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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는 농인의 생존권

평촌0505 2021. 1. 6. 11:35

  본래 농인의 모국어는 눈으로 보는 언어, 즉 수어다. 그럼에도 농교육 현장에서는 왜 ‘청각구화법’을 여전히 선호하고 있을까? 아마도 ‘정상화’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일 게다. 한 사람의 농아동이 999명의 청아동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청각구화법’ 우선주의가 불가피하다는 게다. 1 대(對 ) 999 라는 심각한 비대칭에서 1은 999에 포함됨으로써, 1,000 이라는 합산에 기여하는 게 극히 당연하다는 게다. 이른바 ‘정상화’(normalization)의 논리다.

듣지 못함은 결코 치료하고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님에도 이과 의사들은 난청을 ‘환자’로 지칭한다. 청각장애의 진단과 발견이 병원검사에 의해 확인되니 그냥 ‘청각장애=질병’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농인은 듣지 못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잘 보는 사람이어서 시각언어인 수어를 모어처럼 사용하는 소수언어/문화 집단일 뿐이다. 해서 농인사회에서 농(deafness)은 결코 장애(disability)가 아니라는 걸 강변한다.

 

최근 <수어로 키우고 싶어>(다마다 사토미, 최영란 옮김, 2020)라는 책을 감수한 곽정란 박사가 이 책을 내게 보내왔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농교육에서 ‘청각구화법’을 강조하는 나라이다. 농아동을 가진 청인부모가 어렵게 맘을 내어 공식적으로 수어를 사용하면서 일본어를 읽고 쓰게 하는 그런 농학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 눈물 나는 노력을 해온 이야기가 이 책의 줄거리다. 그래도 이런 깨인 부모가 있어 농아이가 당당히 자기를 실현하는 기회를 안겨준 게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농학교마다 유치부와 초등저학년에서는 청각구화법을 위주로 하지만 그 뒤(중고등부)에는 구릉이 담 넘듯 슬그머니 수어위주로 넘어간다.

 

농인계에서는 한국 농교육 100년은 실패한 교육이라고 했다. 나는 <데프(Deaf) 미디어>에서 제작한『한국농역사』의 <교육편>과 <인권편>을 보고, 농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농교육 100년, 우리는 실패했습니다”는 표제 앞에 밀려오는 자괴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누구를 위한 농교육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한국 농교육은 재구조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수의 청세계를 기준으로 더 이상 농세계를 희생의 제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농인 스스로 목적의 왕국에서 그들의 실존적 삶을 향유할 수 있게 당당히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그 길을 지속적으로 닦는 과정에 농교육의 자기 정체성이 정립되게 해야 한다. 지식정보사회에서 농인들이 청인들과 함께 진정 통합된 삶을 향유하려면, 농인들도 청인과 같은 수준에서 읽고 쓰는 문해능력이 획득되어야 한다. 오늘 날 농교육의 실패는 바로 농학생들에 대한 문해능력의 실패다. 달리 말하면 학교에서 농교육의 실패는 곧 교과교육의 실패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농학생들은 교과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 도구인 읽고 쓰기 능력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눈덩이처럼 지체현상을 수반한다.

 

구어든 수어든 언어양식에 관계없이 1차 언어가 안정되게 획득되어야 2차 언어로서 읽고 쓰기가 안정되게 획득된다. 농아동의 99%는 청인부모이기에 그들은 1차 언어로서 수어를 안정되게 획득할 기회(환경)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학령기 즈음에 2차 언어로서 읽고 쓰기 능력이 더욱 부실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을 안고 농교육 현실은 그냥 겉돌아가고 있는 게다. 실패의 근본 이유를 알면 그에 따른 구조적 변화가 응당 일어나야 한다. 그런 변화가 체계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니, 우리의 농교육은 그냥 실패를 되풀이할 뿐이다.

 

혹자는 인공와우이식수술(CI)에 의한 청각재활을 높이 평가한다. CI가 기술공학적 측면에서 청각활용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농세계에서는 그에 따른 농정체성 혼란을 크게 우려한다. 농아동에게 언어선택권은 도도(both & and)의 열림이지 냐냐(or & either)의 닫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