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허(至虛)는 노자철학의 열쇠 말이요, 지성(至誠)은 「중용(中庸)」의 열쇠 말이다. 김충열(2004) 교수는 그의 「노자강의」에서 치허(致虛)와 수정(守靜)은 「노자」수양론의 정곡(正鵠)이라 했다. 이 때 ‘虛’와 ‘靜’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道’의 일상적 모습으로 ‘항상’(恒常)이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虛’는 텅 빈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자유’(大自由)의 뜻이 강하다. 어쩌면 불가(佛家)의 ‘공’(空)과 비교될 듯하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진여’(眞如)를 언어로 규정하는 방식을 들면서 하나는 ‘빈 것 그대로’(如實空)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비지 않은 것 그대로’(如實不空)라고 했다. ‘빈 것 그대로’라 할 때는 그것이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뜻이 강조되며, ‘비지 않은 것 그대로’라 말할 때는 그 속에 모든 깨끗한 성질과 훌륭한 공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大乘起信論, 13). 같은 맥락에서 기신론에는 ‘공’(空)과 ‘불공’(不空)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본체에 있어서는 ‘빈 것’(空)이요 열반이라든가 진여라는 것도 결국 ‘빈 것’이다. 그것은 원래 ‘빈 것’이며 일체의 양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경전의 말을 들을 때,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진여(眞如)와 열반(涅槃)은 그 본성이 오직 ‘빈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이 오해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밝힘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다. 즉, ‘진여’(眞如) 또는 ‘여래법신’(如來法身)은 ‘비지 않은 것’(不空)이며 모든 훌륭한 성질과 공덕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大乘起信論, 52; 이홍우, 2006, p.412).
기신론에 의하면, 우리의 사집(邪執)은 진여와 법신(法身)이 ‘공’(空)이면서 ‘불공’(不空)인줄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우리가 ‘공’(空)이면서 공(空)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경험적 인식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적 인식논리에서만 ‘모순’이다. ‘진여’(眞如)의 세계는 ‘공’(空)이면서 모든 훌륭한 성질과 공덕을 완전히 갖추고 있기에 ‘불공’(不空)이다. 이처럼 기신론에서 진여의 세계는 ‘빈 것’(空)이면서 ‘비지 않은 것’(不空)이라 했는데, ‘성’(誠)은 그 자의(字意)가 함의하듯 “말(言)한 대로 이루는 것(成)”이니 언행(言行)이 빈틈없이 일치하는 ‘불공’(不空)의 상태다. 말과 행동에 빈틈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사집(邪執)에서 해방(해탈)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儒․佛․道 삼교(三敎)의 심층적 회통(會通)을 확인하게 된다. 「중용(中庸)」에서 “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라 하여 誠 자체는 하늘의 길이며, 誠되어 가는 과정은 사람의 길이라 했다. 「중용」에 의하면, 이 ‘誠之者’의 길은 곧 끊임없는 ‘배움의 길’이다. 이 배움의 길은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으로 이어져 두루 배우는 것(博學)에서 시작하여 행하기를 힘쓰는 것(篤行)으로 끝난다.
「중용」에서는 誠之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誠’을 이룬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했다. 이런 성인(聖人)의 반열에 든 사람으로 우리는 공자(孔子), 붓다, 노자(老子), 소크라테스, 예수 등을 들게 된다. 「중용」에 의하면, 이 ‘誠’은 天命之性을 솔성(率性)하고 진성(盡性)한 사람의 ‘誠’으로서, 誠되어 가는 과정으로서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이 ‘誠’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을 「중용」에서는 ‘지성’(至誠)이라 했는데, 이 지성(至誠)은 곧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이다. 이 ‘天人合一’의 경지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품부된 ‘성명’(性命)에 따라 學-問-思-辨-行의 자기계발을 성취한 상태 혹은 과정(過程)이다.
이어 「중용」에서는 ‘至誠如神’이라 하여 ‘지성’(至誠)은 영명(靈明)하기에 모든 것을 감통(感通)할 수 있다는 신통력(神通力)을 강조한다. 이 신통한 경지를 「노자」식으로 표현한 것이 ‘지허’(至虛)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영명한 상태의 깨침에 이르기 위해 지극히 자기를 비워야 하며, 이 비운다는 생각조차도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불학(佛學)에 ‘선교불이’(禪敎不二)라는 말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노자」의 ‘至虛’와 「중용」의 ‘至誠’은 다르지 않다(不二). 다만 「노자」의 ‘至虛’는 비움의 극치인 반면에 「중용」의 ‘至誠’은 좋은 것(德 혹은 道)으로 채움의 극치일 뿐이다. 그래서 기신론에서 진여(眞如)는 ‘空’이자 ‘不空’이라 했다. 그리고 조동일은 그의 ‘생극론’(生克論)에서 상극이 상생이고 상생이 상극이어서 생성과 극복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했다. 결국, ‘지허’(至虛)와 ‘지성’(至誠)은 상극이면서 상생이다. (2011.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