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전통적으로 귀신이라 했지만, 이즈음은 하느님으로 통한다. 수운 최제우의 <동경대전>에는 신을 상제, 천주, 귀신으로 다르게 표현했다. 여기 ‘상제’는 동양의 전통적 신을 반영하고, ‘천주’는 서양의 신을 반영하는 말로 이해된다. 수운은 사람들이 ‘천지’(天地)는 알아도 ‘귀신’(鬼神)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 귀신은 ‘자연의 이치’(自然之理)라 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영험한 생명력에 신이 내재한다는 일종의 범재신관(凡在神觀; panentheism)을 반영한다. 해서 ‘시천주’(侍天主), 즉 하느님을 내 몸속에 모시고 있다고 했다.
오강남은 <예수는 없다>(2017)에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관’이라 했다. 그는 초월만 강조하는 유신론이나 내재만 강조하는 범신론의 일방성을 극복하여 신의 초월성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관으로서 ‘범재신관’을 ‘자연주의적 유신관’(naturalistic theism) 혹은 '변증법적 유신관'이라 했다. 여기서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한다고 해서 반쯤은 초월적이고 반쯤은 내재적인 신을 생각하는 신관으로 오해해도 안 된다. 범재신관은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내재하는 신 특유의 변증법적 역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예수의 짤막한 어록으로 구성된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기적, 예언의 성취, 대속, 십자가, 부활, 종말, 심판, 재림과 같은 말이 전혀 나오질 않는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4복음서의 예수와는 달리,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런 깨침(gnosis)을 통하여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비밀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도마복음> 3장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다고 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이 대목에서 도올은 “천국(나라)은 천당이 아니요, 개별적 주체의 개벽이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는 분명 지혜로운 스승이었다. 도마복음서는 기독교적 종말론적 초대교회의 캐리그마 이전의 사태이다. 도올은 “예수는 자기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 선포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다”고 했다. 예수는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각케 만드는 지혜로운 스승일 뿐이라는 게다.
같은 맥락에서 <도마복음> 70장에는 “만약 너희가 너희 내면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산출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만약 너희가 그것을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너희가 너희 내면에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상태가 너희를 죽이리라.”고 했다. 하나님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랬다. 해서 나의 구원이든 나의 파멸이든 모두가 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게다.
도마복음서 말미(제113장)에서 다시 이르길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고 했다. 아버지의 나라(천국)은 내가 몸담은 여기 이 땅에 깔려 있다(내재함)는 게다. 도올은 “천국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랬다. 우리에게 천국의 실체화는 실천이성의 삶의 결단이자 과제상황이다. 그것은 자기혁명(의식혁명; Metanoia)을 통한 새로운 주체의 현현이다.
길희성은 <영적 휴머니즘>(2021)에서 코로나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 문명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 씨름해온 자신이 도착한 정착역이라 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연관지어 ‘자연적 초자연주의’(natural supernaturalism)라는 새로운 철학적․형이상학적 신관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신이 만물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초월하는 ‘포월적’(包越的) 실재로 보는 신관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여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는 휴머니즘이다. 이런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기독교, 유교 등 세계 주요 종교전통의 공통적 핵심이다. 길희성은 영적 휴머니즘이 세계의 주요 종교전통이 공유하고 있는 영적 인간관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종교전통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보는 종교 다원주의적 신학적 영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영적 휴머니즘은 하나의 종교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포용적이면서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이 되자는 것이랬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유학에서 말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떠올리게 된다. 이홍우는 <성리학의 교육이론>(2003)에서 ‘천인합일’의 아이디어는 교육의 이상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는 교육의 과정을 “마음의 핵심부를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다듬는 데에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으로 규정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교육의 목적을 “마음이 (中으로 특징 지워지는) 본래의 성(性)을 따르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여기서 마음이 본래의 성(性)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게 ‘천인합일’과 동일한 의미로 되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중용』 1장의 첫 구절을 그 원래의 의미대로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가 된다. 이홍우는 『중용』의 첫 구절을 정상적인 사고방식에 맞게 이해하자면 그것이 진술되어 있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즉, 교(敎)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교(敎)의 내용으로 들어와 있는 도(道)가 추론되며, 이것으로부터 다시 도(道)에 의하여 가시화되는 성(性)이 추론된다. 그리고 그 성(性)은 ‘하늘의 명령’(天命)이다.
이어 『중용』에서 “성(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며, 성(誠)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다. 성(誠)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가려내어 시종 그것에 헌신하는 것”(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中略) 誠之者 擇善而固執之也.)이랬다. 여기서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도(道‘)로서 천인합일을 완전무결하게 구현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인합일은 오직 관념상으로만 존재하는 성인(聖人)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유학에서 말하는 성인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므로, 보통의 범인에게도 성인이 나타내고 있는 천인합일의 이상이 다소간에는 실현되고 있다. 그 가능성을 대변하는 삶의 태도로서 유학은 성(誠)과 경(敬)을 말한다. 여기 경(敬)이라는 것은 자아가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다. 그 태도는 얼굴빛과 앉는 자세와 걸음걸이에서 시작하여 개인이하는 모든 생각이나 말과 행동에 나타난다.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신은 작은 것에 있다고 했다. “많은 종교에서 아주 작은 것들이 아주 큰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물결에 일으킨 파문이 커다란 바람을 불러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어찌 보면 큰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큰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죠.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신과 작은 것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한겨레, 2021.11.26.) 신은 디테일에 있다는 그의 말은 삶의 태도로서 경(敬)의 개념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천인합일은 마침내 ‘신인합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