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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인가 섭생인가

평촌0505 2011. 10. 31. 10:27

 

양생(養生)인가 섭생(攝生)인가

 

  양생(養生)과 섭생(攝生)이란 말은 원래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의 생애에서 10분의 3은 생의 지분(生之徒十有三)이고 10분의 3은 사의 지분(死之徒十有三)이며, 나머지는 생과 사의 중간지분이다. 결국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전생(全生)인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속에 이미 적게는 1/3 정도 많게는 2/3 정도의 사(死)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死)의 지분을 얼마나 생(生)의 지분으로 빼서 보태느냐가 바로 양생(養生)의 문제다. 그에 비해 섭생(攝生)은 생(生)의 지분과 사(死)의 지분을 잘 조절하여 삶의 균형을 잡아가는 행위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생(生)의 지분을 극대화하는 데에 있지 섭생(攝生)은 부차적이거나 아예 관심 밖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생(生) 쪽으로 그 지분을 늘려가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생명활동은 한계가 있어, 나이가 듦에 따라 생(生)의 지분이 소진되는 만큼 사(死)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늙음이다. 세월과 늙음은 흐르는 물과 같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의 바다로 어김없이 흘러든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死)의 지분을 빼앗아 생(生)의 지분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늘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섭생(攝生)을 통한 삶의 품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원래 동양철학에 ‘삼리양생’(三理養生)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삼리(三理)는 생리(生理), 심리(心理), 철리(哲理)를 일컫는다. 우리가 건강하고 품위 있게 양생(養生)하기 위해서는 이 삼리(三理)가 서로 도와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한다. 절대로 몸과 맘은 따로 가지 않는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맘 씀씀이가 후하다. 마음이 야박한 사람은 그 맘 때문에 몸이 건강해지기가 어렵다. 몸에 좋다는 보약을 이것저것 극성스럽게 챙기지만 그 약 때문에 건강을 망치기 십상이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철리(哲理)를 따르는 삶을 영위한다. 여기서 ‘철리’(哲理)는 하늘이 명령하는 성(天命之性)에 따르는 사람의 길(率性之道)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삼리양성’은 감성(感性), 지성(知性), 영성(靈性)에 이르는 ‘삼성’(三性)의 조화로운 섭생(攝生)이다.

 

  류영모 선생은 참으로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몸을 쓰고 있다가 맘으로 바뀌고, 맘을 쓰다가 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몸과 맘이 절묘하게 얼로 상승해서 하나가 되는 삶이 섭생(攝生)이다. 말하자면 ‘삼리양생’(三理養生)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노자(老子)의 섭생(攝生)은 우리의 상식으로 잘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다. 노자는 섭생을 잘하는 사람을 이렇게 말한다.

 

  대개 들으니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산속을 가도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 가서도 창칼의 화를 입지 않는다. 코뿔소는 그를 들이받지 않고 호랑이는 그를 물거나 할퀴지 않으며 병사들은 그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에게는 가해해서 죽일 수 있는 곳(터)이 없어서 이다(김충열, 2004, p.252),

 

  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섭생(攝生)을 잘하는 사람은 결국 위험하고 죽을 자리에 가지 않는다는 말로 김충열 교수는 풀이하고 있다. 「노자」에는 ‘중사’(重死)라 하여,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후위기 시대에 가능하면 육류를 줄이고 비행기를 적게 타는 삶의 양식이 긴요하다. 류영모 선생은 흔히 사람들은 알맞은 운동과 음식과 휴식으로 심신의 건강을 도모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런 것은 섭생(攝生)의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은 몸의 나에서 얼의 나로 전환하는 과정을 섭생(攝生)으로 규정 했다. 이처럼 섭생을 잘하여 얼의 나가 되면 참으로 죽을 터(死地)가 없는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때 류영모 선생의 ‘얼의 나’는 노자 식으로 말하면 ‘자연의 섭리’(道法自然)에 따르는 삶일 게다.

 

  건강을 위한답시고 양생(養生)을 늘리기 위해 지나치게 운동을 한다든지 영양과잉 공급을 인위적으로 조절한답시고 단식을 하는 것은 자칫 건강 때문에 섭생(攝生)을 깨트리게 되니 어찌 양생을 잘했다 할 것인가. 결국 섭생(攝生)을 잘하는 사람은 자연의 섭리(攝理)에 따라 스스로 안락(安樂)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섭리(攝理)가 바로 노자(老子)의 철리(哲理)일 게다. 근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 나이 듦이 부끄럽다. (2011.10.30)

 

<추기>  이 글을 올리고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내 삶을 다시 반추해 본다. 정년 후에 나는 특정의 성취의욕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자연적 섭생에 좀 더 친숙해 질 수 있었다. 언필칭 100세 시대에 양생 정보가 차고 넘친다. 가끔 거기에 눈길을 보내기도 하지만 섭생을 깨트릴 정도는 아니다. 생리적으로 이미 노년의 나는 죽음 쪽으로 상당히 경도되어 있다. 그게 자연의 섭리자 천명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본받는 게 삶의 길(道)이다. 그것은 생리, 심리, 철리가 하나로 회통되는 삶이다.(202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