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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라라비장애인야학과 인연

평촌0505 2023. 4. 15. 10:43

나는 1960년대 중반 대구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한 1세대다. 그게 인연이 되어 모교(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 노릇을 무려 40년(1972-2012)이나 했다. 그러던 중 2000년 3월에 서울의 ‘노들장애인야학’에 이어 대구에서도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 문을 열었다. 젊은 교사들이 대구의 특수교육분야 어른 중에 나를 야학 ‘교장’으로 선택했다. 나는 그간 사회참여활동을 자제하고 연구실 중심으로 생활해 왔다. 제자들이 그나마 나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알고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제도권 밖의 장애인 교육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참여하기로 했다.

 

장애인야학 학생들은 세상구경을 엄두조차 못 내고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당사자의 표현) 있어도 없는 듯 살아온 존재였다. 공교육으로부터 제외된 것은 물론 사회적 참여기회가 완전히 차단된 존재로 살아야 했다. 나라에서 책임지지 않고 집안에만 갇혀 살아온 장애인에게 세상살이의 경험과 길을 열어주고자 장애인야학이 출범한 게다. 동촌 아양교 근처의 계단식 건물 2층에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이 문을 열었다. 교사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었다.

 

우선 야학에 지원한 학생들이 집을 나서서 야학에까지 나오는 과정부터 ‘장애’의 벽은 높았다. 중고봉고차로 일일이 집 앞에까지 가서 휠체어에 태워 사람을 짐짝 실 듯이 차로 옮겨야 했다. 게다가 야학에 도착해서는 계단식 2층 건물까지 다시 휠체어 따로 사람 따로 그렇게 교사들이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야학에 오가는 시간만 평균 3〜4시간은 족히 소요 되었다. 교사들에게는 야학 수업보다도 학생들의 등하교 지도가 더 힘들었다.

 

야학 교장으로서 나는 학기를 시작하고 마칠 때, 그리고 학기 중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참석했다. 그래도 내게 야학 참여는 참 신선한 경험이었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제도권 안과 밖의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학생도 어려웠지만 자원봉사로 참여하는 교사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야학 학생들은 한번 야학에 나오면 그게 평생교육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교사들은 들쑥날쑥 이동이 빈번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 무렵 ‘장애인지역공동체’가 구성되고 야학은 실질적으로 대구장애인운동의 구심이 되었다. 초기에 아양교 지하철역 직원들과 장애인들 간에 심한 다툼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인들에게 가장 친절한 지하철역으로 소문이 났다. 그 무렵 대구에서도 장애인지하철 편의시설 문제가 적극 제기되었다. 당시 장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았던 이헌규 선생은 그나마 서울과 부산보다 대구지하철 편의시설이 잘된 편이라고 했다. 지하철이 늦게 개통된 덕분이다. 야학학생들은 장애인버스타기와 저상버스도입 문제에도 적극 나섰다. 나아가 장애인도 야구장, 극장, 식당 등에 불편함 없이 출입 할 수 있는 편의시설 보장에 적극 나섰다. 그리고 대구에서 장애학생들에게 수능시험 시간을 연장해 줄 것을 문제제기해, 이듬해부터 전국적으로 장애수험생들이 그 혜택을 볼 수 있게 했다.

 

초기에 약 10년간 ‘질라라비장애인야학’ 교장 직분을 유지했으나, 내 나이도 그렇고 너무 오랫동안 해온 것 같아 새로 교장을 모시도록 당부했다. 장애인지역공동체 중심으로 자체 협의를 한 결과, 초기 야학 학생회장을 지낸 박명애 선생을 교장으로 추대했다. 박명애 선생은 그 무렵 벌써 50대 중반을 넘어섰고, 야학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기에 교장 적임자로 인정되었다. 그로부터 박명애 교장은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전국적으로 박경석 회장과 함께 장애인운동권의 소문난 당사자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박경석 회장은 흰머리 휘날리며 아직도 장애인이동권 투쟁의 선두에 서 있다. 그가  그렇게 투쟁한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내가 질라라비야학 교장에서 물러난지 약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정년한지 10년이 넘었고, 박명애 교장도 교장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대구장애인지역공동체 회장을 맡고 있다. 후임교장으로는 대구대 특수교육과 출신인 조민제 선생이 맡아 있다. 그는 대구대 대학원 장애학과에서 <대구장애인운동사>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 지난 연말 무렵에 야학에서 초대교장을 모시고 함께 식사자리를 마련하고자 연락이 왔으나 여의치 않아 미뤘다. 그러던 중 4월 10일 박명애 선생, 조민재 교장, 야학실무자 이렇게 함께 점심식사 약속을 잡았다. 나는 식사 전에 안심 쪽에 있는 야학을 먼저 들리기로 했다.

 

4층 건물 전체를 야학과 장지공이 함께 모두 사용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나마 장애인야학이 평생교육기관으로 지정되어 많이 좋아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장애인 개개인의 실질적인 삶의 질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여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도 장애인계에서는 해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선언하고 있다.

 

점심식사 후 기회가 되면 옛날 야학 학생들과 함께 차를 나누는 자리를 가지자면서 헤어졌다. 모처럼 귀한 만남의 자리였다. 우리나라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만큼 장애인들의 상대적 빈곤은 늘어나고 있다. 모든 장애인 한 사람마다 존엄한 삶의 주체로 우뚝 서는 그런 세상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