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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법칙

평촌0505 2021. 9. 11. 11:19

종교학과 죽음학의 권위자인 최준식 교수가 최근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카르마 강의』(2021)를 냈다. 나는 최준식 교수의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2015)를 읽고 ‘죽음학’에 대해 나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연장에서 이번에 나온 <카르마 강의>도 인상 깊게 읽었다. 카르마는 불교용어인 데, 한자로는 ‘업’(業)이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인간이 지은 ‘카르마’(업)와 그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카르마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르마 법칙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숙제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게다. 이것은 일종의 천명(天命)과 같은 것이어서 어길 수 없는 과제다. 하지만 이 카르마 법칙은 결코 징벌을 주는 법칙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그가 쌓은 수많은 카르마를 소멸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함이다. 해서 우리는 카르마 법칙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아야 한다. 나의 카르마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인연은 누구인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지금까지 내게 일어난 사건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진지하게 자가 조사(진단)를 해 보란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인연은 누구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인연은 우선 부모님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 은덕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게 깊은 은덕을 베푸셨지만, 정서적으로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훨씬 진하게 남아 있다. 내가 그 당시에 대학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골에서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의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정이 많으신 분이었고 언제나 내편이셨다. 막내인 나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부모님과 인연이 원초적이라면 내가 결혼해 지금까지 가정을 일구어온 과정을 생각하면 아내와의 인연은 일차적이고, 그 인연으로 자식과의 인연이 파생되어 나온 게다. 내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모두 나와는 소중한 인연이다. 가족과의 인연은 내가 죽을 때까지 일차적 관계로 그냥 쭉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집사람을 만난 것은 50년이 되었지만 결혼한 것은 48년이다. 2023년 4월 13일은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이 들어 노년에는 누구도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

 

아직은 두 사람 모두 특별한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리고 아들(태균)과 딸(태영) 모두 자기 앞 가름은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손녀(지현)는 지금 고1이니 아마 대학에 들어가면 어차피 자립해 나갈 게다. 모두 나와는 소중한 인연이다. 가족은 하나의 사랑공동체다. 일차적으로 내 책임이 크다. 남편노릇, 아버지 노릇, 할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해내야 가정이 화목하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랬다. 나를 위하고 가족을 위하는 길이 우선이다. 그리고 가족 간에도 존엄으로서 자유․자립․자율이 상호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친구관계가 좀 소극적이어서 그리 깊지도 않고 넓지도 못하다. 어릴 적부터 고향 친구는 벌써 고인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도 고향친구 가운데 몇 사람은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중학교 때 친구는 거의 서로 연락이 없으나, 원주에 있는 작가친구(박도)와는 계속 연(緣)이 이어지고 있다. 고등학교 친구 두 명(강상중, 조현준)과는 겨우 우정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냥 안부만 묻고, 의례적으로 언제 한 번 만나자고 한다(그나마 몇 년 전에 모처럼 세 사람이 만나긴 했다). 내게는 학형이면서 친구라 할 수 있는 김민남 교수와는 이래저래 끈질기게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원 선배이면서 함께 세미나도 하고 내게 집사람도 소개해주었다. 정년 후에도 <지식과세상> 사회적협동조합에서 함께 일하고 공부한다. 김민남(金敏男) 학형은 이제 80줄에 접어들었고 건강도 좋지 않지만, <지식과세상> 이사장을 맡아 시민사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나와는 그간 53년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내게 영향을 준 은사(恩師)는 주로 대학시절의 은사들이다. 한국사회사업대학 학장이자 대구대 초대총장인 이태영(李泰榮; 1928-1995) 선생님은 학부시절 나의 은사이자 결혼 주례도 해 주었고, 내가 평생 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일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학부 때부터 「특수교육원리」와 「특수교육행정」강의를 직접 들었다. 졸업하고 선생님의 『특수교육개론』증보판 교정을 본 기억이 있고, 총장으로 업무가 바쁜 때에 외부 세미나 발표 원고작성을 도와 드리곤 했다. 1978년 여름에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혼자 특수교육연수를 하고 있을 때에 일부러 격려차 찾아오셔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추억이 있다.

대학시절 은사로 안태윤 교수님과 서석달 교수님이 기억에 남지만,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었다. 김정권(金正權) 교수님은 학부시절 은사이면서 대구대 특수교육과에서 교수로 함께 30년가량 일했으며, 정년 후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과 만난 인연은 금년에 57년째로 이어지고 있다.

 

제자들과의 인연은 주로 내가 박사과정에서 지도한 사람들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의 수제자인 강창욱 교수는 지난 2월에 강남대 특수교육과를 정년하고 지금은 특임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강 교수는 대학원 석․박사과정 공부 할 때에 내리 7년이나 내 연구실에서 함께 일하고 공부했다. 그가 강남대학 특수교육과로 갈 때, 가족과 함께 대구를 떠나는 걸 보고 혼자 집에 와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내가 두 번째로 지도한 윤병천 교수(나사렛대)도 2022년 8월이면 정년이다. 강창욱 교수 정년 때는 함께 네팔을 다녀왔는데, 윤 교수의 경우 코로나 여파로 함께 해외여행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여행회비는 꾸준히 비축하고 있다).

이들 제자 중 김경진, 서영란, 곽정란, 이한선, 박경란, 백운찬, 송정희 등과는 꾸준히 이런저런 모습으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내 회갑축하연도 해주었고, 정년 때(2012.08)는 대구대에서 기념세미나도 했다. 그 때 나는 「심층종교와 특수교육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고, 강창욱 교수는 내가 낸 『특수교육담론․에세이』라는 책의 서평을 해주었다. 서평 말미에 강 교수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앞으로 이들 제자와 인연을 어찌 갈무리해 갈지는 일차적으로 내 책임이 크다. 길은 닦아야 길이 된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나는 40년간이나 교수노릇을 했다. 참 오래도 했지만,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다. 나는 학부학생들에게 정년기념 특강에서 “다시 태어나도 나는 교수를 하고 싶고, 가능하면 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다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교수가 아니었더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좀 아득하다. 도무지 다른 일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 스스로 자랑 할 만큼의 교수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냥 내가 진짜 좋아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대게 정년하면 시원섭섭하다고들 하는 데, 솔직히 나는 섭섭한 쪽이 많았다. 특히 연구실에 책을 뺄 때가 그랬다. 그러나 나는 금방 정년 후 나름의 내 리듬을 찾아 자유롭게 읽고 쓰는 일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집사람도 얄밉게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낸다고 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읽고 쓴다. 정년 무렵에 개설한 내 블로그(다음, 김병하넷)에 약 260여 꼭지의 크고 작은 글들이 올라 있다. 그리고 정년 후에도 책을 두 권 냈고, 논문도 5-6편 학술지에 발표했다. <오마이뉴스>에 서평 중심으로 칼럼도 약 30편 정도 송고했다. 그리고 2014년부터 <지식과세상>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한 게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찌 보면, 나는 좀 늦되는 사람이다. 어머니도 어릴 때 나를 보고 어리석고 천강스럽다고 했다. 나는 회갑이 지나고 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내 앞 가름하고 가정을 꾸려오는 데에 급급했다. 말하자면 60대에 겨우 정신적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고, 60대보다는 70대 후반인 지금이 정신적으로 여유롭고 좀 더 성숙했다는 느낌이다.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기능』에서 이성은 삶의 기능을 상승적으로 증진하는 것이랬다. 해서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뭔가 좋은 쪽으로 꾸준히 상승하는 것(to live - to live well - to live better)이랬다.

 

이 대목에서 나는 삶의 궁극 목적으로 영적(spiritual) 성장을 생각하게 된다. 카르마의 법칙은 곧 도덕법칙이다. 최준식 교수는 “카르마 법칙은 인간이 도덕적인 완성을 꾀할 수 있도록 돕는 법칙”이랬다. 인간은 가장 심층의 마음에 지선(至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데, 카르마 법칙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성품을 다시 찾을 수 있게끔 안내하는 법칙이라는 게다. 해서 카르마 법칙은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불철주야 작동하고 있단다.

 

지금 되짚어 보니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내가 어릴 적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이런저런 고비마다 내게 영매(靈媒) 역할을 해주신 걸 희미하게 느낀 다. 나는 어릴 적에 자연스럽게 우리네 토속적인 무속 혹은 무교의 영향 속에서 자랐다. 나의 심층 무의식 속에는 본성적으로 영성이 자리하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나의 영적 본성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올린 게 인연이 되어 불학에 관심을 가지던 터에 그 해 여름(2006.08) 우연히 『대승기신론통석』(이홍우, 2006)을 손에 들게 되었다. 그로부터 기신론에 빠져 나는 서점에 있는 기신론 책은 빠트리지 않고 모두 입수해 읽었다. 나는 기신론 공부를 통해 내속에 여래의 씨앗이 내장해 있음을 알게 되었고(일종의 解悟라고 할까), 그로부터 불학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이후로 『금강경』과 『반야심경』도 나름 열심히 읽었다. 특히 『금강경』은 <지식과세상>에서 원문으로 함께 윤독했다. 말하자면 그러는 동안 나름 ‘마음공부’ 공덕을 쌓아가기 시작한 게다.

 

기신론을 매개로 『중용』공부를 해보니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내게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 품부되어 있고, 이 성(性)자리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는 게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道)임을 알게 되었다. 이 길을 부단히 닦는 과정이 공부이자 수행(修行)이다. 솔성(率性)과 진성(盡性)의 과정을 내면화 하는 것이 곧 성(誠)의 자리다. 해서 『중용』은 이미 성(誠)해 있는 것은 하늘의 도(誠者, 天之道也)이고, 성(誠)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誠之者, 人之道也)이랬다. 이런 기반 위에서 노자가 말하는 ‘상도’(常道)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을 본받는 것임을 접하고 보니, 유불선 3도를 하나로 꿰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어느 정도 열리는 듯 했다.

 

마침내 나의 영적 성장은 유불선을 회통하고 기독교의 충격까지 흡수한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동학에 이르러 개화(開花)하게 된다. 나는 <지식과세상>에서 『동경대전』원문강독(2018. 가을)을 한 게 밑천이 되어 내친김에 「개벽의 한국특수교육론 정립」이라는 논문을 썼다. 그리고 최근에는 도올의 『동경대전1,2』역주(김용옥, 2021)를 통해 동학공부를 좀 더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나의 지적 관심은 동양사상 속에서 한국철학을 정립하는 데에 쏠린다. 이런 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공부이자 길이다.

 

내 생애에 일어난 중대한 일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게 영향을 미친 가장 중대한 일(사건)을 든다면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내가 6.25한국전쟁 때 피난을 갔다 와서 이듬해 늦봄(일곱 살 때)에 집에서 폭발물 사고로 내 오른 손가락 세 개를 절단한 일이다. 어머니가 마당에서 뽕잎을 따다가 쾅하는 소리에 건너 방에 와보니 내 온몸이 피투성이더란다. 나는 혼절했지만, 그나마 얼굴은 다치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왼손잡이가 되었고,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포켓 속에 넣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도 오른 손으로 연필을 쥐고 글씨를 썼고 분필도 오른 손으로 쥐고 교단에서 판서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서울서 철학과를 다니다가 포기하고 대구로 내려와 특수교육 쪽으로 바꾼 것도 어릴 적에 오른 손을 다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내 일생에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힘든 때가 서울서 철학과를 다닐 때였는데, 특수교육이 나를 살렸다. 대구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한 게 인연이 되어, 평생 나는 모교(대구대) 특수교육과에서 교수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니까 내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일 가운데, 다른 하나는 내가 철학과에서 특수교육 쪽으로 진로를 바꾼 일이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어릴 적에 내가 손을 다친 게 후에 내가 교수의 길로 가는 연(緣)으로 이어진 듯하다. 해서 내가 손을 다친 것도 나의 카르마이고, 그로인해 교수가 된 것도 어쩌면 내가 감당해야 할 카르마 법칙인 것 같다. 내 여생에서 이 두 가지 일이 엮어져 앞으로 영적 성장을 얼마나 하느냐가 남은 숙제다.

 

작년 언제 쯤 부터인가 나는 자고 일어나면 동녘을 향하여 동학의 본주문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를 암송하면서 나름 잠시 기도를 올린다. 이것은 하느님을 내 몸속에 모시고 그 조화를 자리 잡게 함으로써, 평생 잊지 않고 만사를 깨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자 자기고백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동학하기를 체화하는 사람이고자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이른바 다시 개벽의 삶이다. 카르마 법칙에 의하면, 인간이 이 지구상에 환생한 것은 빡센 지구학교에서 학습하기 위함이란다. 우리에게 삶은 빡센 공부의 과정이다. 내게 그 공부의 핵심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다. 결국 카르마 법칙은 우리들로 하여금 바로 이 ‘자리이타’의 길로 꾸준히 가라고 끊임없이 종용하고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리'이고 '이타'는 부차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다. 내과의사로서 죽음학을 연구한 정현채 교수는 “환생은 환상이 아니에요, 죽음 뒤에도 패자부활전이 있죠.”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