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이후의 내 삶은 자유시간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과 신체적으로 노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내게 자유시간이 늘어났다는 건 결국 자유롭게 읽고 쓰는 시간이 늘어난 것을 의미한다. 정년 후에 내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빈도는 계속(아직은) 상승하고 있다. 그래서 집사람은 나보고 혼자서 얄밉게 시간을 잘 보낸다고 꼬집는다. 그게 칭찬인지 불만인지 내게는 아리송하다. 그리고 정년 이후에 나는 얼마간은 집사람과 여행하는 기회도 늘어났고, 혼자서 산책하는 게 일상화되고 있다. 여기 ‘얼마간’이라는 건 정년 직후에 여행 빈도가 늘어났다가 나이가 들면서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코로나 환란이 크게 작용한 탓이기도 하다. 비교적 힘들다는 남미여행과 아프리카 일부 여행도 정년하고 진즉에 손녀 랑 세 사람이 함께 다녀왔다. 손녀 지현(志炫)이는 우리 집 오아시스다. 손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서 자랐다. 집사람은 손녀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나도 손녀 지현이를 엄청 사랑하지만 집사람과는 결이 좀 다르다. 우리 집에서 손녀가 차지하는 위상을 내 블로그에 올린 <손녀가 자라고 보니>의 일부를 좀 길긴 하지만 가져온다.
손녀 지현(志炫)이가 열두 살배기 5학년이 되더니 지금은 키가 제 할머니를 능가한다. 하지만 등치만 컸지 내가 보기엔 아직 어린 아이다. 일전에는 경산정보도서관에서 내 도서카드로 손녀가 보고 싶은 책을 빌려와서는 막상 반납 통보가 오니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다. 학교에서 다시 찾아보라고 일러주고 집에도 두루 찾아봐도 책이 보이질 않는다. 영락없이 책이 분실된 터라, 내가 시내 교보문고에 가서 손녀가 잃어버린 책을 다시 구입하고 간 김에 내 책도 한 권 뽑아왔다. 손녀가 내 이름으로 빌린 책이니 반납보상도 내가 도서관에 찾아가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오전에 교보에 갔다가 오후에 도서관에 갔다 오니 그렇게 나의 하루 일과가 훌쩍 가버린다.
만약 집안 식구 중 다른 사람이 그런 일로 내 시간을 빼앗았으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손녀가 한 일이니 그냥 넘어갔다. 근데 손녀가 혼자 책가방을 뒤적이더니 “어! 도서관 책이 여기 있네.”라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게 아닌가. 지현 아범이 도서관 책값은 본인 용돈으로 물게 해야 책임감이 생긴다는 말이 생각나서, 내가 “그 책값은 내 카드로 처리했는데...”라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할아버지가 당연히 처리한 일을 뭐 새삼 말하느냐는 식이 되어버려 나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손녀의 그 무심증이 싫진 않다. 참 천진하기도 하고, 할아버지를 그처럼 막역한 사이로 생각해 주니 싫지 않은 게다.
손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서 집사람이 온갖 정성으로 키운 아이다. 그래서 딸 태영이는 어머니에게 딸이 한 사람 더 생겼다고 제 어머니를 놀릴 정도다. 손녀와 함께 있으면서 난 마누라를 잃어버린 격이다. 그만큼 집사람은 손녀에게 모든 걸 바치고 산다. 집사람만큼 내가 손녀에게 정성을 쏟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내심 손녀를 무척 좋아한다. 그 방식이 다를 뿐, 그 사랑의 깊이는 서로가 결코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내리 사랑은 짝사랑이라 하지 않는가.
손녀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때도 꼭 세 사람이 함께 간다. 지난겨울에는 집사람에게 모처럼 딸과 여행하랬더니, 결국엔 손녀랑 세 사람이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딸도 우리 내외 못지않게 고모로서 지현이를 끔찍이 사랑한다. 딸이 미국서 공부할 때도 일부러 제 어머니랑 손녀를 그곳에 오게 해서 3개월간이나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 여행을 하면 손녀가 어릴 적에는 한 방에서 잠을 잤으나, 이제는 덩치가 어른처럼 커져 나는 혼자 딴 방을 사용해야하는 형편이 되었다.
손녀는 어릴 적부터 잠자리에 들면 내가 동화책을 읽어 주던 게 버릇이 되어 지금도 잘 때는 나를 찾는다. 손녀가 유치원 다닐 때와 초등 저학년까지는 잘 때,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다. 근데 그 나이가 지나니 이제는 책 읽어 주는 대신에 발마사지를 해 달란다. 자라면서 성장 통이 있는지 발바닥이 아프다고 해서 내가 주물러 준 게 그런 식으로 발전된 게다. 어쩌다가 내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어김없이 내 폰 벨이 울린다. 자기가 잘 시간인데 왜 할아버지는 아직 안 들어오느냐고 따진다. 그러면 나는 두 말 없이 금방 들어갈게 먼저 자러 가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어떨 때는 손녀가 잠자리에서 미처 잠들기 전에 내가 일어서면, 자기 옆에서 자라면서 내 손을 잡는다. 그럴 땐 영락없이 손녀 옆에서 나도 함께 잠들어 버린다. 새벽에 화장실 볼일 보러갔다가 내 방에 가서 자면 다음날 손녀는 왜 할아버지는 나랑 함께 자지 않았느냐고 따진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기지만 그렇게 말하는 손녀가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근데 초등 5학년 2학기가 되니 손녀 키가 집사람보다 커고, 밖에서 손녀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우리보다도 더 많이 먹는다. 외식하면서 손녀가 잘 먹는 걸 보면 우리 내외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속으로 흐뭇해한다.
집사람은 손녀 공부 가르치는 일에 열심이다. 손녀 공부문제에 대해 집사람은 전형적으로 간섭형이고, 나는 방임형에 속한다. 관심을 갖는 건 좋지만, 너무 통제하면 짜증난다. 짜증나면 공부는 역효과다. 방임한답시고, 무관심하면 최악이 될 위험이 있다. 관심을 가지되, 통제하지 않는 자녀교육 그게 참 어려운 게다. 원래 교육 중에 으뜸 되는 교육은 말로하지 않는 ‘무언지교’(無言之敎)다. 도올 김용옥은 나이가 들면서 멀리 크게 내다보고 살란다. 일상의 작은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사는 모습 그리기”를 하랬다.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살기는 우리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삶을 안겨 준단다. 자라나는 손자 손녀에게는 손 씻어라, 공부해라는 등의 일상적 잔소리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애로운 마음으로 던지는 한 마디가 그들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게다.
근데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애로운 마음이 그냥 솟아나는 게 아니다.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토양, 마음 샘의 깊이에 따라 그 ‘자애’(慈愛)가 천양지차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나 자신과 우리 내외를 반추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집사람의 손녀에 대한 애정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손녀도 “할머니, 사랑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손녀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손녀 공부에 대한 집사람의 집념도 대단하다.
손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우리 내외는 그 반대의 속도로 늙어간다. 그러니 세대 간 교감보다도 이질감이 늘어나기 십상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필수조건으로 건강과 경제,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흔히 말한다. 정년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마누라와 소통할 기회가 늘어날 것 같지만, 살아보니 그게 아니다. 다만 집안일 돕는 것은 조금씩 내 몫으로 늘어난다. 집사람은 여전히 손녀에게 초점을 맞춰 살고, 나는 자리적(自利的)인 삶에 빠져들고 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손녀가 고3이 되었다. 우리나라 대학입시제도는 시험점수로 학생을 일렬로 줄 세우는 잔인한 경쟁체제다. 지옥과 같은 고3이다. 옳은 공부도 아닌 시험공부에 시달리는 손녀를 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내 하루의 주요 일과는 아침 일찍 손녀를 학교에 태워주고, 또 밤늦게 데리러 가는 일이다. 내 손으로 운전해 손녀를 도울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를 삼는다. 아마 손녀가 대학에 들어가면 우리 집을 떠나게 될 게다. 그러면 진짜 우리 내외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집사람은 손녀가 대학가면 자기 나름 안식년을 확실히 찾을 거란다. 하지만 그게 어떤 안식년이 될지 두고 볼 일이다.
내가 고3 손녀에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성격 차이가 어떤지 얼핏 물어 보았다. 손녀 왈 “할머니는 급하고 철저한 반면에 할아버지는 느긋하고 천천히”랬다. 개성이 다른 만큼 서로 간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게 부부다. 어찌 보면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부관계 속에 만사가 얽혀 있는지도 모른다. 마누라의 잔소리 땜에 가끔 짜증도 나지만, 나이 들어도 그런 잔소리를 해주면서까지 나를 챙겨주는 사람 또한 마누라뿐이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특히 부부관계라는 게 그렇다. 마누라의 잔소리가 끊어지는 날 내게 노년은 참 적막할 게다. 2023년은 우리 부부의 결혼 50주년이 되는 금혼의 해다. 금혼 즈음에 부부는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게 노년의 삶이다.
정년 후에 나의 사회 참여활동은 <지식과 세상>사회적 협동조합을 매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식과 세상>은 대구의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자생적 시민단체다. 자발적으로 출자금을 출연해 그 기금으로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든 게다. 내가 <지식과 세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조합 이사장을 맡은 김민남 선생(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과의 끈질긴 인연 때문이다. 대학원시절에 만난 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니, 우리의 만남이 반세기를 넘어섰다. 지금은 조합에서 함께 일하면서 현직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자주 만난다.
우선 조합에 가면 좋은 사람들과 관계가 유지되니, 나의 사회생활 폭과 안목이 넓어진다. 나이 들어 직장동료 외에 새로운 만남의 관계를 유지하는 건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란다. 조합에 참여하다보니 ‘화요모임’이라는 게 결성되어 매달 첫째 주 화요일에 대구지역 진보적 성향의 명예교수들과 종교지도자가 만나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고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담론을 나눈다. 그리고 코로나 환란 와중에도 최근 3년 이상 계속 박찬석 선생(경북대 전총장, 지리학)의 <세계지리산책> 강좌가 매주 화요일 오후에 우리 조합에서 열리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연령대와 하는 일이 모두 다양하다. 그리고 매주 함께 만나다 보니 이제는 서로 친화력이 강하다.
나는 <지식과 세상> 조합에서 초대 이사로부터 운영위원에 이르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조합에서 내가 지식기부 차원에서 처음 한 강의가 2014년 봄에 시작한 ‘마음으로 고전읽기’였다. 이 때 내가 선정한 고전이 <대승기신론>, <노자 도덕경>, <중용>, 그리고 <도마복음>이었다. 동양고전에 중점을 두면서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성을 반영하게 되었다. 이들 고전은 정년 무렵부터 내가 관심을 가지고 해독한 것이다. 나는 <지식과 세상>에서 함께 한 ‘마음공부’를 정리하고, 정년 이후(2012.08) 내가 발표한 말과 글을 엮은 특수교육 담론, 그리고 내 블로그에 올린 글 가운데 책 성격과 연관된 에세이를 골라 『사람이 하늘』(2014)이라는 책을 늦가을에 <한국특수교육문제연구소>(자율 연구소로 내가 초대 연구소장을 맡았음) 이름으로 출판했다. 책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은 이 무렵 내가 ‘동학사상’에 많이 경도 되어 있던 탓이기도 하다.
조합에서 이런 책 읽기 공부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동양고전 읽기 공부는 2〜3년 간 지속 되었다. 그 때 원문으로 읽는 동양고전 가운데 <금강경>, <중용>, 그리고 <동경대전>은 내가 주선해 진행을 했다. 덕분에 한문 해독 공부에 집중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들 고전 가운데 <대승기신론>과 <중용>은 ‘종교-철학-교육’을 하나로 꿰어 회통(會通)하는 것이어서 내가 동아시아사상에 기반한 한국특수교육 담론을 정립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한국 특수교육철학의 정립: 희망과 존엄의 교육」(특수교육저널: 이론과 실천, 20(3), 2019, 261-288)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윤문하는 과정에서 강창욱 교수(강남대 명예교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코로나19 와중에 조합에 모여 활동을 하는 데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 대안으로 줌이나 유튜브를 활용한 온라인 강좌를 개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그막에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최소한 따라는 가야했다. 조합에서 유튜브 강의를 내게 부탁했다. 나는 대구사이버대학에서 온라인 강의한 경험도 있고 해서 수락했다. 새로운 형식도 필요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콘텐츠 구성이다. 나는 좀 지난 책이긴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박홍규 역, 1991)을 북 리뷰 형식으로 유튜브 강의로 네 차례에 걸쳐했다. 내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정리한 <오리엔탈리즘>의 북 리뷰는 지금도 내 블로그에서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 그 후 나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얻은 지적 자극을 기반으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국특수교육 담론」(특수교육저널, 21(2), 2020, 191-213)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지식과 세상>에 참여하면서 내가 느끼는 또 하나의 보람은 ‘작은책’ 기획시리즈의 편집을 맡은 것이다. 코로나 와중에 온라인 수단이 일상화되고 디지털문화가 득세를 하지만, 종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경시할 수 없다. 김민남 이사장은 <지식과 세상>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틈새를 노리는 작은 책을 기획․출판해야 한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나도 거기에 공감한다. 하지만 조합 내부에서 대부분의 운영위원들은 출판에 따른 경비지출 부담만 떠안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물론 요즘 세상에 책 출판을 통해 수익을 올린다는 건 지난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추진하는 게 우리 <지식과 세상>의 할 일이다. 서구사회에서 쿠텐베르크의 도서출판혁명이 없었다면 지식의 민주주의가 불가능 했을 게다. 그 연장에서 종교혁명도 계몽사조의 보급도 가능했던 게다.
<지식과 세상> 기획 시리즈의 첫 권으로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 김윤상 선생(경북대 명예교수)께서 『토론으로 찾아가는 이상사회』(2021)를 집필해 주셨다. 제2권부터는 우리 조합에서 기획과 출판까지 맡아 자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획시리즈로 모두 여섯 권의 책을 냈는데, 나로서는 『어느 지질학자의 삶과 앎』(양승영, 2021), 『교육은 교육전문가에게, 왜 그래야 하는데』(김민남, 2022), 그리고 『노동가치의 탐구』(김영용, 2022)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양승영 선생은 세계적인 지질학자로 우리나라에서 공룡 발자국과 공룡 알을 세계지질학계에 알리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김민남 선생은 평생 경북대에서 교사를 길러내는 데에 헌신해 왔고, 그 연장에서 현장교사들과 나눈 그간의 대화에 기초해 이 책을 냈다. 김영용 선생은 그간 정치경제학을 공부해온 결실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앞부분(난해하기로 소문난 내용)을 독자들이 비교적 쉽게 해독할 수 있게 주석해 놓았다. <지식과 세상>에서는 지난 5월에 김민남 선생과 김영용 선생 책에 대해 북 콘서트 형식으로 발제와 토론회를 가졌다. 그 주요 내용과 느낌을 내 나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김민남 교수의 북 콘서트>
의례적인 출판기념회가 아니었다. 사회적 협동조합 <지식과 세상>에서 기획 출판한 작은 책 북 콘서트가 지난 금요일(5/12) 열렸다. 경북대에서 평생 교사를 길러내고 교육학을 연구한 김민남(경북대 명예교수) 선생의 『교육은 교육전문가에게, 왜 그래야 하는데』(2022)를 둘러싼 담론의 장이다. 저자는 발제에서 “교사라면 당연히 잘 가르친다. 그걸 만족하고 자랑하는 것은 우습다. 서로 이야기해 보고, 아름답기도 하고 모질기도 한 세상을 콕콕 찔러보는 사상이어야”한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교육의 중대한 시험대는 “개인이 몸담은 세계에서 그가 어떻게 처신할지를 가르치는 일에 생기 있는 도구 혹은 제도인지를 가리는 일”이랬다.
토론에 참여한 패널 세 사람(송진경, 신경진, 조세형)은 모두 현장 교사이면서 김민남 교수의 옛 제자들이다. 그들은 교육전문가인 교사들에게 교육을 맡겨서 그 교육이 과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엄중한 질문에 스스로 무거운 마음이었을 게다. 게다가 저자는 “자책하지 않는 전문가는 삶을 되돌아보지도 않는다”고 책의 부제로 대못을 박아 놓은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현장에서 공교육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모두에게 열린 교육이 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삶의 경험에 내재하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했다. 해서 교육문제는 곧 사람문제이고, 칸트와 페스탈로치에 기대어 인술(art)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듀이의 교육론은 미국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모반’(revolt)으로 읽어도 좋다고 했다.
그는 “교육은 교사의 교육과정 작업의 실천/실험의 장이고, 학교는 교사의 교육과정 작업을 매개로 아이들의 학습의욕을 불러내는 전체적 기획”이랬다. 그는 교사에 의해 간편하게 관례화된 수업으로 축소된 교육을 나무란다. 내용은 방법에 선행한다. ‘관례화 된 수업으로 축소된 교육’에서 자칫 그들의 교육과정 활동이 ‘무엇을 가르칠 건가’보다 ‘어떻게 가르칠 건가’는 것을 간편하게 기법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고한다.
패널에 참여한 교사들은 저자의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그들에게 숙명처럼 지워진 교직의 ‘전문성’을 다시금 겸허히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어느 듯 노교수가 되어버린 김민남 선생의 북 콘서트를 지켜보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길이 세삼 아름다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김영용의 <노동가치 탐구>
<지식과세상> 기획시리즈 제6권으로 김영용 교수(경북대 강의)의 <노동가치 탐구>(2022)가 지난 연말에 나왔다. 나는 기획시리즈의 편집책임자로 이 책의 집필과 수정보완 과정에서 저자의 ‘노동가치’를 줄곧 지켜보았다. 첫 저서이기에 김영용 선생이 마지막 교정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제1권 1,2,3장에 대한 주석이다. 상품과 화폐를 다루는 『자본론』제1권 1편은 그 내용이 난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이런 텍스트를 읽을 때 “여러 번 읽으면 그 뜻이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말은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누군가 능숙한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역할을 솜씨 있게 수행하기 위해 기필되었다. 저자는 『자본론』에서 다루는 ‘상품‧교환‧화폐’의 내용을 가능하면 쉬우면서 풍부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법칙의 연관 속에서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 책은 독자들이 『자본론』에 대해 가지는 가장 높은 진입장벽인 ‘가치론’ 논의를 보다 명확히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저자는 『자본론』독서의 기초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집필의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고 밝힌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르크스가 했던 것처럼 ‘상품‧교환‧화폐’가 자본주의 경제운용 과정의 기초이면서 운동의 내용을 잘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충실히 드러내고자 했다.
저자는 이 책의 출판을 발판삼아 앞으로 『자본론』의 완전한 주석서를 집필하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에게 필생의 과제가 될 터이다. 책의 추천사에서 정성진(경상대) 교수는 이 책은 오늘날 금융위기의 구조를 해부하고 포스트자본주의의 대안을 구상한 것이어서 자본주의와 고투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했다. 또 조복현(한밭대)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자본론』의 지식과 보충 논의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매우 유익한 가이드가 된다고 평했다.
집필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한만큼 김민남 선생의 책은 금방 2쇄를 찍어냈다. 김영용 선생 책도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 나는 ‘작은 책’ 기획시리즈의 발간을 통해 편집위원장으로서 출판에 따른 산파역의 일부를 감당하게 된 것을 보람으로 삼는다. 세월이 흘러 저자는 세상을 떠나도 독자들에게 계속 읽혀진다면, 그 책은 복 받은 책이다. 그리고 저자는 의미의 수호자로 후대에 기억될 것이다.
<지식과 세상>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약 5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기후변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진즉에 기후문제가 지구차원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걸 직감은 했지만, 체계적인 관심을 가지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클라이브 해밀턴(C. Hamilton)의 『인류세: 거대한 전환 앞에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Defiant Earth: The Fate of Humans in the Anthropocene)』(정서진 옮김, 2018)을 읽은 게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내가 지구와 인류문제를 유기적 연기(緣起)로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2019년 2월에 강창욱 교수(강남대 특수교육과 명예교수) 정년퇴임을 기념해 제자들과 네팔여행을 했다. 강 교수가 10년 이상 네팔 특수교육 분야에 봉사활동을 한 덕분에 우리는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수제자인 강 교수 덕분에 네팔 교육부 직원들에게 특강을 해주고 교육부 장관을 예방하는 기회도 가졌다. 여행 중에 틈틈이 해밀턴의 <인류세> 책을 읽고, 강 교수에게 그 내용을 소상히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그 후 2019년 가을에 <지식과 세상> ‘책읽기 교실’에서 다시 이 책을 리뷰해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서평 형식으로 <대멸종: 지구운명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제목으로 내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2019.10.22).
홀로세(Holocene)의 기후 안정기는 지나가고 인간의 힘이 너무 비대해짐에 따라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하였다. 해서 ‘인류세’의 도래는 곧 기후위기를 필연적으로 야기했다. 기후위기는 인류 생존과 직결되는 실존적 문제이자 재앙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곧 인류세를 향한 경고장이다. 지구로부터 우리 인류에게 이런저런 가혹한 청구서는 계속 날라 올 게다. 어쩔 수 없다. 인류가 저지른 자업자득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는 지난 7월 <화요모임>(2023.07.04)에서 「먹고사는 문제와 죽고 사는 문제」라는 주제로 목하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발표했다. 김민남 선생은 내가 발표한 강의를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고 치켜세워 주었다.
그러던 차에 9월에 <지식과 세상>에서 새로운 시도로 유료강좌를 개설하는데, 마침 내가 준비한 <기후위기의 인문학> 교실 강좌가 새로 열리게 되었다. 나는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통한 ‘쌍방학습’ 공동체로 이 교실을 운영할 참이다. 격주로 9〜10월에 걸쳐 (1) 빅히스토리 속의 호모 사피엔스, (2) 인류세와 기후위기, (3) 인류세는 자본세다, (4) 기후정의: 그 실천과 과제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다.
이어 11〜12월은 역시 격주로 기후위기와 인류세에 대한 책들 가운데 위의 해밀턴 책 외에 그레타 툰베리 외 <기후 책>(2023, 이순희 옮김)과 반다나 시바의 <누가 지구를 망치는가>(2021, 추선영 옮김)를 집중적으로 읽고 논의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책읽기와 그 해설은 내년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수강하는 장애인야학(질라라비장애인야학) 쪽 사람들이 11월과 12월에는 자체 행사가 많다고 한다. 내년에는 장애인야학에 내가 찾아가 강의를 해줄까 싶다.
이런 식으로 <지식과 세상>은 내게 꾸준히 평생학습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조합에서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생산적으로 노년을 보내는 데에 도움을 얻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지식과 세상>과 인연이 이어질지 모르겠다. 어떤 형태든 나에게 참여의 인연은 지속될 게다. 그리고 <질라라비장애인야학>에 찾아가는 지식기부 강의도 생각 중에 있다.
정년하고 특수교육과 교수들 중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 끼리 매월 한 번씩 만나는 소모임이 약 5년 정도 이어지고 있다. 김정권 교수는 대구대 특수교육과 원로 교수이시고, 김보경 교수는 특수교육 분야에서 해외유학 1세대다. 두 분은 나보담 여덟 살이나 위다. 후학들이 나를 대구대 특수교육 1세대로 부른다. 모임의 총무 격인 김용욱 교수는 특수교육공학 1세대로 나보다 9년 아래다. 연령 폭이 크지만 4김은 같은 노년이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론을 나눈다. 어쩌다 대전서 김춘일 교수가 내려와 동석하기도 한다. 나이가 위인 두 분 교수가 건강한 동안에는 우리의 모임도 건강하게 이어질 게다. 나이 들수록 만남의 인연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