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평촌0505 2021. 1. 22. 17:20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성철 스님은 불교 가르침의 본질은 결국 이 '중도'로 귀결된다고 했다. 불학에서는 '중도'를 '쌍차쌍조'(雙遮雙照)라 했다. '중도'는 양변 혹은 양극단을 버리되, 양변을 되비추어 융합하는 것이랬다. 양쪽 극단을 버리면서 동시에 양변을 융합․회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양변을 버리면서 동시에 양변을 회통해 융합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랬다. 이른바 '차조불이'(遮照不二)라는 게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이것은 헤겔의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철학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으로 나아가는 직선적 발전론이다. 하지만 불학에서 말하는 ‘중도’는 선과 악 혹은 정과 반의 이분법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이 둘을 회통․융합하는 화쟁(和諍)의 길이다.

 

양변을 버린다는 것은 양극단의 부정이고, 양쪽을 비춘다는 것은 양쪽 모두 수용한다는 양긍정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남북분단에 대해 둘 다 틀렸다고 양부정할 수 있고, 둘 다 맞다고 양긍정 할 수도 있다. 박성배 교수는 원효의 화쟁(和諍)론에 비추어, 양긍정과 양부정은 오직 ‘눈 뜬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눈 뜬 사람이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미래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아는 사람이라는 게다. 이런 눈 뜬 사람만이 양부정과 양긍정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고, 마침내 무애(無碍)의 길을 실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차조불이’(遮照不二)다. ‘중도’는 결코 절충이 아니다.

 

 ‘중도’의 원리와 뗄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그물망처럼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연기’(緣起)의 원리다.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네가 넘어지면 나도 넘어진다는 게다. ‘중도’가 실천의 진리라면, ‘연기’는 존재의 진리다. 도법 스님은 『붓다, 중도로 살다』(20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정신으로 보리수 아래에서 붓다가 지금 여기 직면하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사유할 때, 자신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무수한 전제들, 즉 선입견과 고정관념, 편견과 두려움 등의 어두움이 걷히며, 두 번째 깨달음인 연기의 앎이 생겨났습니다. 자신의 참모습이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기의 얽힘(진리)로 이루어진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이라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는 그 어떤 것도 분리 독립, 고정불변한 것이 없습니다. 굳이 언어로 표현한다면 고정불변한 것이 없음을 뜻하는 무상(無常), 분리 독립된 것이 없음을 뜻하는 무아(無我)가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도법, 2020, pp.129-130).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해서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다. 이처럼 모든 게 ‘무상’(無常)이기에,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나에 대한 아상(我相)을 버리라는 게다. 내가 보기에는 실천과 판단의 기준으로서 ‘중도’와 존재의 진리로서 ‘연기’를 하나로 묶은 것이 ‘일원’(一圓) 혹은 ‘일심’(一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것은 말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언어도단’의 함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