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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구를 망치는가

평촌0505 2022. 2. 6. 20:39

인도의 세계적인 환경사상가 반다나 시바(V. Shiva)가 쓴 『누가 지구를 망치는가』(추선영 옮김, 2021)를 읽었다. 책의 원제목은 『Oneness vs. The 1%』다. ‘전체와 1%의 대결’로 옮길 수 있겠다. 상위 1%가 기획한 환상적 도구인 금융과 기술의 횡포가 지구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가를 다루는 책이다. 세계적으로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1%가 지구를 망치는 악당이라는 게다. 지금 우리는 언필칭 인류세(Anthropocene)를 살고 있다. 인간의 힘이 지구의 생태적 과정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시대다.

 

저자는 우리가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생태세’(Ecocene)를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른바 공생과 상생의 삶이다. 오늘날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50%가 ‘현대적인’ 식량체계와 산업적 농업에서 비롯되는 것이란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생태문제와 건강문제의 75%가 산업적 농업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식민화는 소수의 탐욕을 원동력 삼아 풍요를 궁핍으로 바꾼다. 1퍼센트의 이야기는 탐욕의 이야기다. 1퍼센트의 탐욕에는 제한이 없다. 1퍼센트의 탐욕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1퍼센트의 탐욕은 자신들의 행동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공유와 탐욕이 대결하고, 상호연결과 사유화가 대결하고, 전체와 1퍼센트가 대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결이 바로 이 책의 핵심내용이다(32쪽).

 

다른 존재와 인간을 식민화하고, 정복하고, 착취하고, 분할하고,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1퍼센트의 권력자들. 군림하는 1퍼센트의 사람들이 세운 가정, 그들이 구성한 범주와 담론은 나머지 99퍼센트를 능가하는 힘을 발휘한다. 1퍼센트에 의한 분리는 곧 폭력이다. 저자는 그 분리의 문제를 세 가지로 든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다. 둘째는 계층, 종교, 인종, 성별을 통한 인간과 인간의 분리다. 셋째는 통합적이고 상호연결적인 인간존재와 인간자아의 분리이다.

 

1퍼센트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 환상을 창조하는 최전선에는 ‘디지털’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이윤을 얻기 위해 ‘데이터’를 채굴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채굴하며, 실물경제를 채굴한다. 마침내 디지털 화폐는 민중의 실제 부를, 전자상거래는 실제 상거래를 대체하고 있다. 1퍼센트는 ‘금융’이라는 경제도구를 이용해 자연과 사회에서 부를 채굴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1퍼센트와 99퍼센트로 양극화되는 현상의 근원에는 이런 직선적 채굴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마침내 1퍼센트는 우리의 지성과 자율성을 채굴하여 ‘빅데이트’로 만들고, 인공지능을 통해 이를 조작한다.

 

지은이는 대놓고 말하기를, 1퍼센트의 흡혈 방식은 금융경제와 기술(하이 테크놀로지)이랬다. 화폐를 증식수단으로 하는 기업이 바로 금융이다. 오늘날 금융경제는 실물경제의 20-50배, 많게는 70배에 이른다. 하루에 수조 달러가 칸막이 없이 이동하면서 글로벌 노름판을 편다. 억만장자 워렌 버핏과 금융기관인 뱅가드 그룹이 그 노름판의 대표로 꼽힌다. 저자는 지난 자본주의 시대에 J. P. 모건과 존 D. 록펠러가 악덕 자본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버크셔 헤서웨이의 워렌 버핏, 디지털 거물인 마크 저커버그와 제프 베조스는 오늘날 1퍼센트의 지배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인물이랬다.

 

과학기술 자체는 인류의 물질적 성장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저자는 산업적 농업은 유독성 물질과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여섯 번째의 대멸종과 기후위기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경계한다. 한 세기 전의 악덕 자본가들이 보유한 자금과 석유가 21세기에 와서 금융과 유독성 기술을 만난 것이다. 지은이는 자연과 인간을 식민지 삼아 착취하는 기업으로 유전자 조작 작물(GMO)의 씨앗을 전 세계적으로 팔아먹는 몬산토에 주목한다. 몬산토는 바이엘과 합병하는 ‘독성 카르텔’을 통해 종자-살충제-화학비료 융합을 넘어 농기구, 정보기술(IT), 기후와 토양 데이트, 보험 부문까지 손을 뻗친다.

저자는 몬산토에 버금가는 1퍼센트의 대표주자로 빌 게이츠의 실상을 까발린다. 남이 만든 컴퓨터 운영체계에 울타리를 치고 돈을 떼고, 그렇게 모은 떼돈으로 또 다른 특허를 취득해 사실상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다. 마침내 1퍼센트가 정의한 진보와 기술이 직선적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아, 문명화라는 당대 임무를 수행하는 주체라고 강요한다. 그는 빌 게이츠를 현대판 콜럼버스라 했다. 게이츠의 제국은 콜럼버스가 식민지 시대를 건설한 뒤 500년 동안 이어져 온 식민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는 게다. 저자는 이렇게 비판한다.

 

빌 게이츠는 유전공학과 디지털 도구를 찬양하고 강요하는 종교의 교황이다. 게이츠 교황이 군림하는 종교는 생물다양성, 다양한 농업, 다양한 경제, 다양한 기술, 다양한 언어, 다양한 지성으로 이루어진 다원주의적 세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야만인’으로 폄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을 ‘문명화’되어야 할 대상, 개종시켜야 할 대상, 1퍼센트의 제국으로 끌어들여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다(121쪽).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화’는 다양화이지 획일화가 아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E.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다시 떠 올리게 된다. 오늘날 ‘기술’은 권력과 통제의 도구이자, 자연세계와 인간의 관계,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오도된 담론을 구성하는 수단이다. 결국 오늘날 기술 근본주의는 기술을 폭력적인 산업도구라는 협소한 틀 안에 가두고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본말전도를 초래하고 말았다. 수단에 불과한 기술이 목적이 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게다. 저자는 1퍼센트의 손에 전 세계의 부가 집중된 것은 특허화, 금융화, 우리 삶이 디지털화 된 결과라 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자연은 인간의 구성물이나 인간이 조직해 단기적 이익을 얻어내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수단적 종속존재가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우주의 창조력이다. 지구에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에코세’(Ecocene)를 살아간다는 의미다. 에코세는 생명을 형성, 유지, 지탱하는 생물권과 지구의 생태학적 과정이 존중되는 그런 시대다. 1퍼센트의 규칙은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의 생존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99퍼센트 인간마저 배제하는 초인간중심주의다. 에코세는 하나의 지구공동체에 하나의 인류공동체가 식민화를 거부하고, 다양하고 상호 연결된 자유와 생존권을 단호하게 수호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1퍼센트가 닦아놓은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면서 공멸의 길로 갈 것인지,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상생하는 미래를 열어갈 것인지 선택해야 할 기로에 있다. 사실 금융과 기술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아주 변덕스럽고 간교한 우군이다. 문제는 1퍼센트의 기득권자가 그것을 부의 축적도구로 악용하는 데에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지구를 살려내야 하나? 지은이는 인도의 환경사상가답게 다음처럼 그 대안을 제기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실천하면서 역사를 통해 얻은 세 원칙이 있다. 그것이 내 영감의 원천이었다. 바로 스와라지(Swaraj; 자치, 자유로운 자기생산: 생물 다양성 회복), 스와데시(Swadehi; 자립과 지역경제 창출: 생태경제와 연결되는 부와 노동),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의 힘, 창조적 시민불복종의 힘: 비폭력 무저항)이다(206-207쪽).

 

‘스와라지’는 모든 존재를 위한 진정한 자유의 부활이다. 자유는 원자적이 아니고 관계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해서 인간의 자유는 지구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면 그 게 바로 스와라지다. 우리 시대의 스와라지는 곧 지구민주주의의 실천이다. ‘스와데시’는 지역 경제의 부활이다. 1퍼센트만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99퍼센트를 위한 경제를 창출해야 한다. 진정한 복지의 실현이다. 지방화는 끊어져버린 생산과 소비의 순환 고리를 다시 연결한다.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생산-유통-소비의 유기적 관계를 끊어버린다. 비폭력 저항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부활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지구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더 큰 상상력, 지성, 연민을 가지고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용기가 요청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멸종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우리 인류는 살아 있고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지성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다. 인류는 한계를 모르고 식민화와 파괴를 멈출 능력이 없는 1퍼센트의 앞잡이인 탐욕 앞에 무릎을 꿇고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아니면 1퍼센트의 앞잡이인 탐욕을 멈춰 세우고 인간성, 자유, 자율성을 수호하여 지구의 생명을 보호할 것인가(249쪽).

 

그 선택은 99퍼센트인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 모멸의 시대에 함께 공존하는 생명의 존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1%의 끝없는 욕망은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 우리가 인류세를 곧 '자본세'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지구를 지배하는 인류는 멸망할지라도 지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