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自性)은 태어 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 나의 본래성(즉, 本然之性)이다. 해서 <중용> 첫머리에는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성(性; 즉, 본래성)이랬다. ‘자성’은 나의 본래성이자 자연성이다. <대승기신론>에는 이 ‘자성’을 참으로 그러한 진여(眞如)라 했다. 기신론에서 본래 마음은 하나(一心)이지만, 그것은 심층(실재)에서 파악되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현상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마음의 두 측면은 그 각각이 총체로서, 각각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포괄한다는 게다. 각각이 총체라 했으니 두 개의 문은 결국 ‘불이문’(不二門)이다. 해서 이 두 측면의 문은 오직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어 기신론에는 심신여(心眞如)는 오직 하나의 실재,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본체라 하고, 이것이 곧 ‘마음의 본성’이랬다.
그리고 실재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즉, 心眞如)은 일체의 구분이 배제된 ‘절대의 세계’(平等)이며, 그것은 변화를 겪는 일도, 송두리째 파괴되는 일도 없다고 했다. 그것은 오직 ‘하나인 마음’(一心)일 뿐이며, 이런 뜻에서 그것을 참으로 그러한 ‘진여’라 부른다는 게다. 하지만 ‘진여’라는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나타낸 것이며, 그것은 말로써 말을 없애려는 것(因言遺言)과 같다고 했다. 해서 ‘진여’의 세계는 언어로 기술할 수도 생각을 품을 수도 없는 언어도단의 세계다.
하나인 마음의 ‘진여’는 우리의 현상적 마음(生滅心)이 합치되어야 할 이상적 표준이며, 현상적 마음이 점차 그것에 접근하여 마침내 그에 합치될 때(열반/부처), 우리의 마음은 일심 바로 그것이 된다. 이것이 진여자성(眞如自性)이다. 다시 기신론에는 ‘진여’를 굳이 언어로 규정한다면 두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빈 것 그대로’(如實空)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지 않은 것 그대로’(如實不空)라는 것이다. ‘빈 것 그대로’라고 할 때는 그것이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강조되며, ‘비지 않는 것 그대로’라고 할 때는 그 속에 모든 깨끗한 성질과 훌륭한 공덕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진여자성’은 여래의 씨앗인 여래장(如來藏)처럼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지만, 사는 동안 우리가 이런저런 상념에 꺼들린 나머지 햇빛이 구름에 가려진 격이다. 구름이 걷히면 햇빛은 다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바세계에 몸담고 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 것처럼 되고 말았다. 해서 성철 스님은 내 마음의 눈을 똑 바로 뜨라고 했다. 본래 순금덩어리인 자신을 잡철로 착각하지 말라는 게다. 본래자성을 회복하는 마음의 눈을 바로 뜨는 방편으로 불가에서는 ‘자리행’(自利行)을 말한다.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 데, 이 때 ‘자리’가 근본적인 체(體)이고, ‘이타’는 자리에 따라 붙는 부수적인 용(用)이다.
우리는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전형적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년을 하고 자녀들도 나름 자기 앞 가름을 하게 된 노년에는 누구나 ‘자리적 삶’을 향유할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이타적 삶을 앞세우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기 십상이다. 이른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다. 해서 누구나 노욕을 경계할 일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회갑이 지나니 겨우 내 정신 차릴 여유가 생기더라는 말을 했다. 말하자면 내 나름 이타적 삶에서 ‘자리적 삶’으로 전환하는 여유를 비로소 조금씩 가지게 된 게다.
우리에게는 정신적 가치의 성장을 위해 자기 나름의 여유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존엄한 삶이 된다. 나이 들어서도 이런저런 일에 쫓겨 바쁘게 사는 동안 내가 보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용(用)에 쏠린 나머지 삶의 내면적 기준인 체(體)를 등한히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다. 이른바 본말이 전도된 삶이다. 해서 나이 들수록 비본질적인 것들(물질적 욕망이나 명예욕 등)을 줄여야 삶의 본질(정신적 가치)인 ‘자리적 삶’에 충실해지는 기회를 늘린다. 엄격히 말하면 자리는 언제나 이타를 겸할 수 있지만, 이타는 결코 자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이홍우는 <대승기신론통석>(2006)에서 ‘자리적 삶과 이타적 삶’을 깊이 있게 논의한다. 여기 ‘자리’는 개념적으로 ‘이기’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이기’(利己)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을 위하는 것인 반면에 ‘자리’(自利)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자리적 삶의 전형으로 공부하는 삶 혹은 수행(修行)으로서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이홍우 교수는 “이제 이타적 삶을 살 능력도 필요 없게 된 노인, 흔히 말하는 세상에는 쓸모없게 된 노인의 삶을 생각해 보자”고 했다. 만약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범위나 의의가 극히 제한된 ‘여가활동’뿐이라면, 과연 그것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랬다. 참 무서운 말이다. 이제 그 노인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도 혼자서 살 수 있는 삶,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바로 ‘자리적 삶’이다. 자리적 삶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행과 마찬가지로, 지관문(止觀門) 수행이 실현하고자 하는 삶이며, 그것은 바로 ‘지관문 수행’ 그 자체다.
‘자리’는 전형적으로 ‘마음 안의 공덕’이다. 기신론에는 “한 끼 밥 먹을 동안 기신론의 가르침에 관해 바른 사색(正思)을 하고, 기신론의 의미를 세밀히 살펴 그에 따라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을 하는 동안 쌓은 공덕은 바로 자리적 삶의 이익”이랬다. 이것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하여 10선(善)을 행하도록 하는 것을 위시하여 배고픈 중생에게 밥을 먹여 주거나 중생이 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절을 짓는 것과 같은 ‘바깥의 공덕’에 비하여 한도 끝도 없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설사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가 무수겁의 세월을 두고 그 공덕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 안의 공덕으로서 ‘자리’의 이익은 바깥의 공덕과 기본적으로 그 질적인 차이를 달리한다는 것을 불교식 어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자성’과 ‘자리’는 서로 맞붙어 있다. 이른바 불이(不二)다. 굳이 개념적으로 구분한다면 ‘자성’은 뿌리와 같은 체(體)이고, ‘자리’는 그 용(用)과 같다.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하나이듯 본래 ‘체용’도 둘이면서 하나다. 우리네 삶에서 ‘자성’과 ‘자리’가 제 자리를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절제로서의 내율(內律; self-discipline)이 견지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기 내면을 스스로 관리하는 내율의 확립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자성-자리를 연관지우는 방편 혹은 연결고리로서 ‘자족’(自足)을 생각한다.
특히 노년에는 ‘수분지족’(守分知足)이 자리적 삶의 한 방편으로 절실히 요구된다. 노년에 자기 분수를 지켜 스스로 자족하는 삶은 자기에게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다. 우선 다른 사람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니 좋고, 자신에게는 품위 있는 노년을 보내는 데에 도움된다. 노년에는 누구나 무력감과 소외감에 빠진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로 남아 늘그막에 부담만 안겨주는 그런 사람이 된 걸 자책한다. 이런 노년일수록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의 여유, 즉 ‘자족하는 삶’이 긴요하다. 이게 노년의 지혜다.
나이 들수록 이만하면 내가 잘 살아왔고 또 잘살고 있다는 ‘자족감’(자존성)이 소중하다. 해서 에릭슨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후회하지 않고 통정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노년에 내가 ‘자성-자리-자족’을 하나로 꽤는 삶을 그리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주변사람에게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아직도 ‘자성회복-자리적 삶-수분지족’의 실천에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다만 그리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