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에는 그 길이, 깊이, 그리고 넓이가 각각 다르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고, 여러 분야에서 사람들과 폭 넓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삶의 길이-넓이-깊이에서 특히, 그 ‘깊이’가 가장 소중하다고 본다. 어째서인가? 인생 후반기에 나이 들수록 삶의 넓이와 길이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특히 노년의 삶에서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누구도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끝은 엄중하고 확실하다.
에릭슨은 생애에 걸친 8단계이론에서 초고령(80-90대)을 추가하여 인생의 아홉 단계를 ‘지혜와 삶의 완성’으로 설정하였다. 나이가 들면 경험이 풍부해지는 만큼 누구나 지혜로워진다. 에릭슨은 “노인에게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한 실존적 정체성이 확고히 뿌리내리기 때문”에 통합적이면서 자기초월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게다. 내가 보기에 그 가능성이 곧 노년에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깊이가 반드시 나이에 따라 심화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와 수운은 삼십대 초반에 삶을 마감하고도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삶의 깊이와 완결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해서 그들은 성자로 일컬어진다. 우리도 성자처럼 하느님의 속성을 씨앗처럼 내장하고 있다. 다만 그 씨앗이 싹을 키워 열매를 맺는 그런 내면의 지혜가 발현되느냐가 문제다.
지금은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 이른바 100세 시대다. 아닌 게 아니라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102세인데도 대중강연과 언론 인터뷰에 응하여 노익장을 과시한다. 정신의학자 이시형 박사도 90줄에 여전히 ‘평생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과시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두 분 모두 대중적 관심과 인기에는 성공한 분들이지만, 심층적 삶의 깊이에서는 얼마나 후대에 영향을 줄지 잘 가늠이 되질 않는다. 자칫하면 넓이와 길이가 본의 아니게 깊이의 한계를 드러나게 할 수도 있다. 누구나 나이 들수록 그 소리가 그 소리라는 평을 듣지 않도록 자기관리를 엄격히 할 필요가 있다.
나 자신도 정년 무렵에 블로그(다움/티스토리, 김병하넷)를 개설해 약 10년 간 내가 쓴 크고 작은 글 230여 꼭지를 올려놓았다. 아직 그 누적 조회 수가 4만을 넘지 못하니 그 영향력은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 4만여 회에 이르는 조회가 퍽 소중하고 또 조심스럽기까지하다. 최근 약 4년 동안 서평과 사는 이야기 중심으로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글들이 약 40꼭지에 달한다. 많이 읽힌 칼럼은 약 1만회 이상에 이르지만 적은 것은 2〜3천대에 머문 경우도 있다. 나로서는 인터넷 매체의 시장성을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양보다도 질적인 면에서 얼마나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가 문제다.
나이 들수록 ‘삶의 깊이’ 문제를 되짚어 본다는 건 여러모로 유익한 일이다. 우선 내면적인 자기관리를 위해 스스로를 성찰하는 만큼 나이와 함께 지속적 성장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부단히 성찰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자기관리를 위해 노력하는 만큼 노년에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이게 될 터이다. 그냥 자기 편한 데로 처신하다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부담주기 일수다. 그래서 내 딴에는 정년 후에 제자들에게 부담주지 않는 교수로 남고자 노력하는 데, 막상 어떻게 비치는지 잘 모르겠다.
근데 정년 후에 나랑 가장 가까운 마누라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지 않는 남편인가를 스스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좀 찜찜하다. 집사람은 내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생활사를 비롯해 집안일에는 무심한 편이라고 역정을 낸다. 평생 교수노릇하면서 살아온 터여서 그 땟물을 말끔히 벗겨내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그래도 내 딴에는 집에서 부담되지 않은 존재로 살고자 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는 등 노력하는 편인데도, 아직 집사람의 기준에는 못 미치는가보다. 자잘한 집안 일이 생각보다 많은건 사실이다. 가사노동의 가치는 생각보다 크고 중요하다.
굳이 변명을 한다면 내가 현실 생활사에 좀 무심한 것은 내 삶의 깊이를 나름 유지하자니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불가에서는 여래의 씨앗을 키워내는 수행의 요체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말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멈춤’과 지혜를 발휘(본질의 성찰)하는 ‘살핌’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 수행의 진수다. 밖으로 치닫는 '탐진치' 삼독(욕망)을 멈추고, 안으로 마음을 챙기는 '계정혜'의 수행을 유지하는 데서 삶의 깊이가 관리될 게다. 우리에게 삶은 끝없는 수행의 과정이다.
삶의 깊이에는 그 한계가 없다. 다만 그렇게 살고자 지극정성(至誠)을 다 할 뿐이다. 해서 <중용>에는 ‘지성무식’(至誠無息)이랬다. 깨어서 쉼이 없는 게 정신적 성장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