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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갱년기: 어찌 넘길 건가

평촌0505 2023. 7. 14. 10:11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지금은 인생도 길고 예술도 길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노년의 길이가 늘어났다. 일생을 3단계로 나눈다면 출생에서 30년까지는 성장기(1단계)이고, 30세 이후 65세까지는 일하는 시기(2단계)이고, 65세 이후는 노년기(3단계)로 줄잡아 30년 정도가 될 게다. 노년기가 전 생애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노년기가 늘어난 만큼 삶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노년에 신체적 퇴화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정신적 성장을 지속하는 게 정상적 노년의 모습이다.

 

마크 아그로닌은 <노인은 없다>(2019)에서 노인의 ‘침체된 상태’라는 멋 없는 표현 대신에 ‘노인 갱년기’라는 말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관심분야나 역량, 관계, 역할, 생활패턴을 추구하고 개발하는 활동이 점차 쇠퇴하거나 심하게는 중단되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랬다. ‘노인 갱년기’는 설정한 목적이 상실되었음에도 그것을 대체할만한 그 무엇도 없는 상태다. 그 자체가 노년의 끝자락은 아니지만, 자기를 바꾸어가는 ‘창조적인 나이 듦’의 끝이다. 해서 노인 갱년기는 정형화된 노년 그 자체다.

 

유엔에서는 ‘노인 갱년기’를 79세 이후로 잡고 있으나, 피터 드러커 같은 세계적 경영학자는 85세 이후부터를 자신의 노인 갱년기로 말했다. 물론 그는 죽을 때까지 비교적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스스로 늙었다고 단정한 게(창조적인 나이 듦의 한계) 85세 이후였단다. 그럼 해방둥이인 내 경우는 어떤가? 80줄을 내다보지만 아직은 스스로 ‘노인 갱년기’로 생각되는 건 아니다. 내 블로그에 글 올리는 빈도를 보면 지금이 ‘전성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내게 지적으로 상승하는 에너지의 비축분이 있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내게 노인 갱년기가 언제까지 유보될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믿을 수 없는 게 노년의 건강과 삶이다.

 

<노인은 없다>(2019)에서 저자는 노인 갱년기에 빠지게 될 기본 요소로 ‘향수(鄕愁), 과거에 집착하는 뇌, 잦은 마찰’에 주목한다. ‘향수’는 과거에 누린 것들에 대한 정서적 갈망이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아름다운 심상일수도 있지만, 자칫 그 기억이 우상으로 바뀌어 가슴에 실망을 안긴다. 우상은 우리에게 실재가 아니다. 내게 아직도 자랄 적 시골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지만, 그건 잠정적 향수일 뿐이지 내게 우상은 아니다.

 

나이 들어 나는 ‘오래된 두뇌’를 유지하려는 성향 때문에 새로운 두뇌들의 사고나 기술을 따라잡기에 힘이 부치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내 나름으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고자 노력한다. 내게 정신개벽은 체(體)이고, 물질개벽은 그 용(用)이다. 하지만 ‘체용’(體用)은 둘이 아니다. 나이 들어 감정조절이 잘되지 않아 인간관계에 마찰이 잦으면 꼼짝없이 외톨이가 된다. 나는 가족 간이나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그 관계망이 넓지 않아서 자연히 마찰도 별로 없는 편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도 마누라와 마찰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도 마찰의 강도는 많이 완화되고 있다. 노년에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부부관계다. 가장 가깝기 때문일 게다. 그게 사소한 일상의 삶이다.

 

노인 갱년기에 탈출구는 없을까? 어차피 피할 수는 없지만, 휘어질망정 부러지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노인은 없다>에는 누구든 나이 들면 삶에서 역할이나 역량과 목표들이 바뀌겠지만, 그 변화에 따른 새로운 방식을 찾으란다. 쉽지 않다. 노인에게 존엄한 삶과 죽음은 난제 중의 난제다. 그리고 정해진 답이 없다. 노년에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않는 신체적/정신적 탄력성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