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 이후 다시 확산되는 코로나 환란이 심상치 않다. 어쩌다 75주년 광복절은 ‘감염절’이 되어 버렸다.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면서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선생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1996)을 꺼내 펼쳐보았다. 작가에게 글은 삶의 반영이다. 권정생 선생의 글은 그의 삶처럼 소박하지만 깊은 맛이 우러난다. 유대철은 『대한민국 철학사』(2020)에서 권정생의 철학은 ‘자기 내어줌의 형이상학’이랬다.
나는 2007년 초여름 권정생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고, 그가 살던 안동 일직면 조탁리에 있는 토담집으로 직접 운전해서 가보았다. 방문 앞에 영정사진이 있고 촛불이 켜져 있어서 약식으로 조문도 했다. 안내하는 분이 화장한 선생의 뼈 가루는 집 옆에 딸린 야트막한 빌뱅이 언덕에 그냥 뿌렸다고 일러주었다.
본래 선생은 동네 예배당 문간방에 살다가 마을 청년들이 지어준 스레트 지붕의 흙담집에서 혼자 살아오신 게다. 나는 선생이 기거한 집을 보고 요즘도 이렇게 가난하고 단조롭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싶었다. 게다가 하나 뿐인 방안에는 책들로 가득 차 있어 다시 놀랐다. 방안 빈 공간에는 밥상 겸 책상으로 사용한 작은 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부자가 화려하게 사는 데도 그 끝이 없듯이 사람이 가난하면서 단조롭게 사는 데도 그 끝이 없다는 걸 느꼈다. 작가는 가능하면 단순하게 살아야 그 만큼 풍부한 작품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선생은 자신이 세우고 싶은 교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 20여년 전, 친구한테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내용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 명에서 백 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 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다. 그냥 맨마루 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 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중략)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1996, p.14).
우리네 마을 공동체 속에 자리 잡은 참 정겨운 교회모습을 기리고 있다. 게다가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불교와 유교와도 소통하고 심지어 전래의 무교(巫敎)와도 거리낌 없이 소통하는 그런 예배당을 세우고 싶었던 게다. 종교 간의 소통은 서로에게 좋다. 나는 종교다원성을 지지한다. 특정 종교의 근본주의에 빠지면 종교를 모르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조차하다. 요즘 개신교의 일부 열광주의자들 행태를 보면 참 우려스럽고 한심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교조적 기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상종할 수 없는 원수를 대하듯 저주를 퍼 붓는다. 해서 광적인 ‘저주의 굿판’이 광장에서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선생은 20여년 전에 자신이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란다. 그 속에서 선생은 떳떳하게 모든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섬기며 살고 싶을 뿐이라는 게다. 서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며, 그것을 위해 예수는 피흘려 희생하신 것이라 했다. 선생은 “이 땅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라고 꾸짖었다.
나는 선생의 산문집에서 <십자가 대신 똥짐을>이라는 글을 읽고 평생 일하는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를 떠 올리게 된다. 아버지는 1899년 생으로 왕조 말기에 태어나 아홉 살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모시고 평생 농군으로 살아오셨다. 할머니는 내가 세 살 때(1947년) 돌아가셨는데, 운명하시기 직전까지도 내 울음소리를 듣고는 아이 울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단다.
권정생 선생은 진정 이 땅의 농촌과 농촌교회를 걱정한다면 좀 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삶이 녹아있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추상적이며 관념에 머문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창세기의 하느님 나라는 말씀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몸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가 다시 창조되고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 몸으로 살지 않고 수천만 번 주기도문만 외운다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건 절대 아니지 않는가(이 책, p.27).
나의 아버지는 평생 똥짐을 지는 노동을 감당하셨다. 일꾼에게 맡겨도 되지만 겨울철에는 머슴들도 쉬는 시절이어서 직접 똥짐을 지고 밭에 뿌리시곤 했다. 회갑이 지나고 연로해도 추운 겨울에 그렇게 하시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안 서러웠다. 나 자신은 그 일을 엄두도 못 냈지만, 아버지는 형님들에게도 그 일만은 절대로 시키지 않고 당신께서 직접 감당했다. 권정생 선생은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라 했다. 몸으로 직접 수고하지 않고 입으로만 섬긴다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강조했다.
아버지는 똥짐을 지는 농군이었지만, 내게는 몸으로 그 본을 체현하신 목회자 같은 분이셨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아버지께서 몸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진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아버지는 막내인 내가 대학 졸업할 무렵에 칠순을 넘기지 못하고 고된 육신의 옷을 벗었다. 나는 학사 학위증을 아버지 빈소에 올려놓고 통곡했다. 그 후 나는 아버지께서 내 앞으로 남겨놓은 문전옥답 덕분에 대학원 공부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평생 교수 노릇하고 살았으니, 기실은 그 모두가 똥짐을 진 농군 아버지의 십자가적인 삶이 안겨준 공덕 때문이었다. 그처럼 아버지께서는 자식을 위해 십자가 대신에 똥짐을 기꺼이 짊어지는 삶을 몸으로 감당하신 게다. 똥짐을 짊어진 아버지는 내게 곧 여래(如來)의 화신(化身)이었다.
과연 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자 했던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