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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장애인의 삶: 전사들의 노래

평촌0505 2023. 5. 3. 14:13

전체인구의 약 10% 쯤은 장애인이다. 아마 학령기 아이들 기준으로 보면 이보다 적을 것이고, 노년기 기준으로 보면 훨씬 많을 게다. 노인은 누구나 장애인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나(2001) 장애인운동에 발을 딛고 지금은 인권기록 활동가로 살아가는 홍은전이 『전사들의 노래: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2023, 비마이너기획)를 냈다. 전사처럼 투쟁에 앞장 서온 여섯 명의 장애인(박길연, 박김영희, 박명애, 이규식, 박경석, 노금호) 당사자의 장애운동 내력을 직접 인터뷰해 엮은 책이다. 저자는 “차별받은 존재가 저항하는 존재가 되는 일”을 당대 사회의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그리함으로써 저항하는 장애인의 말이 곧 역사가 되게 한다. 이 책은 최근 30여 년간 한국 장애인운동사를 주도한 전사들의 삶과 말이 역사가 되게 엮은 기록이다.

 

우선 나는 책에서 다룬 여섯 명의 ‘전사’ 가운데 나랑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말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장애인계에서 진즉에 싸움꾼의 간판이 된 박경석은 대구출신이다. 그는 대구대 장애학생들이 초청하면 행사를 마치고 학생들의 안내로 내 연구실에 들려 담소를 나누곤 했다. 박명애는 질라라비장애인야학에 교장으로 내가 ‘얼굴마담’ 노릇을 할 때에 학생회장이었고, 내가 물러나고 질라라비야학의 실질적 교장으로 ‘전사’가 되었다. 노금호는 대구대 유아특수교육과(01학번) 출신으로 나랑은 사제지간이다. 나는 1960년대 중반 대구대 특수교육 1세대로 모교에서 평생 교수 노릇(1972-2012)하는 행운을 누렸다. 노금호는 장애당사자로 장애운동은 당사자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를 ‘철학하는’ 운동가로 우뚝 선 제자다.

 

박경석은 1960년 대구태생이다. 79학번으로 영남대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복학해 경주 토함산에서 열린 대학생행글라이딩 대회에 참가(1983.08)했다가 추락사고로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된 게다. 그 후 5년 동안 집에만 있으면서 정신적 방황 끝에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과정에 등록했다. 서울서 재활의 길을 찾아 이리저리 부대끼던 중 운명처럼 노들장애인야학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살아오면서 제일 잘한 선택 가운데 하나가 노들야학을 만난 것이랬다. 홍은전은 책에서 노들야학을 매개로한 박경석의 삶을 이렇게 집약했다.

 

박경석은 1994년 노들야학 교사가 되었고 3년 뒤 교장이 되었다. 2001년엔 장애인이동권연대를, 2006년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조직해 대표가 되었고, 현장과 운동을 쇠사슬로 연결하듯 노들야학과 전장연 사이를 자기 몸으로 단단하게 연결해 서로를 끌어 당겼다. 덕분에 노들야학은 교육만큼 운동에 진심인 학교가 되었고 삶과 배움, 투쟁이 분리될 수 없이 얽히고설킨 정체불명의 운동공동체가 되었다. 그는 2021년 무려 24년간의 교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평교사가 되었다. 그것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말했다(250쪽).

 

저자는 20년이 흐른 그 거리에서 경석이 여전히 ‘나 홀로 시위’에 나선 걸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단다. 이유는 그가 너무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거리에서 천천히 늙어 예순둘이 된 박경석의 파뿌리 같은 백발은 이 운동의 끈질긴 역사와 변하지 않는 현실, 경석의 집요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했다.”는 저자의 말이 필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나는 얼마 전 질라라비야학에서 모처럼 만난 박명애에게 “어찌 그 박경석이 아직도 흰머리 휘날리며 거리투쟁에 앞장서게 하느냐”고 나무라듯 현실을 질타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운명이자 삶이다. 박경석은 노들이 아니면 자기 인생이 해석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평생 노들을 발판삼아 장애인 운동의 왼쪽끝머리에서 투쟁을 이끌어 왔다.

 

박경석은 “장애인운동의 본질은 만나고 겪는 데 있어요. 만나고 겪으면서 관계를 변화시켜야 기획이 생기지 현장이라는 토대 없이 그냥 기획되고 연결되지 않더라.”고 했다. 살아남은 현장이 있었기에 2001년 지하철에서 한 장애인의 죽음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죽음은 마침내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여정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이동권은 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핏줄 같은 것이죠. 이 연결선을 왜 여태까지 못 만들었냐면 돈 때문이에요. 이 사회는 장애인에게 투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돈이 아깝다는 거죠. 장애인의 생존을 ‘기본적 권리’가 아니라 ‘돈이 있으면 (시혜적으로)하는 복지’라고 여기는 거죠(285쪽).” 이게 관료사회의 굳은 관행이자 장애인시책의 한계다.

 

그는 장애인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지하철 선로 점거로 대표되는 2001년의 이동권 투쟁이고, 두 번째는 중증장애인들이 한강대교를 기어 노들섬에 도착했던 2006년의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이고, 세 번째는 여덟 명의 장애인이 석암재단 산하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뛰쳐나와 노숙농성을 벌였던 2009년의 ‘탈시설’ 투쟁을 들 수 있다고 했다. 투쟁의 결과 제도의 기틀은 마련했으나, 그 내용의 질적 정비는 여전히 남은 숙제다. 이를테면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가 장애등급제 폐지라는 끝나지 않은 싸움으로 이어진다.

 

박경석의 장애인운동은 이동권 투쟁에서 시작되어 활동지원서비스를 거쳐 탈시설 권리를 딛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통과해 중증장애인의 자립과 노동권 보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싸움의 고비마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저자는 <싸우는 인간의 탄생> 박경석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1983년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입고 모든 것이 변해버렸던 그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8년이었다. 그것은 모든 고통은 장애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의 탓이라고, 자본주의가 장애인을 이 사회 바깥으로 내몰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태수와 흥수의 말을 경석이 진심으로 믿기까지 걸린 시간일지도 모른다.(314쪽)

 

<중용> 첫 머리에는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사람의 본래성(天命之謂性)이랬다. 박경석에게 장애인운동은 하늘이 품부한 본래성의 회복에 따른 당위였다. 해서 그에게 장애인운동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일 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끊임없이 사회적 장애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그는 싸움꾼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게다.

 

박명애는 1954년 생으로 70줄을 내다보는 할머니(실제로 손주를 보았다) 장애인이다. 그는 진주태생이지만 열여덟 살에 대구로 이사를 와서 이제는 대구토박이다. 하지마비인 그는 척추측만이 심해지는 걸 지연하는 수술을 포기하고 불도저 같은 남편과 덜컥 결혼을 했다. 결혼 후 1988년에 아들을 낳고, 3년 뒤에는 딸아이를 낳아 남매를 키워냈다. 둘째를 가졌을 때 사람들이 “하나만 낳고 말지”라는 소리가 서운했단다. 그러고 살던 중에 2000년쯤에 아양교 근처에 있는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을 찾아갔다. 평생 처음으로 만학의 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야학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새 세상을 만난 게다. 야학의 류재욱이라는 학생회장이 자립했다면서 집으로 사람을 초청해 집들이를 했단다. 그는 혼자 밥 떠먹기도 힘든 중증장애인이어서 누가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가 싶었는데, 야학 선생님들을 시켜 집들이하는 걸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단다.

 

박명애는 야학 학생회장이 되자 ‘전동사모’(전동휠체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조직해 우리도 단체여행 가고, 가고 싶은 식당가고, 극장도 가고, 야구장에도 가는 운동을 전개했다. 2006년 그는 대구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로 뽑혔다. 이듬해에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되었고, 2009년에는 질라라비야학의 교장직을 맡았다. 야학 출신이 모교의 실질적 교장이 된 게다. 이렇게 박명애는 대구의 박경석으로 우뚝 선 게다. 그 후 나는 박명애의 당당한 활동모습을 보면서 처음 야학에 와서 수줍어하던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싶어 속으로 놀랐다. 야학의 힘이 무섭다. 이처럼 명애의 인생은 야학으로 인해 당당히 부활한 게다.

 

2014년 어느 날 남편이 급성 폐암으로 결혼 3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한 쪽 날개를 잃은 게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명애에겐 하루 열여섯 시간 의 활동지원서비스가 필요했지만, 딸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여섯 시간밖에 지원을 못 받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장애인활동지원 서비스를 받던 사람이 65세가 되면 자동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 대상자로 전환되는데, 길어야 하루 네 시간밖에 지원을 못 받는다고 했다. “나라에선 장애인이라고 서비스를 많이 받으면 서비스를 적게 받는 비장애노인들과 형평성이 안 맞대요. 그 말이 내 가슴에 아프게 박혔어요.” 이 대목에서 명애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장애인은 65세가 되기 전에 죽는 게 마땅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같지 않은 것을 같은 것으로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곧 불공정의 극치다.

 

노금호는 1982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근이양증(루게릭) 진단을 받았다.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일곱 살 때 경기 포천 기도원에서 안수기도를 받으면서 기도원생활을 이래저래 이어갔다. 5학년 쯤 되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다시 포항 집으로 돌아왔단다. 장애는 계속 진행되어 중2 때까지는 힘들어도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데, 중3 때는 걷는 것도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고1 때 너무 힘들어서 수면제를 모아서 먹고 죽으려 했지만 다음날 깨어나 마음을 달리 먹었단다. 기질적으로 불안하고 예민한 금호에게 장애는 계속 진행되어 자신은 괄호 밖 존재라는 공허감에 빠져들었다.

 

2001년 대구대 유아특수교육과를 들어갔다. 여름방학 때 전주 우석대에서 전국특수교육과학생연합(전특연) 수련회를 갔는데, 거기서 뇌성마비 장애당사자인 김형수 선생의 강의를 듣고 ‘장애’ 문제에 새로 눈을 떠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무장애대학교 만들기’대학 기숙사 1층에 장애학생들이 모두 배치가 되었다. 그 때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 장애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장애가 개인의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당대 사회가 만들어 낸 사회적 병리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어느 날 기숙사 복도를 지나다가 어떤 중증장애학생이 있는 방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방에 소변 통이 쭉 쌓여 있는 게 너무 지저분했죠.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여서 룸메이트인 종훈 형과 그 방에 들어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분 말이 비장애인 룸메이트가 도망을 갔데요.” 대학에서 장애학생 방에 비장애학생을 룸메이트로 배치를 했지만 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게다. 우리가 특수교육과 학생인데 우리가 다니는 대학에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탄생한 게 ‘레츠’라는 동아리다.

 

대구대는 유독 장애학생 지원이 많아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장애학생이 약 300명 정도인데, 그 중 열댓 명 정도가 동아리에 들어왔단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전특련 수련회가 평택 에바다농학교 투쟁현장에서 열렸다. 금호는 “종교적 이유로 술도 먹지 않던 내가 그때부터 변한 거예요. 에바다 투쟁이후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이 있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보고 삶의 방향이 변했어요.”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내친김에 2학년 2학기 들어 아예 동아리 회장이 되었다. 그는 당시 잘나가던 자신을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허세인데 대학시절엔 2학년만 되어도 선배 노릇 할 때니까 후배들 앞에서 ‘너희가 장애를 아느냐’는 식으로 ‘썰’을 풀면 후배들이 막 열광하던 시절이었죠. 처음으로 후배랑 연애도 했어요. 제가 그때 말발이 좋고 거침이 없었어요. 그 시절이 제일 제미 있었고 생각의 변화도 컸죠.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황금기였던 거 같아요.(340쪽)

 

젊어서 황금기는 길게 가지 않는다. 금호는 이제 대구대를 넘어 전국 한총련 장애인권 부장을 맡는다. 그러나 한총련에서는 장애인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 무렵 그는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 대표를 만난다. 금호는 학생운동을 정리하면 지역중심의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대구의 장애인단체는 소극적이었으나, 2006년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름으로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문제를 내걸고 대구시청에서 집단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을 시작한지(5.18) 40여 일만에 소기의 상과를 얻자 대구장차연은 전장연의 지역조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농성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대구사람센터를 시작했고, 이때 조민제가 팀원으로 적극 참여했다. 2006년에 이어 이듬해엔 대구에서 교통약자 이동권 투쟁도 강력하게 펼쳤다. 금호는 당시 대구지역에서 투쟁성과를 이렇게 회고한다.

 

2009년에 서울서 탈시설운동이 본격화되자 우리도 대구시청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해서 체험홈과 탈시설 정착금 등을 얻어 냈어요. 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실태 전수조사도 실시해 50% 이상의 장애인들이 당장 탈시설을 원한다는 분명한 근거도 만들었고요. 2011년부터는 후순위로 밀렸던 발달장애인 지원에 관한 요구를 앞쪽으로 배치를 했고, 2014년 지방선거 때는 모든 후보들에게 우리의 요구를 전달한 뒤 공약 합의서를 받아냈어요. 수년간의 노력으로 탈시설 장애인들이 늘어났고 그들이 장애인권운동에 결합하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졌죠. 2015년에는 탈시설 장애인들을 조직해 ‘탈선’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시와 여덟 개 구를 순회하면서 우리의 요구를 알리기도 했죠.(352-353쪽)

 

이렇게 대구에서 금호의 존재감이 부각되면서 자기 나름의 내면적 갈등도 늘어났다. “장애인운동은 나 혼자서 내 장애를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주었어요. 내 활동의 기준점이 되는 존재는 혁명가 예수예요.” 기독교인인 그가 사랑의 예수보다 혁명가 예수를 표상하는 변화가 온 게다. 금호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요즘 전장연 운동에 박탈감 같은 걸 느껴요. 장애인운동은 멋있고 급진적이죠. 낭만이 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모습 때문에 현실이 가려진다는 느낌을 받아요. 더 처절한 밑바닥, 삶의 어떤 지긋지긋함이 있는데 그게 잘 안 보인다는 느낌이죠. 투쟁 판에 있으면 존재가 존재로 인정받는 것 같죠.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존재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내 상황이 그래요.(358-359쪽)

 

코로나 환란을 겪으면서 금호는 “그냥 우리 같은 사람은 죽으라는 거구나. 존엄이 산산이 찢기는 느낌을 받아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겪는 삶의 무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장애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나마 잘 움직일 수 있었던 오른 팔과 오른 손가락에 근력이 점점 빠지고 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핸드폰으로 문자 쓰는 게 힘들지 않았는데 요즘엔 핸드폰을 오래 들고 있는 게 힘들어서 손목이 약간 꺽여요. 폐 근육도 많이 손실되어 가끔 숨쉬기가 어렵고 머리가 멍할 때가 많아요. 그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압박이 되고 통증이 있어서 잠자가 어려운데 수면제도 잘 안 들어요.(360-361쪽)

 

금호는 진행성 ‘척수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다. 그의 말에 좀 더 기대어 보자.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장애운동 안에서 느꼈을 소외감을 지금 제가 느껴요. 저의 손상이 진행되는 속도에 비해 사회의 성숙도는 너무 느린데, 그 의미를 확장하는 운동조직 안에서 조차 제가 깰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아요. 지금 제게 가장 절박한 화두는 어떻게 나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이 사회에서 생존해갈 것인가 예요. 구체적으로 제가 대표로 활동하는 조직 안에서 어떻게 월급이 깍이지 않고 권위가 훼손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신뢰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까하는 거죠. 이건 곧 저의 생존 문제이니까요.(366쪽)

 

인터뷰 말미에 금호는 “이 사회나 조직이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라도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라 했다. 하지만 저자이자 인터뷰어인 홍은전은 금호가 정말하고 싶은 말은 “전장연이 함께 싸워주면 좋겠어요.”라는 걸 이심전심으로 얼른 알아차린다. 저자는 금호와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노련한 기록자답게 그의 양해를 얻어내 청년 노금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스무 살에 장애인운동을 만난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그만두고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절대자 예수를 동경하던 소년은 저항자 예수를 품은 청년이 되었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던 에너지를 약자들의 연대를 조직하는 힘으로 썼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들과 함께 대학 내 장애인들의 교육환경을 바꾸었고 지역사회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제도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열정과 분노의 방향을 바꿀 때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각자 혼자 극복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목표가 될 때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들을 노금호의 생애가 보여준다.(375쪽)

 

금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장애인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야기의 완성은 듣는 사람의 몫이랬다. 그는 책의 마지막 문단을 이렇게 적었다.

 

백전백패의 싸움을 하기에 절대지지 않는 전장연이, 비가 오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기에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기우제를 지내는 전장연이 함께 싸워주길 바란다. 금호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를 지키는 일이니까.(376쪽)

 

그리고 책의 <후기>에 붉은 활자로 이렇게 써놓았다.

 

2022년 1월 전장연은 척수성 근위축성 환자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알리며 싸움을 시작했다. 척수성 근위축증 치료제인 스핀라자는 1회 주사비용이 약 1억 원에 달하기 때문에 건강보험 적용 없이는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금호는 ‘만3세 이전에 증상이 발현했음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건강보험 적용심사에서 탈락했다. 2월 전장연은 치료제 보험적용 확대와 현행 제한기준 폐지 등을 요구하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점거했다.

그후 금호는 놀랍고 다행스럽게 재심사를 통해 보험 적용을 승인 받았고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생겼다. 건강보험공단이 분기별로 환자의 증상을 확인해 급여를 지속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이 효율성의 잣대로 경제적 가치를 평가할 때, 자신의 목숨이 저울 위에 매달린 사람은 언제 투약이 중단될지 모르는 가혹한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전장연은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등에 이어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치료받을 권리와 장애인의 건강권 문제로 싸움을 확대했다. 그 싸움의 맨 앞에 노금호가 있다.(376-377쪽)

 

금호가 끝까지 자신의 존엄한 삶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