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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의 광복75주년 소회

평촌0505 2020. 8. 17. 21:30

나는 해방둥이다. 정확히 말하면, 해방되기 불과 20일 전에 경북 선산 낙동강변의 어느 시골마을(평촌)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99년 왕조 말기에 태어나서 아홉 살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자수성가한 자작 농부가 되었다. 해방직후만 해도 우리 집은 가난한 농가였다. 어릴 때 나는 쌀밥 구경하기가 어려웠고, 양식을 절약한다고 무밥이나 조밥을 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에 6․25전쟁이 일어나, 그 해 여름 우리 가족은 낙동강을 건너 군위 효령을 거쳐 영천에서 청도까지 피난 행렬에 끼어 약 한 달간 고달픈 피난생활을 겪었다. 피난길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백태로 깔려 있었고, 잊어버린 가족 이름을 부르는 애달픈 목소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 피난길이 내게는 얼마나 무리였던지 집에 돌아와 약 한 달간이나 걷지를 못하고 방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 이듬 해 봄 나는 폭발물 사고로 오른 손을 다쳤으나, 용케도 연필을 쥐고 글씨를 쓸 수는 있었다. 이처럼 나는 어린 나이에 된통 온몸으로 전쟁 후유증을 앓았다.

 

주지하는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사망자만 적게는 350만 명에서 많게는 500만 명 가까이나 된단다. 근데 그 사망자 수 가운데 전투에 참여한 군인보다 민간인 수가 더 많다는 게 한국전쟁의 특징이자 비극이다. 무고하게 민간인 학살이 남북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자행된 탓이다. 그러나 그 민간인 학살은 남한정부와 미군들에 의해 훨씬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그래서 동족상잔의 상처는 깊게 남아 있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된 김낙중(金落中; 1931-2020) 선생은 한국전쟁을 이렇게 회상한다.

 

제가 20세 되던 1950년에 남과 북은 소련탱크와 미국비행기를 가지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동족끼리 전쟁의 틈바귀에서 인민군으로 또는 국군으로 나가서 형제들에 대한 살인행위를 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래서 농촌에 살던 저의 초등학교 동창생들은 대부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가서 총을 들었고, 도시에 살던 저의 중고등학교 동창생들은 거의 모두 ‘학도병’ 또는 ‘징집’으로 국군 편에서 총을 들고 싸움질을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저의 동창생들의 대부분은 어느 쪽인지에 서서 총질을 하다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김낙중, 인류문명사의 전환을 위하여. 2013, p.7).

 

당시 부산서 피난생활을 하던 김낙중 선생은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이런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반대 평화통일’을 외치며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단독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그 후로 그는 북쪽에서 한 번, 남쪽에서 네 번 “너는 죽여 없애야 할 원수들 편의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온갖 고문과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65년이 지났지만 그 싸움질은 끝이 보이질 않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휴전상태’가 그냥 지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민족의 업보다.

한국전쟁의 끝자락(1952)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글 1세대로 글자를 익혔고, 숫자와 구구단을 외웠다. 우리 시절만 해도 학교에 입학해야 비로소 문자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전란 중이어서 교실도 부족했고, 교실에 책걸상도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봄여름에는 나무에 칠판을 걸어놓고 나무 그늘에 둘러 앉아 공부한 기억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3학년이 되어서야 책걸상이 있는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식목일에는 어김없이 낙동강 언저리에 버드나무 묘목을 심었고, 가을에는 교실에 난로 뗄 감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 뒷산에 나무와 갈비를 끌어 모아 오기도 했다. 그런 게 우리들에게는 초등학교 시절의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만해도 남아들은 약 절반 정도 중학교에 진학하고, 여아들은 초등 6년으로 끝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나는 집에서 약 5-6킬로 떨어진 구미중학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공부 잘하고 집안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대구에 가서 중학을 하는 경우가 있어, 또래 간에 학벌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일 년 반 정도는 들길을 걸어 다니면서 영어단어를 외우곤 했다. 2학년 1학기 말쯤에 부산에서 큰 형님이 자전거를 사주어 초등학교 동기 여학생들의 책가방도 실어주고 폼을 잡았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4․19 혁명이 일어나고 고1(동래고등) 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때 나는 정치의식이 빈약해 이승만 자유당 독제가 심해진다는 걸 그냥 어설피 짐작하고 있었고, 5․16 쿠데타는 그냥 ‘군사혁명’으로 입력되어 있었다. 그 주동자가 고향의 구미 출신 박정희 장군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장면 총리 내각이 민주적으로 국정을 수행하던 중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 세력을 미국이 순순히 인정해 준 것에 대해 내심 다소 의아함이 있었지만 그러려니 싶었다. 게다가 그 때 우리 집안 분위기는 박정희 군사정부를 비교적 신뢰하는 편이었다.

나는 고2 때까지는 비교적 열심히 교과공부를 했지만, 철학과 쪽으로 내심 진로를 정하고부터는 다소 소홀함이 있었다. 겨우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은 했지만,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게다가 정신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정서적으로는 염세적인 성향에 빠져들고 있었다. 내 스스로 해결할 능력은 없고 심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내 평생에 가장 힘든 때가 서울서 철학과에 다니던 때였다. 도저히 배겨내지 못하고 대구(당시 한국사회사업대학)에 있는 특수교육과로 옮겨 새로운 마음으로 대학공부를 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결과적으로 특수교육이 나를 살리는 길이 되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였고,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살던 때였다. 그런 중에도 내가 대학까지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었다. 뭣보다도 소농에서 중농으로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자식사랑과 교육열의 덕분이었다. 막내둥이인 내가 대학졸업 할 무렵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님 별세 후 엉거주춤 하던 차에 경북대에 새로 교육대학원이 생겨 교육철학 전공에 등록을 하였다. 이 때 내가 대학원 1학기를 마치고 하던 일을 접고 연구실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 게 학문의 길로 입문하는 데에 큰 밑천이 되었다.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특수교육 현장경험을 쌓기 위해 농학교인 대구영화학교에 특수교사로 일하던 중 생각보다 빨리 1972년 9월에 모교(현 대구대)특수교육과에 전임발령을 받고 1973년 신학기에 문교부로부터 정식 발령을 받아 그로부터 40년간 교수 노릇을 했다. 교수 발령을 받고 그 해(1973) 4월에 대구 토박이 아가씨와 결혼 해 2남매(아들, 딸)를 낳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결혼 후에는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어 위궤양으로 총각 때 오랜 고생을 했으나 완쾌가 되었다. 결혼 초에 단출하게 신접살림을 시작했지만, 집사람이 경제 관리를 체계적으로 해주어 결혼 후 2년 만에 소형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집안 살림과 모든 경제 운용은 집사람이 도맡아 해오고 있다. 덕분에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교수직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정년 후에 지금도 자유롭게 내 할 일만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한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서둘러 뒤늦게 수출 중심의 고도성장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70년대 중반이후 지방대학의 양적인 발전도 눈에 띄게 늘어나 내가 근무한 대구대학만 하더라도 60년대에 작은 특성화대학으로 출발했지만, 80년대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대형대학으로 변모되었다. 그만큼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고급인재양성도 활성화가 된 게다. 이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나 직장생활면에서 안정성을 유지했으나, 정치경제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큰 변혁을 겪는 그런 격변의 시대였다.

70년대 말에 박정희의 유신독제정권이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다시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면서 나는 또다시 미국이라는 존재가 개발도상국의 자주적 발전에 대응하는 패권국으로서 갖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과학을 하는 교수로서 나 자신은 좀 더 미국중심의 학풍에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978년 1학기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약 6개월간 머물면서 특수교육을 연수한 것이 그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워싱턴 DC에 있는 농분야 특성화대학인 Gallaudet 대학에 1년간(1981-82) 객원연구교수로 머문 경험은 나를 더욱 미국중심의 특수교육 학풍에 빠져들게 했다.

1990년대에 우리나라는 산업중심사회로 그 자리를 굳혔고, 그 덕분에 나도 88올림픽 무렵에는 자가용 자동차를 굴리기 시작했다. (원래 자동차 운전은 80년대 초에 미국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렵 선진자본주의국가군들(즉, 신대륙의 미국과 유럽의 일부 문명국들)은 전통적인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에 기반한 후기산업사회로 패러다임 이행이 일어나고 있던 터였다. 마침내 90년대 중후반 무렵에 내 연구실에도 개인용 컴퓨터(PC)가 들어와 전자 정보화시대를 체감하게 되었고,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 서툰 솜씨로 인터넷 메일교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 말에 인문사회분야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대구대의 특수교육분야가 소위 두뇌한국(BK)21 사업에 선정되어 7년간 나는 BK21 사업단의 단장을 내리 맡아 긴장된 분위기(중간 평가에서 탈락될 수도 있기에) 속에서 국책사업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졌다. 본래 이 국책사업은 이공계와 자연과학 계열을 중심으로 대학의 학문을 국제적 표준으로 끌어 올리는 데에 주목적이 있었고, 인문사회계열은 그냥 구색 맞추기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연구단의 사업방향을 <동아시아 중심의 특수교육학 정체성 정립>에 주안점을 두고 나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연구단 단장으로서의 책임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를 통해 동아시아문명 속의 한국특수교육학의 정체성 정립에 열정을 쏟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아시아지역 특수교육 국제학술대회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연구단 사업을 매개로 츠쿠바대학 특수교육학부장 나카무라(中村) 교수를 통해 일본특수교육학회와 학술교류를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카무라 교수는 특수교육역사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업적을 축적해 온 터여서 나와는 코드가 잘 맞았다.

나카무라 교수 연구실 박사과정 학생들과 우리연구단이 공동 워크샾도 하였고, 일본특수교육학회에 초청형식의 발표기회도 두 번 가졌다. 이런 활동을 통해 나는 동아시아 특수교육 정체성 정립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번은 우리 연구단 주최로 <동아시아 특수교육 공동체 구축을 위한 한․중․일 특수교육의 실천과제>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2011)하였다. 이 세미나를 통해서 내가 느낀 것은 동북아시아 3국 가운데 통합교육을 향한 특수교육 실천은 일본이 가장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본은 구미통합교육의 실천을 자체적으로 ‘특별지원교육’체제로 전환하는 쪽으로 노력하지만 실질적인 ‘전환’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이에 비해 중국 특수교육은 아직은 분리교육의 확산에 주력하고 있지만, 대국답게 ‘우선과 나중, 정(正)과 부(副 )의 공동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특수교육에서 분리와 통합을 상보적으로 병행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 두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정책적으로 통합교육 지향성을 강조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무늬만 통합 지향적이라는 그런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국제세미나를 통해 동북아 3국의 특수교육 담론과 실천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통한 특수교육 공동체 정립 방안을 모색해 볼 수 있었던 게 하나의 소득이었다.

 

이쯤에서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최근 40년간 우리 사회의 전반적 변화과정과 그 문제를 해방둥이의 입장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80년대에 전두환 신군부체제에 이어 6․29 선언을 통해 마침내 5년 단임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야권분열로 실질적인 정권교체는 실패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교훈은 분단 상황에서 기존보수(기득권 세력)의 벽을 넘기가 참 어렵다는 현실의 문제다. 본래 나는 정치적으로 가능하면 이쪽저쪽을 함께 아우르는 ‘중도’를 선호해 왔지만, 내가 몸담은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운동장이 너무 오른쪽으로 이울어져 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 좌’를 지향하게 되었다. ‘중도’(中道)는 불학에 의하면 ‘쌍차쌍조’(雙遮雙照)다. 즉, 양 극단을 버리되, 동시에 양쪽을 비춰 아우른다는 게다. 말은 쉽지만 참 어렵다.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에서 노태우 이후 김영삼까지는 보수적 집권이었고, 김대중-노무현은 진보 쪽이었다면, 이명박-박근혜는 다시 보수의 회귀였다. 특히, 2016년 촛불혁명 이후 박근혜는 탄핵을 당했고, 새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냉온탕을 오가는 일관성 결여라는 자체모순을 노정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남남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분단은 내면화되어 가고 있다.

한편, 경제적으로 남한은 최근 40-50년간 놀라운 발전(즉, 압축발전)을 가져왔지만, 고도성장의 어두운 산물로 빈부격차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야기되고 있다. 북한은 평등한 분배를 강조하지만 전반적으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자체모순을 안고 있다. 해서 광복 75주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 볼 때, 남북한 간의 이질성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너무 심화되어 버렸기에 지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분단고착’ (분단체제화)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언필칭 우리는 민족도 하나요, 언어도 하나라고 하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이질성이 남북 간에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동질성을 회복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럼 어찌할 건가? 노자는 “되돌아봄이 도(道)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서(體) 앞으로 어찌할 건가(用)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랜 역사(민족을 형성한 고려조 이래로)를 통해 우리 민족은 본래 하나였다. 해서 답은 우리 역사 속에 들어 있다. 다만 분단 75년 세월 동안, 특히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간에는 건너기 어려운 강물이 흐르고 있다. 특히 정치경제적으로 그 이질성이 너무 심화되어 버려, 남북한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 대목에서 나는 원효의 화쟁(和諍)철학과 조동일의 생극론(生克論)을 떠 올린다. 싸움은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끝낼 수 있다. 해서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상극과 상생은 서로 맞물려 있다. 해서 중도(中道)가 우리의 길이다.

우리에게 통일은 역사적 소명이다. 하지만 이 소명에 응하는 방법론에 있어 지혜의 발휘가 긴요하다. 그것은 곧 ‘중도’의 지혜다. 통일은 우리에게 목표이지만, 동시에 ‘과정’의 문제다. 해서 통일은 그것을 향한 부단한 노력의 과정에 내재한다. 그 ‘과정’의 원칙은 평화공존이다.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 부단한 노력이 곧 통일의 과정이다. 절실한 만큼 쉬운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은 뒤로 미루고 우선 문화중심의 민간교류부터 하나씩 활성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내 입장에서는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교육에 있어 학문적․실천적 교류부터 고민해 볼 수 있다. 각자의 처지에서 그 교류와 만남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중도’의 원칙에서 우리의 정치경제적 체제는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게 온당하다. 이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체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그 생명력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기존의 사회주의가 그 대안일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는 분배를 중시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공화제로 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민주주의’가 그 대안이다. 굳이 사례를 든다면 북유럽 복지국가 모형이다.

하지만 그들 모형은 우리가 지향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다만 상대적 본보기일 뿐이다. 우리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한반도형 사회적 민주주의는 생성되고 재구성될 뿐이다. 그런 주체적 생성과정에 통일은 존재한다. 광복 75주년에 즈음해서 어느 해방둥이가 꿈꾸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역사적 현실로 구현 되는 그 날을 고대한다. 살아생전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고 평양 냉면 한 그릇 먹어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