옥이 말하는 ‘동양학’은 East Asian Studies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로 중국․한국․일본의 학문체계를 지칭한다.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근대화란 명제는 서양 열강에 의하여 동양에게 부과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강요된 멍에였으나, 서양 자신이 그러한 강요를 통해 부득불 동양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단계에서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공구로서의 이해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러한 공구적 이해는 자기들 역사적 한계성과 취약성을 보완․극복하는 이해의 차원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개화시켜야 할 그 무엇이었던 것에 오히려 자기들이 개화 당하는 逆流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인류의 문화교류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동시에, 변증법적 역사발전 법칙으로 보더라도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pp.114-115).
그에게 동양학은 한국의 지적활동을 민족사적 나아가 세계사적 시각 속에서 어떻게 조직화하느냐 하는 ‘어떻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동양학을 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방법론적 제시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게다. 우선 동양학 학도로서 자신이 얻은 문화적 체험을 토대로 비교적 시각에서 방법론적 견해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서는 끊임없이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 속에서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성실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러한 태도 속에서 먼저 나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 결백성을 확립해야 하고, 그러한 이해를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 언어의 도구를 통해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내가 말하는 방법론이란 이러한 학문의 태도, 즉 지적 결백성 내지 논리의 명료성에 토대한 보편적 인식,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비교론적 시각이라는 것은 동서사상계의 類比(analogy)보다는 ‘자기논리의 심화․철저화’에 더 초점이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볼 때, 동양학에서 가장 먼저 부상되는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는 게다. 여기서 번역이란 한문문화권을 한글문화권으로 옮기는 작업으로, 그것은 과거를 현재로 바꾸는 작업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문문화가 번역이 되지 않는 한 과거는 현재로 이행되지 않는 채 과거로서만 매몰되어 버리고 만다.
게다가 일본인은 한문을 訓讀(reading by meaning)으로 받아들인 데 반하여, 우리는 音讀으로만 받아들여 그 번역이 큰 난제로 다가온다. 일본학계는 성실한 번역을 중시하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번역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일본 자료에의 의존은 결국 ‘표절적 의존’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의미해석으로서 ‘번역’은 학문 활동 중에서 가장 긴 시간과 수준 높은 학문적 에너지를 요하는 작업이다.
2. ‘동양적’이란 의미
‘동양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될 때 가장 올바른 내포를 가질 수 있을까? 도올은 동양적이라는 말 자체가 서양적이라는 말에 대해 상대적으로 생긴 말이고 보면, 원융적․포괄적․화해(和諧)적인 동양사상의 진수를 막바로 “이러이러한 것이 동양적이다”라고 꼬집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진가를 잃어버릴 위험성마저 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말하는 ‘동양적’이라는 개념과 동양인으로서 동양학을 공부한 도올이 접근하는 ‘동양적’ 의미는 그 접근방식은 물론 개념 도출에서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양인은 인도문명권에서든 중국문명권에서든 절대적 그 무엇을 언어문자로써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는 현상과 실체 자체를 모두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지 않는 연기(緣起)에 바탕을 둔 (유기체적) 세계관의 불가피한 방법론이기도 한 것이다. …(중략) 철학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성과 특수성하에서 일정한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양식 내지 사회의식구조를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동양적․서양적 이란 의미를 양대 철학의 입장에서 밝히는 데는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다. 이때 서양을 헤브라이즘․헬레니즘․게르마니즘이 서양철학사 속에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고, 동양을 유가․불가․도가의 3대 사상을 회통(會通)하여 그 공통성을 찾아 묶어 이해한다면, 서양적, 동양적이라는 구분근거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필자가 택하는 방법론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사고체계를 대조 분석하여 서양철학의 논리에 동양철학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역으로 동양적인 것이 부각되도록 해보자는 의도에서 “동양적이란 의미”문제를 다루고자 한다(pp.265-267).
도올은 동양의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관건은 '동양적 일원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파악하는 데 있다고 했다. 동양적 일원론은 현상과 실체의 이분(二分)을 근본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전원적(全元的)인 일원론이며, 情理圓融(감정과 이성의 세계가 하나로 조화됨), 天人無間(하늘 즉 자연과 인간의 간격이 없이 하나다), 空卽是色 色卽是空(본체계가 곧 현상계이며 현상계가 곧 본체계이다) 등으로 표현되는 일원론이라는 게다.
여기 전원적인 일원론이란 불학에서 말하는 不二門과 같은 개념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본래 마음은 하나(一心)이지만, 그 마음이 드나드는 門이 두 개라는 게다. 그 하나는 참으로 그러한 心眞如門(the aspect of Mind in terms of the Absolute)이요, 다른 하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心生滅門(the aspect of Mind in terms of phenomena)이다. 기신론에서 一心二門의 두 문은 서로 따로 때어서 볼 수 없는 不相離의 관계이어서 ‘不二門’이랬다. 이 두 개의 문은 각각 일체의 법을 總攝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두 門이 서로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진흙과 질그릇, 물결과 물의 관계
이런 전원적인 일원론의 관점에서 유학에서는 天地無間 혹은 天人合一을 말했다. 하여 誠의 철학인 <중용>에서는 誠해 있는 것은 하늘의 道요(誠者 天之道也), 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道(誠之者 人之道也)라 했다.
도올은 동양적 사고체제 혹은 동양철학의 열쇠 말을 ‘동양적 一, 中, 和’로 집약했다. 그는 「一은 全이요, 二는 異다. 一은 배타함이 없이 포괄하는 특성을 가지며, 다른 것(異)은 부정과 배타성을 가진다. 하나 동양에서는 二를 끌어 들일 때도 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키 위한 양의(兩儀; Two Forms, Two Modes)로서만 파악했지 배타와 부정을 위해 끌어 들인 것은 아니다. <周易>에서 음(陰)과 양(陽)이 그것이다. 음과 양은 대우주의 변화 속에서 대등한 위(位)를 가지면서도 각기 그 공능(功能; function, operation)이 다른 것으로 보았다. 陰은 수동적 공능의 상징이라면, 陽은 능동적 공능의 상징이다(pp.287-288).」고 했다.
동양 일원론의 또 다른 핵심적 표현으로 그는 ‘中’과 ‘和’를 든다. 『중용』1장에는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節)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고 일컫는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大本)이요, 화(和)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달성해야 할 길(達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한 경지까지 밀고 나가면, 하늘과 땅이 바르게 자리를 잡게 되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絶,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희로애락의 정(情)이 발현되지 않은 ‘미발’(未發)의 상태를 ‘中’이라 했는데, 여기 미발의 기준으로서 ‘中’은 ‘天命之謂性’의 性(본래성)이자 기신론에서 말하는 참으로 그러한 마음(心眞如)의 상태이다. 도올은 이 ‘中’은 모든 감정이 평형(equilibrium)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와 같은 것이라 했다. 하여 동양에서 中은 一의 개념이며 전체를 포괄 통섭하는 원융(圓融)이랬다. 이 때 中 은 반드시 和를 동반한다. 『중용』에는 “未發의 中이 발현하여 절(節)에 들어맞는 것을 和”라 했다. 여기 ‘節’은 인간이 지켜야 할 절도이자 분수이며, 삶의 마디이자 타임밍(timing; 時中)이다.
도올은 동양적 프래그머티즘의 본원적인 진수를 나타내는 것이『중용』의 성(誠)론이랬다. 이 성론(誠論)의 결론적 최고봉을 『중용』22장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誠)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性)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다른 사람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모든 사물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성(性)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어야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하늘(天)과 땅(地)과 더불어 온전한 일체가 되는 것이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天地之化育; 可以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진성(盡性)케 하는 것이 지성(至誠)이다. 이 진성(盡性)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 만물에까지 이르게 될 때, 마침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하늘과 땅과 더불어 내가 온전한 일체(즉, 天地人 三位一體)가 된다는 게다. 해서 도올은 “성실하지 않으면 우주가 없다!”(不誠無物)고 했다.
결론적으로 도올은 “서양사상을 배척하고 동양사상만을 이상시 한다든가, 서양사상만을 신봉하고 자기 패배감에 젖어 있다든가 하는 불건강한 태도는 모두 불식해야 할 것”이랬다. 해서 우리가 ‘동양적’이라는 말의 진의를 내 면적으로 체화할 때에, 비로소 가장 한국적인 것을 체(體)로 해서 세계화를 용(用)으로 삼는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게다.
도올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기 한지 벌써 20년 이상이나 지났다. 그 연장에서 지금 우리는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각자의 처지에서 천착해 봐야 할 게다. 조동일은 <세계․지방화시대의 한국학>(2004-2009)을 시리즈(10권)로 우리들에게 큼직하게 제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