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는 위기인가? 과학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기후변화가 이미 ‘위기’단계로 진입한 사실(fact)은 차고 넘친다. 다만 기후변화는 기상변화와는 달리 30년 간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어서 당장 화급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그 지렛대가 기울기 시작하면, 즉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한다. 약 1만여년 전 농업혁명 이래 안정된 ‘홀로세’(Holocene)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들어 지질학적으로 ‘인류세’(Anthropocene) 시대 도래는 바로 ‘기후위기’에 대한 총체적 경고다.
지금 우리에게 ‘기후위기’가 함의하는 ‘이중과제’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본래 ‘이중과제’라는 말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이라는 이중과제의 담론으로부터 제기된 개념이다. ‘이중과제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창작과비평> 2008년 봄에 특집으로 다룬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백낙청 교수는 이중과제에서 ‘적응’은 어디까지나 동시에 ‘극복’ 노력이기도 한 이중적 과제의 일부랬다. 그것은 극복 노력이 따름으로써만 ‘투항’이 아니라 주체적인 것에 값하는 ‘적응’이랬다. 백낙청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가 높은 수준의 담론이라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그 실천방법을 고정하기는 어렵다.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최소한의 적응조차 못해서 그 현실의 극복에 실패하고 마는 결과를 어떻게 피할지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식을 공유한 가운데,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그러기 위해 어떤 수준의 적응이 필요하며 충분한지를, 또 어떤 식의 적응 시도는 아예 생각도 마는 것이 현명한지를 서로가 때로는 오순도순, 때로는 격렬하게 의논해 간다면 그 또한 아름답고 보람찬 일이 아니겠는가(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2009, p.205).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는 언표로는 이중적이지만 실천적으로는 불이(不二)의 과제다. 즉 하나의 실천과제일 뿐이다. 일종의 상식적 실천의 차원에서 나는 기술혁신과 관련해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절감하게 된다. 디지털 혁명에 따른 기술혁신에 “굴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최소한의 적응조차 못해서 그 현실 극복에 실패하고 마는 난감한 결과를 어떻게 피할지” 내 나름의 처지에서 주체적으로 조정‧타협할 수밖에 없다. 기술혁신이 초래한 물질개벽을 정신개벽으로 대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 시대에 그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우리에게 기후위기 문제는 아주 복잡한 지구차원의 문제이면서 78억 명에 이르는 개인마다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할 실천적 문제이다. 흔히 인류세는 곧 ‘자본세’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류세 도래의 주범이 자본주의라는 게다. 자본의 무한한 욕망이 불러온 결과가 곧 기후위기의 원흉이라는 게다. 어쩌면 인류는 죽음의 계곡을 향해 가속도가 붙은 자본주의호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 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자본주의 자체를 대폭 수정하든지 자본주의체제를 대신하는 일대 전환이 필요한 때다. 물질적 토대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적응과 그 극복이 동시에 요청되는 이중과제의 문제이다. 지난한 문제다.
우리에게 기후위기의 적응은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인내와 능력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후변화에 제대로 적응하려면 동시에 그 변화 혹은 위기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대응을 강구하고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폭염에 대응하려면 냉방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가능하면 그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적응이면서 극복이다. 기후위기의 적응이 곧 극복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두 측면에서 자기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물질적 욕망을 내면적으로 스스로 조절‧절제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일이다.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즐기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길이다. 이를테면 나이 들어 사는 집의 크기를 줄이는 것은 물론, 육식(특히 소고기)을 줄이고 대중교통 수단을 즐겨 사용하는 것 등이다. 나이 들수록 누구나 생태적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삶을 체현하기 위해서는 길희성 교수가 강조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spiritual) 휴머니즘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야 할 게다. 이른바 정신개벽으로 물질개벽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정치적 행동에 적극적‧조직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개인의 실천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지구의 생태적 복원을 우선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발휘가 긴요하다. 우선적으로 선진국 중심으로 이런 정치적 결집이 조직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기후정의’ 구현의 핵심이다. 오늘의 기후위기를 초래한 데에는 선진국의 책임이 절대적이다. 국제적으로 선진국이 기후 채무국이라면 후진국은 기후 채권국이다(한국은 세계적으로 일곱번 째의 기후 채무국이다).
백낙청은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 만들기』(2021)에서 “근대의 이중과제는 자본주의 근대의 변증법적 극복을 주창해온 서구 진보사상을 이어받은 면이 있지만,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라는 한반도 고유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만 원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성격”이랬다. 그는 “점점 심해지는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문제도 개벽에 미달하는 차원의 사유로 추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전환의 과정에서 이중과제론 특유의 현실적 대응을 요하는 것”이랬다.
현실적 대응과정에서 근대의 이중과제와 기후위기의 이중과제는 내면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물질개벽을 부려 조정하는 정신개벽의 전통을 이어받아 기후위기의 이중과제를 주체적으로 감당할 사상적 유산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에게 '다시 개벽'의 실천이 절실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