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병원에 갔다가 집사람이 진료를 받는 동안 혼자 앉아 있으니 좀 무료했다. 우연히 폰에 간편 연락처를 보니, 작년 여름에 돌아가신 형님 전화번호가 그냥 남아 있다. 사용하지 않는 주인 없는 전화번호가 되어 버렸다. 늘 형님의 분신으로 따라 붙던 폰 번호도 형님의 육신과 함께 세상을 떠난 게다. 그러고 보니 연락처에 금년 봄에 돌아가신 우리학과의 원로 명예교수인 Y교수의 전화번호도 그냥 남아 있다. 내친 김에 Y교수의 전화번호도 지웠다. 내 폰에 두 분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졸지에 사라졌다. 허전하고 씁쓸하다.
언젠가는 내 폰 번호도 세상에서 사라질 게다. 내가 온전히 폰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할 날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지워져 버릴 전화번호다. 내가 아는 어느 노교수님은 아예 스마트폰이 없다. 폰이 없으니 지워질 번호도 없다. 참 간편하고 조촐한 삶이다. 지워야 할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을 정도면, 살아서도 좌망(坐忘)을 즐길만하지 않는가. 현명한 결단이다.
나는 제자가 사준 011 폰을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뒤늦게 010으로 바꾸면서 구식 폴더이지만 스마트폰 기능을 겸한 것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그나마 내가 활용하는 기능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카카오 톡이라는 걸 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폰에 점차 빨려 들어가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집사람은 TV 보는 데는 엄청 시간을 할애하지만 카카오 톡에는 무심하다. 나는 E메일 사용도 비교적 제한적이지만 매일 한 두 번씩 체크를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튜브 활용 시간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디지털문화에 조금씩(느리게) 친해지는 게 사실이다.
경계할 일이다. 언젠가 사라지고 마는 폰 번호를 생각하면, 스마트 폰과 친해지는 나 스스로를 절제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망자의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다시 인생무상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