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아내가 병원에 갈 일이 있어 내가 운전해 함께 갔다. 근데 병원에서 아내가 걷기가 힘들어 휠체어를 타야겠다고 한다. 그러자고 하면서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내가 뒤에서 밀고 갔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휠체어를 밀고 가는 중에 내 가슴이 철렁한다. 아!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구나. 나이 들면 언제 휠체어에 몸을 맡겨야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건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한 장점이다. 사람이 감옥에 갇힌다는 건 자유롭게 걸어 다닐 권리를 제약받는다는 게다. 어쩌다 장거리 비행기 여행을 할라치면 의자에 틀어박혀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없다는 게 가장 부담스럽다. 해서 나는 화장실 가는 길에 비행기 뒤편에 한참 서 있다가 자리로 돌아온다. 허리를 펴고 서 있다가 자리에 다시 앉으면 훨씬 편하고, 운이 좋으면 그대로 잠들 수도 있다.
걷는 다는 건 곧 삶의 원초적 자유다. 정년 후에 나는 햇살 좋은날 산책하기를 즐긴다. 산책은 혼자 하는 게 좋다. 그 이유는 혼자라야 몸과 마음이 자유롭다. 산책 코스와 속도를 그냥 내가 정하면 된다. 그리고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좋다. 산책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집에 와서 즉각 자판기를 두드린다. 요즘은 아예 산책 중에 메모할 수첩을 들고 나가기도 한다. 트르비에르 에켈룬은 『두 발의 고독』(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숲으로 난 오솔길도 걷고 시내의 인도 위도 걸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생각을 수첩에 기록한 다음에 계속 길을 간다.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길을 가다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메모하지 않는다면, 그 생각은 금방 까먹기 마련이며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생각은 소파에 앉아서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은 길을 걸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다. 걷는 것과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인간 활동 사이에 마치 어떤 신비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김병순 옮김, 2021, p.270).
의자의 배신이라는 말이 있다. 의자에 앉아서 계속 일하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게다. 그래도 소설가 황석영은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엉덩이를 붙이고 끈질기게 앉아서 글 쓰는 습관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나이 들면서 글도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쓰는 게 좋다. 바쁠 게 없으니까 그렇다. 기간에 쫓겨 쓰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리듬에 맞춰 하는 게 좋다.
근데, 다음 주에 병원 가면 집사람이 또 휠체어를 타야 할까? 가능하면 천천히 걸어서 진료 받기를 바란다. 휠체어를 탄 당사자도 그렇지만 뒤에서 밀고 가는 내 맘도 영 편치를 않다. 집사람이 병원에서 휠체어 타지 않기를 고대한다. 나이 들면 두 발로 걷는 게 자립의 푯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