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기후위기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위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살아온 대로 사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진짜 위기는 우리가 그 위기를 외면하고 사는 데에 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탄소사회의 종말』(2020)에서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해독하고자 했다. 그는 기후변화야말로 21세기 인권이 마주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랬다. 코로나 환란이 시작된 2020년 정초 지구에서 생명체가 존재한 이래, 지구 종말을 뜻하는 자정까지 겨우 100초 남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남은 시간을 크게 당긴 위협은 곧 기후변화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재앙이 되어 인류를 공격한 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업보다. 기후위기의 주범인 탄소사회를 종식시키고, 대전환을 서둘러야 할 때다. 탄소사회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을 내면화한 사회체제다. 조효제(2020)는 “탄소사회란 탄소자본주의에서 파생된 불평등이 지구적으로, 그리고 한 나라 내에서 깊이 뿌리내린 사회현실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달콤한 중독과 팍팍한 고통, 이런 이중적 탄소사회와 결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고 했다.
『탄소사회의 종말』(2020)에서는 다음과 같은 측면이 강조된다. 먼저 기후문제를 과학적 패러다임으로만 접근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측면을 부각해 사회학적 상상력과 생태적 상상력을 함께 동원하자고 했다. 기후위기 대응의 양대 축인 ‘감축과 적응’을 다룸에 있어, 온실가스 감축과 사회 불평등 감축을 함께 달성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과 녹색사회로의 적응을 함께 추진하는 ‘이중감축과 이중적응’을 강조한다. 기후위기가 함의하는 정치적, 경제적, 계급적, 인구학적, 사회문화적 측면을 명확히 인식해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기후위기를 사람들 자신의 인권문제로 설정하는 것이 기후행동을 촉발하는 데에 효과가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기후위기가 인류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거대기업의 탄소기반 활동과 친탄소 정치권력을 ‘반인도적 범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재의 지질연대인 홀로세(Holocene)에서 새로이 인류세(Anthropocene)가 도래하면서 기후변화는 인류에 가해진 가장 극적인 위기가 되었다. 기후변화는 인간의 힘이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일으켜 초래된 인류의 위기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서 21세기 말까지 기온을 2도 상승 이내로 묶어두자는 목표를 세웠고, 가능하면 1.5도 이내로 억제하기로 결의했다. 1.5도와 2도의 차이는 건강, 생계, 식량안보, 물 부족, 인간안보, 경제상황 등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기후위기는 78억 인류에게 각각 78억 가지의 현존의 상실과 실존적 위기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인간적 차원’의 문제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문제로 인식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금은 ‘사회학적 상상력’(Mills, 1959)이 절실한 때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자연과학적 시선으로만 본다면, 탄소배출 수치 자체를 줄이는 데에 집중하는 동안 왜 온실가스가 계속 배출되는지 그 이유는 사라지고 결과만 통제하면 된다는 발상에 빠지게 된다.
온실가스가 계속 배출․누적되는 메커니즘을 사회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보면 결국 두 차원의 사회적 인프라 때문이다. 그 하나는 도로, 빌딩, 항만, 발전소 등 자본집약적 투입이 높은 ‘경성 인프라’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구조화된 ‘연성인프라’ 때문이다. 사람들의 지식과 태도, 세계관, 문화, 사회제도와 거버넌스 구조가 모두 연성인프라에 속한다. 결국 오늘의 기후위기는 화석에너지로 돌아가는 경성인프라와 소비지상주의의 연성인프라가 지속적으로 ‘상호강화 순환’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후변화가 위기로 더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먼저 화석에너지로 돌아가는 경성인프라를 재생에너지 인프라로 전환해야 한다. 동시에 소비지상주의적 연성인프라를 불평등 완화와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인프라로 대체해야 한다. 마침내 위의 두 인프라가 합쳐져 ‘상호억제 순환’고리를 형성할 때에 위기가 점차로 완화․해소될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법론은 국가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지구적 세계주의를 요하는 문제다. 국가별 경쟁프레임을 넘어 글로벌한 정치공동체의 시각, 공동체적 연대와 지혜, 장기적 비전에 터한 도덕적 행동이 하나로 엮어져야 한다. 게다가 우리에게 기후위기는 역설로 가득 찬 위기이기에 난제 중의 난제다.
그 역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선진국 대(對) 개도국 혹은 후진국 간의 역설이다. 온실가스 배출 책임이 가장적은 나라 사람들이 가장먼저 큰 피해를 당하기 쉽다는 현실적 역설이다.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소득하위 이구 절반의 배출량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기후위기를 불러온 책임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알고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문제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이른바 ‘심리적 기후 역설’ 또한 문제다. 기후변화는 장기적 문제여서 그 위기가 아무리 심각하다해도 그저 손 놓고 있기 십상이다. 하지만 문제가 눈앞에 닥치고 상황이 나빠져 어떻게든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면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이른바 티핑 포인트를 확실히 넘어서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결국 기후위기의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기후위기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복합적 문제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고탄소 자본주의가 가장 유력한 책임당사자다. 해서 인류세는 곧 ‘자본세’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은 상상해도 자본주의 종말은 상상하지 못한다.”(F. Jameson)는 말이 있다. 그만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삶이 우리에게 내면화된 게다.
코로나 환란 이후 사람들은 언필칭 ‘대전환’을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자는 건가? 이제 기후위기는 인류에게 ‘실존적 리스크’가 되었다. 옥스퍼드대학 닉 보스트름(N. Bostrom, 2013)은 “실존적 리스크는 지구에서 생존해 온 지성적 생명체에게 때 아닌 멸종을 위협하거나, 그 생명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잠재성을 영구적이고 급격하게 파멸 시킬 수 있는 리스크”라고 했다. 이른바 정상적인 삶의 양식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 성장과 발전의 잠재성이 사라지는 상황, 문제들이 일시에 터져 사회혼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에게 ‘전환’의 목표 혹은 그 방향은 인류의 지속불가능성을 해체하는 것, 이른바 지속가능성을 복원하는 일이다. 조효제는 『탄소사회의 종말』에서 전환을 위한 방법적 대안으로 생태공화주의 관점 정립하기, 언론-미디어의 선도적 역할, 사회적 동력을 확보하는 것, 젠더 주류화를 실행하기, 새로운 인권담론 설정하기, 그리고 민주주의를 재발견하는 것 등을 들고 있다.
필자는 전환을 위한 동력으로 특히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자라는 세대의 기후교육을 통해 그것이 기후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제 학교교육과정에서 기후교육을 체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나아가 기후위기를 모든 시민을 위한 평생교육과정으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기후위기를 인권차원에서 불가양도의 문제로 설정하는 도덕적 각성이다.
우리는 생태계의 순환과 사회경제체제의 순환이 맞물려 돌아가는 ‘공동진화’의 순환체계에 살고 있다. 기후위기 앞에 인간만의 인권은 의미가 없다. 인류세에서 인류문명은 생태적 문명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 조효제는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공동피해-공동권리-공동이익-단독의무’라는 인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노예제 폐지, 여성참정권, 반전운동 등은 도덕적인 핵심의제로 그 변화를 추구했기에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의 미래를 훔치고 심지어 공멸을 자초하면서까지 경제적․정치사회적 이득을 취하는 것은 극히 부도덕한 행위다. 우리에게 기후대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기후위기는 우리들에게 어느 때보다 가진 자의 고귀한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지금 인류는 공멸이냐 생존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생태발자국(www.footprintnetwork.org)을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