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종교와 교육의 만남으로서의 '중용'

평촌0505 2011. 8. 8. 14:11

종교와 교육의 만남으로서의 「중용」(中庸)

 

  교육의 궁극은 종교와 만나게 되어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으뜸 되는 가르침이 종교이고, 가르쳐 길러내는 것이 교육이다. 이를테면 종교는 가르침의 궁극이고 교육은 그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교육이 본질적으로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는 「중용」(中庸)에 잘 반영되어 있다. 「중용」 첫 장의 머리에 나오는 세 문장은 그 함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즉, 하늘이 명하는 것이 이른바 성(性)이고, 그 성(性)에 따르는 것이 이른바 도(道)이고, 그 도(道)를 닦는 것이 이른바 교(敎)이다. 여기서 키워드가 되는 주제는 性-道-敎다. 이 性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인간에게 품부(稟賦)된 본래성(本來性)이다. 이 (本來)性은 자연성과 도덕성을 아우르는 것이기에, 이 性에 따르는 것이 곧 道이다. 이 道는 인간이면 마땅히 따라야 할 길(導)로서의 道이기에, 끊임없이 이 道를 닦는 과정이 교육이다. 이 性과 敎의 중간에 道가 있어, 道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성과 의도적 노력이 가해져야 할 인위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이다.

 

  여기서 ‘性’과 ‘道’와 ‘敎’는 각각의 개념적 정의를 가지는 것이지만, 하나의 총체적 연관구조 속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제1 명제의 ‘天命之謂性’에서 ‘天’이라는 개념에는 주재적(主宰的)․이법적(理法的)․물질적(物質的)․형체적(形體的)․운명적(運命的)․자연적(自然的)․의리적(義理的)․도덕적(道德的)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도올 김용옥(2011)은 해석했다. 이 때 하늘의 명령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물질까지 포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중층적 의미구조로 규정되는 ‘天’이 명령한다고 할 때, 그 하늘의 명령은 영원한 현재형이다. 따라서 하늘이 명령하는 ‘性’은 그 본질적 성격상 일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형성중인 과정(process)이라는 것이다. 해서 그 ‘性’은 고착적 존재(being)가 아니라 창진적 생성(becoming)이다(김용옥, 2011, p.209). 때문에 이 성(性)은 교육의 본질이자 교육이 지향해야 할 궁극목적이다.

 

  한편, 김충열(2007) 교수에 의하면 공자가 스스로 ‘지천명’(知天命)을 밝힌 후 이 天을 성명(性命)의 天으로 규정하여 도덕적 심성의 궁극 근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50세 이후 ‘지천명’을 깨달은 후로는 천도(天道)와 성명(性命)이 횡적관계에서 종적관계로 정립된 것으로 본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중용」첫머리에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커다랗게 내 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공자의 만년사상을 계승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김충열, 2007, p.128). 송대에 신유학을 정립한 주희(朱熹)는 天命之謂性의 성(性)을 리(理)로 보아(性卽理),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다. 그러나 「중용」첫머리의 성(性)은 순선무악한 완전선(完全善)으로서의 리(理)라기보다 하늘이 인간에게 품부한 선단(善端)을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할 수행(修行)의 과제이다. 그래서 도올(2011)은 성(性)의 생성성(生成性)을 강조하면서, 성인(聖人)의 존재이유가 바로 성(性)을 화(化)하기 위함이라고 했다(故聖人化性而起僞).

 

  성(性)을 이렇게 볼 때 「중용」첫 머리의 제2주제에서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솔’(率)은 그냥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지향하여 계발해야 할 길일 뿐더러 성인(聖人)이 제정해 놓은 교육과정에 따라 학습하고 수행(修行)해야 하는 도(道)의 길이다. 따라서 김충열(2007) 교수는 성(性)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솔성(率性)에서 솔(率)의 해석이 달라진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뒤이어 오는 ‘도’(道)에 대한 개념 규정도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여기서의 ‘도’(道)는 천도(天道)나 객관적 법칙으로 자연 본래의 ‘도’(道)가 아니라, 인간 특히 성인(聖人)이 만든 교화에의 길로서 도(道)이다. 김용옥 교수가 「중용」첫 장에 나오는 도(道)를 성(性)과 교(敎) 사이의 가교로 본 것은 기발한 생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충열 교수는 “자연에서 문명으로 가는 다리(길)가 도(道)”라고 했다. 때문에 「중용」에 의하면, 도(道)는 인간 교육이 지향해야 할 궁극목적이자 도달점이다.

 

  이 도(道)의 길을 넓히고 튼튼히 닦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이 도를 닦는 것(修道)이 곧 교육이라 했다. 김충열(2007) 교수는 유교가 그의 마지막 성패를 교육에 건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도올 김용옥(2011)은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에서 교육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수’(修)하지 않아도 되는 ‘도’(道)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道)는 영원히 ‘수도’(修道)의 대상이다. 이 ‘수도’(修道)를 ‘교’(敎)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을 현재 우리가 교육(education)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확고하게 자연의 영역이 아닌 문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본능(nature)의 영역이 아닌 양육(nurture)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무위의 영역이 아닌 유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김용옥, 2011, p.226).

 

  위에서 김충열 교수는 “유교는 그의 마지막 성패를 교육에 걸었다”고 함축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에, 도올 김용옥은 「중용」첫 장의 性-道-敎라는 전체 연관적 맥락에 비추어 교육을 너무 좁게 해석한 감이 없지 않다. 더욱이나 敎에서 연역되는 性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교육은 결코 본능의 영역이 아닌 양육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무위의 영역이 아닌 유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당위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교육은 본능과 양육, 무위와 유위, 존재와 당위를 아우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본능에 기반한 양육, 무위에 의한 유의, 존재에 터한 당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도올은 「중용」첫 장의 性-道-敎에서 연역되는 교육을 편협되게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교육에 대한 이런 오해를 차단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이홍우(2000) 교수는 性-道-敎의 연관성을 敎-道-性으로 뒤집어 반대 방향으로 읽을 것을 제의한다. 즉, “敎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敎의 내용으로 들어와 있는 道가 추론되며, 이것으로부터 다시 道에 의하여 가시화되는 性이 추론되며, 그 性은 ‘하늘의 명령’이라는”(이홍우, 2000, p.29) 것이다. 이처럼 敎를 하늘의 명령인 性에 연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敎의 근거를 性에서 찾는 것은 인간이 敎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꾸는 불상사를 막는 데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육에 담겨진 원래의 의미를 올바르게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이홍우(2000)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 태고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이 교육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 하늘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사사로운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재의 교육에서 전수되는 내용은 하늘의 명령이 절대적인 것만큼이나 절대적인 것이다. 교육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을 이해하고 그 원래의 의미를 올바르게 살려내는 것뿐이다(이홍우, 2000, p.30).

 

  이홍우 교수의 교육학에 대한 지적 관심사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교육에서 전수되는 내용이 하늘의 절대적 명령이라는 그 원래의 의미를 올바르게 살려낸다는 것은 교육과정, 즉 교과를 교과답게 다루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에서 ‘수도’(修道)는 현대 교육학의 용어로 ‘교육과정의 계획과 운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道)를 교육내용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여기서는 도대체 ‘하늘의 명령’ 이 어째서 교육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가를 「중용」의 내용에 비추어 검토하기로 하자. 「중용」제21장은 첫 장에서 언급한 性과 敎의 관련을 誠과 明으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誠을 출발점으로 하여 明을 생각하는 것이 性이며, 明을 출발점으로 하여 誠을 생각하는 것이 敎이다.)

본체적인 성(誠)으로부터 인간이 ‘밝음’(明)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성(性)이라고 하여, 우리의 본성(nature)은 천지의 誠으로부터 밝음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올(2011)은 “현실적 인간 그 자체가 절대정신의 구현체이므로 그 현실적 인간의 긍정을 통하여 천지의 절대정신인 誠에 도달하고, 明에서 誠으로 끊임없이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 교육”(김용옥, 2011. p.536)이라고 했다. 한편, 이홍우(2000)는 여기서 誠은 교육의 과정 또는 교육을 받는 동안 인간의 태도를 염두에 두고 性을 특징짓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 誠이 性을 특징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誠은 의미상 性과 다름이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성(誠)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솔성’(率性)하고 ‘진성’(盡性)한 사람의 성(誠)이기도 하다(김충열, 2007). 그래서 誠은 性과 마찬가지로 중층의 위층에 비유되는 ‘표현되기 이전의 표준’ 또는 ‘미발(未發)의 표준’을 가리키는 것(이홍우, 2000)이다. 따라서 「중용」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은 구체적인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 관념상(이상적)으로 존재하는 완전무결한 인간을 지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과 성인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늘은 바로 성인의 경지이고 성인은 하늘의 의인화(擬人化)이다.”(이홍우, 2000, p.32). 「중용」제20장은 바로 이점을 직접 시사한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즉, 誠 자체는 하늘의 道이고 ‘誠으로 되는 것’은 사람의 道이다. 이어 ‘誠으로 되는 것’(誠之者)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려내어 시종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했다. 따라서 誠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구현이며, 그 완전무결한 구현은 성인(聖人)에게만 가능하다. 이어 「중용」에서는 誠을 구현하는 길로서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을 제시하고 있다. 즉,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깊이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며,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성(誠)과 학(學)으로 이어지는 부단한 노력을 「중용」은 강조하고 있다.

 

  이어 제22장부터 「중용」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지성’(至誠)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중용」에서 ‘지성’(至誠)은 곧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일컫는다. 주희는 천하의 지성(至誠)이란 성인(聖人)의 성덕(性德)을 현현(顯現)한 것으로 천하에 더할 것이 없다고 했으며, 김충열(2007)은 ‘지성’(至誠)은 하늘이 품부한 성명(性命)에 따라 학(學), 문(問), 사(思), 변(辨), 행(行)으로 이어지는 자기계발을 성취한 상태 혹은 과정이라 했다.

 

  마침내 「중용」24장에서는 ‘지성여신’(至誠如神)이라 하여, 지성(至誠)은 그 영명(靈明)함이 신(神)과 같아 신통력을 지닌다고 했다. 김충열(2007) 교수는 「중용」의 ‘지성여신’(至誠如神)을 이렇게 논평한다.

 

  이 세계는 생기 있고 신령한 세상이지 싸늘한 기계와 수리의 세계가 아니다. 지성(至誠)하면 신통한다는 것은 결코 미신이 아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이러한 천(天)이 준 본능적 감통력(感通力)을 모두 가지고 있다. 생기(生氣)와 생명이 있는 모든 자는 이 신비스런 영감이 있기에 생(生)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김충열, 2007, p.230).

 

  이처럼「중용」의 지성(至誠)은 신비스런 영감(靈感)의 세계와 맛 닿으면서 교육과 종교를 하나로 아우른다. 이어 「중용」26장에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 하여 한 순간도 쉼이 없는 ‘지성’(至誠)의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지성(至誠)을 誠되게(誠之) 하는 과정으로서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교육이 도출된다. 김충열(2007) 교수는 중용강의를 마치면서 “종교로서 유교교리의 핵심은 성(誠)이다.”고 정리했다.

 

  유교가 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제 부질없는 질문에 해당된다. 그것은 마치 교육이 종교와 만날 수 있는가를 회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국의 라이용하이 교수는 「불교와 유학」(김진무 옮김, 1999)에서 「중용」에서 강조하여 마지않는 ‘신독’(愼獨) 수양설은 종교론과 유가론의 종합이며, 더 정확하게는 일종의 불교화된 윤리철학이라고 했다. 우리는「중용」의 가르침으로부터 종교와 교육의 만남(合一)을 확인하게 되고, 그 내적 연관성에 따라서 특수교육도 교육인 한에는 심층종교를 내면화하는 교육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김병하(2011.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