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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한 한국학의 정립

평촌0505 2020. 7. 2. 06:39

  에드워드 사이드(E. Seid; 1935-2003)의 <오리엔탈리즘>(1978)은 우리에게 오래 되지 않은 고전이 되어버렸다. <오리엔탈리즘>은 1980년대 이래 약 30종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두루 알려진 사이드의 대표적 저서다. 해서 사람들은 정작 <오리엔탈리즘>(1999, 박홍규 옮김)을 읽지 않고도 읽은 것처럼 곧 잘 인용한다. 나 자신도 그런 부류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금년 초에 서재에 그냥 15년 이상이나 꼽혀 있던 책을 꺼내 맘먹고 읽어 보았다.

내친김에 이 책을 <지식과 세상> 책읽기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으면 좋겠다 싶어 북리뷰까지 대충 해놓았다. 그러고 3월에 책읽기 교실을 열려고 했으나 코로나 환란으로 그냥 접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지식과 세상>에서 6월 중순 경에 <오리엔탈리즘> 책읽기 교실을 온라인으로 운영해 보자고 해서 그리하기로 했다. 현직에 있을 때 사이버대학 강좌를 개발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게 벌써 약 20년에서 15년 전의 일이다. 내게는 새로운 자극이다. 북리뷰 해놓은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강의요지>를 따로 작성하고, 유튜브로 온라인강의가 진행 중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과학의 세기와 산업혁명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축적한 지적․물적 역량을 동양지배의 도구로 삼아온 서양식 담론(discourse)을 총칭하는 것이다.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서양의 관계정립 과정에서 서양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성된 ‘존재론적․인식론적’ 구별(차별)에 근거한 일련의 패권적 ‘사고방식’이다. 해서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구축된 하나의 ‘담론 스타일’이다.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지식과 권력(식민화)의 합작품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총론격인 ‘서설’의 모두에서(즉,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사이드는 칼 마르크스의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 ‘그들’은 당연히 동양인을 지칭한다. 마르크스의 이 말을 보면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그 조차도 결국 서양 지성의 굴레(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한편 되짚어 보면,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로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으로서 나 자신은 정말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쓰는 사람인가? 나름 다소간의 노력은 했겠지만, 부끄럽다.

이어 사이드는 영국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테일리의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하는 사업이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정치가로서 디즈테일리에게는 동양을 식민지로 개척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 추진해야할 사업(project)으로 인식되었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서양인에게 동양은 지배의 대상으로 그곳에 있는 상상의 지리였다. 어쩌면 사이드가 지식인으로서 칼 마르크스와 정치인으로서 벤자민 디즈테일리의 말을 각각 서두에서 인용한 것은 우리가 <오리엔탈리즘>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에 각별한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국에서 인문학 교양 시리즈로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2001/ 윤영선 옮김, 2005)가 나왔다. 이 책에서는 ‘땅에 발을 딛고 선 이론가’ 사이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왜 에드워드 사이드를 읽는가? 그 첫째 이유는 ‘땅에 발을 딛고 선’ 이론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말해 모든 이론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곳에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다른 어떤 비평가도 사이드만큼 강력하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무엇에 대해 논하든지 간에 그의 저작 안에는 망명한 팔레스타인 지식인으로서 그 자신이 점하는 장소(place)가 항상 굴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이드를 읽는 둘째 이유 역시 이와 연관돼 있다. 탁월한 학자이자 미국 시민인 그에게 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정체성은 극히 역설적인 동시에, 모든 정체성 특히 고향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진 사람들의 정체성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구성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이드의 정체성이 지닌 역설은, 오늘날 전세계에 분포한 이산(離散) 민족과 탈식민 민족들의 복합적 정체성의 지표인 것이다. (윤영선 옮김, 2005, pp.23-24)

 

중심에 있으면서 주변인으로 살아온 역설적 정체성은 지식인으로서 사이드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번역한 윤영선(2005)은 “지금-여기의 문제들에 대한 생생하고 고뇌에 찬 응답으로서의 학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능한 걸까? 에드워드 사이드에게서 우리는 바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사이드가 마주친 세계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와 그리 멀지 않으며, 사이드를 고뇌하게 만들었던 찢겨진 정체성의 문제는 또한 우리들 자신이 풀어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광복 75주년,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보내는 지금도 우리는 외세 탓만 하고 있을 건가? 분단 상황,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능동적(주체적)으로 풀어가야 할 '지금-이곳'의 역사적 문제이자 과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까? 사이드는 동양을 지배하려드는 서양패권주의 담론을 일관되게 비판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 제시가 없다. 스스로 그게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라 했지만, 그의 비판 속에는 이미 대안이 암시되어 있다. <‘오리엔탈리즘 이후의 오리엔탈리즘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유럽 지성인들은 “침묵하는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들 자신을 재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나를 포함한 동양과 동양인 모두를 향한 문제제기다. 모든 서발턴(치묵하는 하위집단)은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의 세상살이가 성립한다.

 

우리가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하여 진정한 주체로서 동양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연장에서 동아시아문명 속의 한국학을 정립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도올 김용옥은 동아시아학(East-Asian Studies)을 중심으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6)을 제기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나오고 8년 쯤 뒤에 제기된 질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화란 명제는 서양 열강에 의하여 동양에게 부과된 강요된 명제였으나, 서양 자신이 그러한 강요를 통해 부득불 동양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단계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공구(工具)로서의 이해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러한 공구적 이해는 자기들 역사의 한계성과 취약성을 보완․극복하는 이해의 차원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개화시켜야 할 그 무엇이었던 것에 오히려 자기들이 개화당하는 역류(逆流)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인류의 문화교류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동시에, 변증법적 역사발전 법칙으로 보더라도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김용옥, 1986, pp.114-115).

 

위에서 도올이 말하는 역류현상으로서 문화 교류는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가당착적인 면도 있을 게다. 그리고 도올은 동양학의 방법론으로 번역문제에 주목했는데,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한 동양학의 방법론으로서는 다소 거리가 있다. 어쨌건 우리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연장에서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 게다.

 

조동일 교수는 정년 후에 계명대학 석좌 교수로 강의하면서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학기마다 한 권씩 『세계․지방화시대의 한국학』이라는 큰 주제로 2004년에서 2009년까지 모두 10권(각권의 하위주제는 길을 찾으면서, 경계 넘어서기, 국내외 학문의 만남, 고금학문 협동작전, 표면에서 내면으로, 비교연구의 방법, 일반이론 정립, 학자의 생애, 학문의 정책과 제도, 학문하는 보람 등으로 구성됨)을 집필․출간했다. 놀라운 역량이다.

 

필자는 정년직전에 그간 내 나름 공부한 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의미에서 『한국특수교육론: 우리나라 특수교육(학)의 정체성』(김병하, 2011)을 펴냈다. 이 책에서 나는 한국특수교육론 정립의 방법론으로 (1)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론, (2)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방법론, (3)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방법론을 말했다. 즉,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천착한 방법론의 정립, 동아시아문명권을 기반으로 서로 다르면서 대등하게 소통하는 방법론,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지혜를 오늘의 시대상황에 맞게 새로이 정립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방법론을 제기했다.

 

이런 일련의 방법론에 의거하여 그 내용을 채워 넣는 것은 이 땅의 특수교육학인 각자의 몫일 터. 물론 그 몫은 필자에게도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코로나 환란 중에 사회적 거리 두기 덕분에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지적인 자극을 받은 것이 주된 동기가 되어,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국특수교육 담론」(특수교육저널, 2020, 21권 2호)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후학들이 각자 나름으로 한국특수교육 담론 생성에 참여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보람으로 삼겠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응답으로 이 땅의 지식인들은 각자의 지적 관심사에 따라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집요하게 문제 삼아야 할 터이다. 그런 지적인 노력이 축적됨에 따라 한국학의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에 연관되고 보탬이 되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특수교육학인들은 한국특수교육 담론 생성에  자기 역량을 꾸준히 쏟아부어야 할 게다. 그런 과정에서 이 땅에 발을 딛고 일어선 이론정립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대의 밥값하는 지식인이다. 우리에게 창조하는 학문의 길은 결코 먼데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