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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과 삶의 완성

평촌0505 2021. 3. 13. 06:26

노인들이 농담조로 “제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고 한다. 그냥 웃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게 엄연한 현실로 다가온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102세인데도 아직 대중강의를 하고 언론의 인터뷰에도 응한다. 보기 드문 노익장의 과시다. 앞으로 100세 노인인구는 계속 늘어날 게다.

 

생애에 걸친 인간발달 8단계이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심리학자 에릭슨(E. H. Erikson; 1902-1994)은 <인생의 아홉 단계>(송제훈 옮김, 2019)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존의 여덟 단계에서 80-90대를 추가하여 확장된 발달단계를 제시한다. 그는 초고령 노인들의 정체성 위기를 논하면서도 ‘지혜와 삶의 완성’이라는 노년기 발달과업을 새로 추가했다. 에릭슨은 인간의 정신이 죽음을 맞기까지 계속 발달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삶 전체가 성장의 과정임을 밝히고자 했다. 이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기는 우리가 새로운 우아함으로 깨어 있음과 창의성을 유지하고 과거의 모든 경험을 모아 그 경험에 의지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노인들에게는 꺽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변치 않는 핵심’, 즉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된 ‘실존적 정체성’(essential identity)이라고 하자. 이 정체성은 자기를 초월하며 세대 간의 연결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인간의 조건에는 우리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점도 포함된다. 우리는 스스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살고 사랑하며 배우는 ‘어린 아이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이 책, pp.21-22).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경험이 풍부해지고 그런 만큼 지혜롭다. 노년기에 창의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노인에게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한 ‘실존적(본질적) 정체성’ 이라는 게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은 통합적이면서 완전성을 유지하기에 자기를 초월하면서 세대 간의 연결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기 위해 노인은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며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는 길’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질환 전문의들은 노인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상태를 ‘노년의 초월’(gerotranscendence)이라 했다. 그들은 노년의 삶으로 접어드는 과정 자체에 초월을 향한 보편적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노년 초월은 물질적․이성적인 관점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할 줄 아는 지혜다. 여기 ‘초월’은 성숙과 지혜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의 마지막 단계다.

 

노인학(gerontology)에 의하면, 초월한 개인은 우주정신과 보편적으로 교감하는 그런 감정을 경험한다. 이 경험은 시간․공간, 삶과 죽음에 대한 재정의이자 자신에 대한 재정의다. 초월한 개인은 물질적 관심이 줄어들고 홀로 ‘명상’하는 욕구를 더 많이 가진다. 초월한 개인들의 경험은 (1) 우주정신과 교감하는 그런 감정을 수반하며, (2) 시간 범위는 기껏 한 주 정도 뒤로 제한되어 있고, (3) 공간은 그들의 신체적 능력 범위내로 서서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늙는다는 것은 회상 속에 떠올리는 긴 생애에 대한 풍부한 피드백을 선물 받는다. 늙으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고 이야기꾼이 된다. 그들에게 인생은 프로젝트라기보다 하나의 이야기다. 에릭슨은 생의 마지막 제9단계에서 노인의 삶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위해서는 소유물, 특히 필요한 짐의 무게를 가능하면 가볍게 해야 한다.

 

등짐을 진채로 가파른 길을 오르는 노인에게 자율성(자기결정)과 의지력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는다. 그 걸음마다에 노인의 ‘지혜와 삶의 완성'이 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