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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 (8) 평탄했던 교수생활: 대구대 혼란과 밤산의 추억

평촌0505 2023. 11. 16. 09:37

나의 교수생활이 평탄한 건 80년대에 종합대학으로 대구대가 급격히 발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사범대학 초대학장은 특수교육과에서 원로에 속하는 김정권 교수가 맡았고, 2대 학장은 이규식 교수가 1년씩 학장직을 각각 수행했다. 1984년 3월에는 뜻밖에도 내가 3대 사범대 학장직을 보임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 내 나이는 막 40줄에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속으로 나도 놀랐고 주변에서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태영 총장께서 모교 출신 젊은 학장을 과감히 임명한 게다. 그리고 일부 나이든 교수들은 학위가 없으면 평생 학장도 못할 거라는 자극도 받았다는 후문을 들었다.

 

내가 사범대 학장으로 재직하던 해에(1985년 가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근대특수교육을 시작한 Rosetta Sherwood Hall(1865-1951) 선교사의 외아들인 William Sherwood Hall(1893-1991) 의사가 서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내가 총장님께 전해드렸더니, 서울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로 우리대학에 다녀가시도록 초청하자고 제의하셨다. 그 일이 성사되어 홀 여사의 유족(아들 내외와 그 손자)을 모시고 대명캠퍼스의 사범대 1호관을 ‘Rosetta Sherwood Hall 기념관’으로 명명하고 ‘홀(Hall) 역사 자료실’을 건물 1층에 마련해 내가 직접 관리했다. <R. S. Hall 기념역사자료실>을 마련하고, 그 소식이 알려지자 외부에서도 귀한 자료를 보내왔다. 2001년 사범대학이 경산 캠퍼스로 옮김에 따라 ‘홀 역사자료실’에 소장된 자료는 모두 점자도서관으로 이관하였다.

 

나는 딱 1년만 하고 학장직을 내놓았다. 원래 3대부터는 2년 임기를 채울 수 있었지만, 뭣보다도 젊은 나이에 학장실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전임 학장의 전례도 있었고, 또 내 뒤에 학장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기다리기도 할 터였다. 이 무렵 나는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로 승진했다. 이처럼 대학의 발전과 더불어 나의 교수 경력도 평탄하게 쌓여갔다. 한편, 이 무렵(1980년대 중반) 대학가에는 민주화 바람이 일어 교수들이 ‘교수협의회’라는 걸 만들어 대학 행정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그런 움직임이 일어났다.

 

우리 대학에서도 1986년 인문대학을 필두로 교수협의회가 결성되고, 이어 사범대에서도 교수협의회를 결성했다. 사범대에서 초대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내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구대 전체 교수협의회가 결성되어 초대의장에 인문대 권재선 교수가 맡고, 내가 공동 부의장이 되었다. 교협을 결성하고 보니, 자연히 대학본부와는 이런저런 긴장관계가 유지되는 형국이었다. 나는 중도 입장에서 교수협의회와 대학본부 간의 원활한 대화 창구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우리에게 갈등이 있는 곳에 중도는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 초기에 교협에 참여하고, 나는 다시 평교수로 연구실을 지켰다.

 

불행하게도 이 무렵 대구대 이태영(李泰榮; 1929-1995) 총장의 건강이 집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태영 총장은 한국사회사업대학 설립과정에서부터 실질적으로 대학행정 책임을 맡아온 터였다. 특히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행정업무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나, 종래에 해오던 대로 모든 것을 본인 중심으로 결정하고 집행해왔으므로 자연히 건강에 과부하가 된 게다. 특히 대학 민주화 바람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구대에서는 총장 자신이 선두에서 모든 방패 역을 맡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내가 보기에 누적된 과로에다가 대학 민주화에 따른 학생들의 거센 항쟁을 직접 감당해야 했던 그런 상황에서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던 게다. 황용수 교수는 <이태영 박사의 생애>(2022)에서 1988년 5월 대명동 캠퍼스 중강당에서 전체 교수들과 나눈 작별인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교수님 여러분, 저는 영광학원 설립자인 저의 가친 이영식 목사님의 뜻을 이어 이 학원과 대구대학교를 발전시키려고 온몸과 정신을 바쳐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저의 뜻과 행적을 이해하시고 이 대학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동참하는 마음으로 애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당부 말씀을 남기고 이태영 총장은 불편한 몸으로 강당을 떠나셨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길로 대구 동산의료원에 잠시 머물렀다가 연세대 세브란스의료원으로 옮겼다. 그해 10월 어느 주말 집사람이 내게 “당신은 총장님 병문안 간다더니 언제 갈라요!”라며 나를 나무란다. 어차 싶어 나는 그날 바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간호원이 3일전에 미국으로 떠났다고 일러준다. 우리학과에서는 김정권 교수가 과를 대표해 진즉에 병문안을 다녀오신 터라 나는 차일피일 하다가 그만 문병할 기회를 놓친 게다. 혼자 허탈한 맘으로 내려오면서, 그래도 병원에 갔다 온 것으로 나름 위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 두고두고 평생의 회한(悔恨)으로 남아 있다. 그로부터 총장님은 7년간이나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1995년 11월 29일 육신의 헌 옷을 벗으셨다.

 

나는 1987년 여름에 대명동 파크멘션에서 파동 대자연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때 이사를 하고 조금 여유 돈이 있어, 집사람이 시골에 산이나 하나 사자고 했다. 집사람은 대구 토박이어서 시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어찌 그런 생각을 냈는지 모르겠다. 내가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 어느 날 주말에 집사람이 운동화를 신고 혼자 현관을 나서 길래 내가 놀라 함께 가보자고 했다. 임야를 소개하는 사람이 자기 차로 고령을 지나 수륜면 수륜리 뒷산에 있는 밤나무 산이 하나 나와 있다고 했다. 그 때 수륜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홍수로 내려앉아 가보지도 않고 그냥 계약을 했다. 집사람도 다시 나를 데리고 나오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그렇게 계약을 한 게다. 나는 수륜 밤산은 아예 집사람 명의로 처리 하도록 했다.

 

어쩌다 집사람이 밤나무 산 주인이 된 게다. 주인정신은 놀랍다. 전혀 농사일을 하지 않고 자란 집사람이었지만, 어찌해서 일 잘하는 친구 두 명을 사귀어 그들과 함께 수륜 밤나무 산에 밤 수확을 하러 다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산에서 일하다가 시간에 맞춰 다시 버스를 타고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 괴력을 발휘하는 노동이다. 내가 그냥 보기가 안쓰러워 중소형 차를 따로 구입해서 직접 운전해 다니도록 했다. 물론 주말에는 나도 밤산에 가서 함께 일하고 거기 농막에서 묵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내외에게 80년대 말에서 약 15년간 ‘가을의 전설’은 익어 갔다. 후에 집사람이 서예를 하러다니면서 호를 하나 지어달라기에 ‘栗井’이나‘栗亭’중 하나를 택하라니, 자기는 정자에서 쉬는 게 좋다면서 ‘율정’(栗亭) 쪽으로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 밤산 덕분에 중년 이후의 내 건강도 좋아졌다.

 

그러던 중 나이 들어 밤산에 가서 일하기도 좀 부담스러운 터에 2006년 봄부터 손녀 지현(志炫)이를 우리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집사람은 딱 밤산 일을 접고 손녀 돌보는 일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집사람은 무슨 일을 하면 철저히 하는 완벽주의자다. 그게 장점일수도 있지만 내게는 피곤한 면이 있다. 할머니로서는 밤농사보다도 손녀농사가 중하다는 게다. 그로부터 밤은 주변 동네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그냥 주어가게 두었다. 어쩌다 주말에 내가 아들이랑 함께 가서 우리 먹을 밤을 주어오곤 했다. 그 무렵 태균이는 서울서 경영컨설팅 분야에서 일하면서 나의 회갑 때(2005)는 집사람과 함께 서부유럽 중심으로 해외여행을 보내 주었다. 그 후 태균이는 기업은행 쪽에서 컨설팅 담당을 하다가 지금은 아예 은행 쪽으로 자리를 굳혔다.

 

2005년에 내 회갑기념으로 <삶의 여정>(2005)이라는 작은 책을 냈다. 그리고 내게 박사과정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팔공산 호텔에서 회갑기념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집사람 회갑 때도 최영숙의 <삶의 여정>(2009)이라는 작은 책을 편집했다. 앞에 집사람 중심으로 가족들의 화보 사진을 넣고, 최영숙의 삶의 여정을 정리했다. 이어 내가 ‘아내 최영숙에 대하여’를 썼다.

 

이 책에서 태균이는 어머니가 밤산에 일하는 걸 보고 ‘철녀’(鐵女)라는 생각이 들었고, 동대구역 노숙 할머니를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어머니를 보고 ‘생불’(生佛)같다는 생각을 했단다. 태영이는 엄마는 언제나 학교에 갔다 오면 나를 기다렸다가 간식을 챙겨주고, 비가 오면 어김없이 학교 앞이나 정류장에서 항상 미소 가득한 얼굴로 날 반겨준 따뜻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유학할 때(석사과정)는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다고 엉엉 울었더니, 그래 힘들면 학기 끝내고 그냥 돌아오라고 위로해 주더란다. 집사람은 아이들에게는 인자했지만, 내가 밖에서 술 먹고 늦게 귀가하면 퍽 싫어했다. 그래서 나도 2차까지 술자리에 가는 걸 가능하면 절제했다. 젊어서는 이런 일로 지독하게 싸우기도 있다.

 

40대에서 50대 중반까지 내 삶은 여전히 가정과 연구실 중심으로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졌다. 이 무렵 중학교 동기들 가운데 써클 활동을 하던 멤버들이 함께 만나는 그런 모임이 있었으나,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한 번은 그 모임에 참여하는 하주라는 여친이 내게 “네는 교수가 되더니 사람이 바보스러워졌다”는 식으로 불만을 늘어놓는다. 사실 그런 모임에 가서 자고 오는 걸 집사람은 퍽 싫어했다. 나도 마누라가 싫어하는 터에 굳이 놀러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들에게 너라면 어찌하겠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냥 가고 본단다. 이런 게 아들과 나의 세대차이인지 성격차이인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