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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 (5) 대학시절 방황과 대학원 공부

평촌0505 2023. 9. 1. 09:56

 

나는 동래고를 졸업하고 1964년 3월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서울 영등포에 이모님이 계셔서 아버지는 내가 이모님 댁에서 다닐 수 있도록 부탁하기 위해 직접 나랑 상경하셨다. 그러나 영등포에서 신촌 연세대까지 통학하기는 거리가 너무 멀어 불편했다. 나는 마침 연대 근처에 나와 동갑네기 4촌 동생인 병학이가 자취를 하고 있어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 병학이 동생은 김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병학이 동생은 자랄 때부터 나랑 가장 가까운 동무였다. 친형제처럼 늘 함께 놀았다.

 

서울서 철학과에 다니는 동안 심리적․정서적 불안정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은 여러모로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맹자는 항산(恒産) 연후에 항심(恒心)이 가능하다고 했다. 20대 초입의 나에게 ‘항산’은 물론 ‘항심’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철학을 공부한답시고 해결할 능력은 없으면서 삶의 모든 문제를 안고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이 무렵 나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 조금씩 빨려들고 있었다. 병학이 동생과 자취생활을 하다가 쌀이 떨어져 하루 반을 굶은 적도 있었다. 배고픔을 평생 처음 호되게 경험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영등포 이모 댁에 다시 들어갔다.

 

여름 방학 때 집에 내려와 그나마 일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으나, 내면적 갈등은 여전했다. 방학을 마치고 구미역에서 서울로 가지 않고 대구로 내려와 지득용 친구에게 연락했으나 닿지를 않았다. 그길로 나는 무작정 포항행 시외버스를 타고 동해 바다 쪽으로 갔다. 평생 처음 혼자서 포항이라는 데를 가서 저녁에 혼자 여관방에 들어갔다. 여관방에 누워 있으니 잠도 오지 않고 모든 게 막막했다. 그러던 중에 혼자 실 컷 울고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해(1964) 가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겨울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나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대구청구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지득용 친구에게, 한국사회사업대학 특수교육과가 어떤 곳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득용 친구가 그 대학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특수교육과에 다니는 학생들의 자부심만은 대단하더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철학의 연장선에서 특수교육 쪽을 공부해 보겠다고 맘먹었다. 대구에 내려가 특차 면접을 보고 한국사회사업대학 특수교육과에 재입학하였다. 서울서 학점을 놓친 게 있어 결국 나는 대학을 5년이나 하는 문제 학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버님께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언제나 내편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다. 이 무렵 나는 심리적 갈등이 깊어져 위궤양으로 늘 약을 복용하고 있을 정도였다. 뜻밖에도 특수교육은 평생 나의 구원투수가 되었다. 대구에 내려와 나는 당시 경북대 간호대학에 다니는 유하주를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나의 정신적 안정에는 별로 도움이 되질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내가 대학3학년 때 쯤 결혼을 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생활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함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나는 규모가 작은 한국사회사업대학의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 교수들로부터 차츰 인정을 받고 대학생활에도 조금씩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1학년 때 교육학개론 과제로 내가 ‘칸트의 인생론’이라는 북 리뷰 리포트를 냈더니 안태윤 교수께서 내용이 좋다면서 대학신문 학생논단에 실리게 했다. 난생 처음 내가 쓴 글이 활자로 발표 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 게 인연이 되었던지 나는 대학신문 기자로 들어가 3학년 때는 편집국장도 하였다. 내가 대학신문사에서 계속 일하게 된 데는 서석달 교수의 호의가 크게 작용하였다.

 

편집국장을 맡은 덕분에 나는 3학년 말에 대학생 파월장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해군 LST 함정을 타고 월남방문 기회를 가졌다. 부산서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대만 기륭항에 정박해 대북(臺北)대학을 들리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만 해도 타이완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다. 캠퍼스가 참 아름다워 보였다. 대학 서점에서 웹스터 영영사전을 한 권 구입했다. 다시 남지나해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우리는 배 멀미로 큰 고생을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갑판 위에 올라가 웃옷을 벋고 일광욕을 했다. 약 10일 이상 이어지는 항해가 참 따분했다.

 

월남 퀴논 항에 도착하니 겨울인데도 아열대 지역의 더위가 느껴졌다. 그때가 구정공세가 심하던 때여서 사이공 쪽으로는 아예 가지 못하고 바로 파월장병 숙소로 안내를 받았다. 군 입대 경험이 없는 내게 월남의 전장은 정말 낯설었다. 그래도 침낭과 잠자리는 쾌적했고, 미군 씨레이션과 맥주가 푸짐하게 공급되었다. 당시 참전 군인들은 미국 병사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급료를 달러로 받았는데, 이게 가난한 경제상황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단다. 말하자면 달러와 생명을 바꾸는 그런 형국이었다. 당시 우리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곧 죽고 사는 문제가 된 게다.

 

전방 중대 베이스에 가보니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밤 10시 쯤 요란사격이라면서 실제로 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약 10분간 사격훈련을 했다. 그때 나도 총을 직접 쏴본 경험이 있다. 중대 베이스에 배치된 병사들은 한국에서도 비교적 환경이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월남에서 채명신 사령관을 먼발치에서 직접 본적이 있는데, 키도 훤출하고 눈썹이 붓으로 쿡 찍어 놓은 것처럼 뚜렷했다.

 

내가 월남을 다녀와 이태영 학장님께 인사차 들렸더니, 이영식 학원장께서 월남전에 관심이 있으시니 한 번 찾아뵈라고 일러주셨다. 아마 당시 이영식 목사님은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마침 이야기 끝에 목사님은 자기가 초안으로 써놓은 글을 원고지에 정리하는 일을 말씀하시기에 내가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나는 라이트하우스원에 내려가 목사님의 글을 받아 원고정리해서 드리곤 했다. 한번은 내가 코감기가 걸린 채로 방문했더니, 무슨 알약을 하나 꺼내주시면서 먹어보라했다. 그 약을 먹고 나니 신통하게 나았다.

 

4학년이 되어서는 학보사 편집국장 자리를 후배 김신일(산업복지과)에게 넘겨주었다. 그 무렵 서석달 교수께서 도서관장 보직을 겸하고 있어, 나더러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임시사서로 일을 해달라고 하셨다. 그만큼 서석달 교수는 나를 믿고 잘 챙겨주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 아버님이 약 1년 이상 신고 끝에 돌아가셨다. 형님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나만 미혼으로 남겨둔 채로 운명하신 게다. 나는 대학졸업식에 다녀와서 졸업장과 상장을 아버님 빈소에 올려놓고 혼자 큰소리로 곡을 했다. 아버님께 내가 마지막으로 올리는 참회의 인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도서관에 임시 직원으로 일하던 차에 경북대에 교육대학원이 새로 신설되어 나는 ‘교육철학’ 전공에 지원을 하였다. 영어시험은 못 쳤지만 전공시험을 잘 친 탓인지 합격을 하였다. 서석달 교수께서 자네는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니 운이 좋은 사람이랬다. 그해 4월에 경북대 교육대학원은 정식 개원을 했다. 교육철학 전공에는 경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정태욱 씨와 두 사람이 공부했다. 지도교수는 교육학과 원로 교수이자 특수교육과 안태윤 교수와 김정권 교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김봉수(金鳳守) 선생님이 맡으셨다.

 

첫 학기에 김봉수 선생님은 브루바하의 교육철학 원서를 가지고 일요일 오전에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연로하셨지만, 영어가 아주 정확하시어 내 딴에는 열심히 발표준비를 해갔지만 조금만 의미가 통하지 않아도 호통을 치셨다. 정태욱 씨는 학부에서 가르친 제자여서였든지 계속 내게만 발표를 시켰다. 내게 평생 가장 인상에 남는 개별수업이었다. 덕분에 나는 대학원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아예 2학기부터는 도서관 일을 그만두고 연구실에 들어가 공부만 하기로 작정했다.

 

그때 김봉수 선생님 방에는 이미 다른 대학원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나는 이경섭 교수 연구실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그때 마침 교육학과 대학원을 마친 김민남 선생이 이경섭 교수와 함께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같은 동료 학우인 정태욱 씨로부터 대학원 선배가 되는 김민남 학형을 정식으로 소개를 받아 함께 어울려 세미나도 하고 가끔 술자리도 같이했다. 그때 김민남 학형은 우리끼리 자발적으로 하는 세미나 모임을 주도해 나갔다. 참 사람의 인연은 알 수 없다. 이런 만남이 계기가 되어 김민남 선생과는 평생토록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지식과 세상>사회적 협동조합에서 현직에 있을 때보다도 더 자주 만나고 있다.

 

내가 평생 가장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했던 게 이때였다. 나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를 <한국개화기의 신교육사상>으로 잡았다. 주제 선정에는 지도교수보다는 간접적으로 학부시절에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안태윤 교수가 작용했다. 어쨌든 나는 이때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는 연구실에서 공부만 할 수 있어 공부에 대한 내면적 희열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의 이런 공부경험이 내가 평생 교수 생활하는 데에 소중한 에너지로 작용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형님들은 다투어 고향의 농지를 처분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땅을 처분하지 말고 계속 고향에서 집을 지키라고 일러주셨다. 하지만 형님들 등살에 어머니 맘이 흔들리셨다. 어머니 자신도 고향 집을 지키고 혼자 사는 걸 부담스러워하셨다. 그렇게 해서 큰 형님은 부산에 새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산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때 집 앞 문전옥답 한 자투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막내인 내 앞으로 남겨 놓았다. 형님들이 농지를 정리하는 와중에 그 돈으로 나는 대학원 공부를 마친 게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내가 가장 보람 있게 활용한 게다.

 

하루는 내가 김민남 선생이 일하는 여관에 들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 나이가 되도록 계속 형님 집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맘이 편치 않다고 했다. 이제 나도 결혼 상대를 구해야겠다고 하니, 그는 대뜸 요즘 내가 꽃밭에 있으니 알아보겠노라고 했다. 그냥 해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은 사람이 있으니 한 번 만나보라는 게다. 그때 김민남 선생이 대구교대 교원양성소에서 강의를 하던 차에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던 게다. 그 자신도 총각인 터에.

 

어쨌든 김민남 학형의 소개로 시내 아카데미 극장 옆 다방에서 지금의 내 마누라인 최영숙이라는 아가씨를 처음 만났다. 그게 아마 1969년 초가을 쯤 이었을 게다. 집사람은 나를 처음 만난 인상을 전형적인 한국남자랬다. 그 말 속에는 좀 촌스럽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그때 나는 공부하느라 좀 초라한 신세였다. 대구토박이어서 인지 처녀 때 집사람은 나보담 세련되고 차분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겨보니 생각보다 성격이 좀 급한 면이 있고, 극장에 가서 자리 찾는 걸 보니 아주 재빨랐다. 현실적 판단이 빠르고 비교적 정확한 사람이다. 나와는 개성이 상당히 다른 면이 있지만, 내 단점을 보완해 주는 배필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일요일 오후 2시에 주로 시내 떡집에서 만났다. 내가 떡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두루 알려졌다. 집사람이 하양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교직생활을 할 때 나는 하양까지 퇴근시간에 맞춰 집사람을 만나러 가곤했다. 평생 처음 열애를 한 게다.

 

나는 1971년 2월에 경북대 교육대학원 학위기 제1호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에 대해 칭찬에 인색한 김봉수 지도교수께서도 심사위원들의 평이 좋았다면서 격려해 주셨다. 내가 대학원을 마치는 무렵 대구대에도 임시교원양성소가 개소되어 대학원을 졸업하자 바로 강의를 맡았다. 내가 처음 맡은 강좌를 어찌 감당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중등교원양성소에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어쩌면 내가 강의하는 복은 타고 났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