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까? 이것은 내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내 삶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이다. 크게 세 갈레로 이 문제를 정리해 보련다. 노년을 지혜롭게 보내고 마무리하기(일상적), 당면한 기후위기를 완화하는 일에 참여하기(사회적), 그리고 내면적으로 상승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정신적)이다. 물론 서로 연관되지만 편의상 이 세 갈레로 나눠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어찌하면 노년을 지혜롭게 보내고,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것인가? 정답이 없다. 게다가 장담할 수 없는 필생의 과제다. 오래 사는 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노년이 저주가 아니기 위해 흔히 경제적 안정과 건강 문제를 든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건강상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노년이 행복할까?
하버드대 인생성장보고서인 『행복의 조건』(2010, 조지 베일런트, 이덕남 옮김)은 70여년을 종단적으로 추적한 ‘노년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2022년 현재까지 무려 55쇄나 출판되었음). 총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기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이 연구가 수행되었다. 저자 베일런트(G. E. Vaillant)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보다는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찾아낸 주요 결과들은 이렇게 요약된다.
• 우리에게 일어났던 나쁜 일들이 결코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 인간관계 회복은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루어진다.
• 50세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면 80세에도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다.
• 알코올 중독은 분명 실패한 노년으로 이어진다.
• 은퇴하고 나서도 즐겁고 창조적인 삶을 누린다면, 수입을 늘리는 것보다 한층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 객관적으로 신체건강이 양호한 것보다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성공적인 노화에 훨씬 더 중요하다.
• 긍정적 노화는 사랑하고 일하며,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면서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는 것이다.
• 노년에도 계속해서 인간이 성장해 간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년의 발달과업은 다음 세대에게 과거의 전통을 물려주는 ‘의미의 수호자’(keeper of the meaning)가 되는 것이다. 에릭슨은 노년의 발달과업으로 ‘통합’(integrity)이라는 과업을 완성함으로써, 개인의 삶은 물론 세상의 평온함과 조화로움을 얻는다고 했다. 그는 “세상의 이치와 영적 통찰에 도달하는 경험”이 바로 ‘통합’이랬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며(천상천하유아독존), 한 번 태어나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 ‘통합’의 미덕은 바로 ‘지혜’다. 에릭슨은 “마지막 기력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지혜는 남아 있다. 노년은 지혜를 통해 통합을 꾸준히 경험하고 성취해 갈 수 있다.”고 했다. 노년에 잘 사는 것은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잘 늙는 것’이다. 미국 노년학회는 “인생에 세월을 보태지 말고, 세월에 인생을 보태라!”고 했다. 노년에는 지혜와 마찬가지로 영성과 종교적 관심도 깊어진다.
우리는 나이 듦의 성숙을 통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가치를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다. 품위 있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적 차이들은 바로 그 비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노년은 사바세계에서 열반을 만드는 삶(수행)의 과정이다. 진흙탕이 아니고는 연꽃이 피어 날 수 없는 이유다. 과연 내게 노년은 ‘수행’(修行)의 과정인가? 내 자신에게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핀란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프링크 마르텔라(F. Martela)는 『무의미한 날들을 위한 철학』(성원 옮김, 2021)에서 우리에게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는 없다고 했다. 각자가 선택하고 경험하는 ‘인생 안에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 했다. 흔히 철학에서는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지만, 그는 내가 선택하고 경험하는 삶 속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참 신선하게 다가온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몰두하면서 추구하는 가치를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 몰입할 만한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내면화 할 때, 인생은 좋은 쪽으로 성숙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삶의 지속적 성장과 고결함을 안내하는 ‘자기결정이론’을 말한다. 그의 자기결정이론은 기본적인 심리적 필요로 자율성, 유능감, 관계 맺음, 그리고 선의(善意)로 충족될 수 있다고 한다.
나의 노년에서 의식적으로 몰두할만한 삶의 나침반은 무엇인가? ‘자율성-유능감-관계맺음-선의’를 하나로 회통할 수 있는 삶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내력과 공부로부터 연역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일지 모르겠다. 60대 이후에 내가 선택한 종교와 철학의 공부는 대승기신론-중용-도마복음-동경대전으로 이어지는 궤적을 이루고 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 다원성을 회통하는 통약성이 있을 게다. 그리고 그 통약성에 노년의 내 삶을 안내하는 ‘나침반’이 작동할 게다. 거기에 내 노년을 품위 있게 안내하는 삶의 지혜가 녹아 있을 게다.
마크 아그로닌(M. E. Agronin)은 『노인은 없다』(2019)에서 ‘창조적인 나이 듦’을 말했다. 그는 ‘좋은 부모’에 상응하는 ‘좋은 노화’(성공적 노화)의 요건으로 세 가지를 든다. 즉, (1) 질병과 장애를 겪는 위험을 피하거나 최소화하기, (2) 정신적․육체적 기능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3) 의미 있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다. 이 세상에 완벽한 노화의 답안은 없다. 긍정적인 노화는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가치 있는 ‘목표’를 선택해서 그것에 집중하는 삶이다.
나는 <지식과 세상>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성취하는 노년의 모델로 두 사람을 떠올린다. 한 사람은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지리학)이다. 선생님은 지금 80대 중반임에도 <지리산책> 교실을 20년 가까이 꾸준히 이끌어 오고 있다. <지리산책>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 그간 다섯 권의 책을 냈다. 지금도 <지식과 세상>에서 아프리카 강의를 3년째 이어오고 있다. 덕분에 나는 아프리카의 삶과 문화를 해독하는 데 이런저런 도움을 얻는다.
다른 한 사람은 <지식과 세상> 이사장으로 10년 가까이 조합을 이끌어 온 김민남 교수(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다. 김 교수는 80대 초반으로 나와는 반세기 이상이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지식과 세상>에서 함께 일하면서 현직에 있을 때보다도 더 자주 만난다. 그는 건강이 여의치 않음에도 지적․정신적 성장의 끈을 결코 늦추지 않는다. 게다가 손자에게 엄청 정성을 쏟는다. 학형으로서 혹은 옛 친구로서 김 교수의 ‘철학하는’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교감하는 것은 내게 ‘창조적인 노화’의 생생한 사례로 다가온다. 나이 들면서 만남의 인연은 내게 이런 식으로 삶의 나침반을 안겨준다.
코헨(G. Cohen)은 『창조적 노화』(2000)에서 나이 듦이 안겨주는 경험의 풍요성은 곧 노년에 창조성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했다. 그는 ‘창조적 노화’는 노년에 스스로의 의욕을 자극하고, 몸의 건강유지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지적 유산을 남기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우리에게 ‘지혜로움’은 곧 나이 듦의 과정이자 결과다. 에릭슨은 노년을 자기 일생을 회고하면서 마무리하는 단계로 보았으나, 코헨은 서로 중층적으로 지속되는 인간의 ‘잠재력 단계’로 노년의 과정을 제기했다. 이것은 인간의 생애에 걸친 지속적인 지혜의 증진을 반영한다. 나는 에릭슨보다 코헨의 입장에 더 관심이 쏠린다. 노년에도 의미 있는 경험은 후성유전자로 계속 내 속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년을 점검해 보고 싶다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단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지금까지 무엇을 배우고 성취하고, 경험했는가? 이 질문의 답은 ‘지혜의 비축분’을 드러낸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삶을 어떤 활동에 가장 많이 투여하며, 누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 현재 주로 무슨 활동을 하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과 열정을 쏟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내게 ‘삶의 목적(방향)’을 안내해 준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경험해 보고 싶은가?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이런 일련의 질문은 노년의 내게 계속 제기되는 숙제다.
둘째로 노년에 내가 우리 사회와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물론 나이 들어 내 삶은 자리행(自利行)을 그 체(體)로 삼으면서 부수적으로(결과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따라붙게 해야 할 게다. 나이 들어 이타행(利他行)을 앞세우는 사람일수록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의 함정에 빠져들기 쉽다. 경계할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 지구가 당면한 실존적 위기 혹은 재앙으로서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서만은 노년에 내가 작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인류차원의 죽고 사는 문제다. 해서 기후위기는 당대 내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정언명령’이다.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환경론자도 아니다. 해방둥이로 시골에서 그냥 야생마처럼 자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하지만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무서운 속도로 산업화와 더불어 고도성장을 했다. 이른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이 급속하게 추진되면서 이후 약 50년간 ‘압축성장’의 기적을 보였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만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은 지구에 엄청난 탄소발자국을 남기는 나라가 되었다. 이른바 기후악당 국가다.
지금 인류는 지구가 자기 시스템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데에 적정한 것보다 1.7배나 생태용량을 초과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구에 사는 80억 인구가 소비하는 자원이 지구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 생태용량을 초과(1.7배) 하고 있다는 게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 수준으로 살려면 지구가 3.5개 이상 필요하고, 미국 사람들 수준으로 살면 5개 이상의 지구가 있어야 한단다. 우리가 월세를 못 내서 쫓겨나면 다른 집을 구할 수 있겠지만, 지구에 빚진 것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쫓겨날 곳이 없다. 결국 우리 목숨으로 갚게 되는 공멸을 초래할 뿐이다.
세계인의 자원소비 평균치가 지구 1.7개 어치라면 내가 남기는 생태발자국은 어느 정도일까? www.footprintnetwork.org 에 들어가 육식정도, 주택유형과 크기, 동거 가족, 재생에너지 사용, 쓰레기배출량, 주당 자동차사용 거리, 대중교통 이용정도, 비행기 여행시간 등에 걸쳐 체크를 해본 결과 3.2 개 어치가 나왔다. 결국 나는 지구가 제공하는 연간 생태용량을 4월 하순까지 모두 다 써버리는 사람으로 판정되었다. 지구 전체인구의 평균 생태발자국보다 2배 가까이나 큰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산출된 결과를 보고 나는 놀랐다. 실제로 나의 생활방식은 산업사회의 소비성향에 그냥 푹 젖어 있는 게다. 속절없이 나는 지구에게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지구에게 매년 엄청 부채를 남기는 호모사피엔스가 된 게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 환란을 겪는 것도 자업자득이다. 우리 인간은 온생명 속의 일원으로 정신세계를 펼쳐나가기는커녕 암세포와 같이 온생명의 생리를 크게 교란시키고 있다. 지구가 아프면 내가 아프다.
우리 인간의 삶은 개체로서의 ‘나’ 그리고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나’ 나아가 온생명으로서의 ‘나’가 중층적이면서 동심원적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정립한다.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이 곧 내 몸이며 우주가 곧 내 집임을 투철한 앎의 눈으로 파악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적 사건이랬다. 그것은 동시에 ‘우주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개체로서의 내 삶뿐만 아니라 온생명의 주체로서 나에 대한 실존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온생명이 곧 내 몸이며 지구가 곧 내 집이라는 걸 확연히 깨치는 게 인류세(Anthropocene)에서 인간의 실존적 책임이자 도덕적 의무다. 인간의 운명은 우리가 몸담은 땅 위에 놓여있다. 내가 노년에 기후위기 문제를 절박한 사회적 과제로 삼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노년의 내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긴요하고도 지난한 숙제는 어떻게 하면 죽을 때까지 정신적 성장을 멈추지 않고 상승을 유지하느냐다. 몸과 마음은 둘이면서 하나다. 젊어서는 몸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따라가지만, 나이 들면 마음이 몸을 조절하는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 해서 노자는 내게 몸이 없다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했다. 그렇다고 노년에 몸을 위한답시고 너무 양생(養生) 쪽으로 기우는 것도 추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심리-철리(哲理)가 조화를 이루는 섭생(攝生)이 중요하다.
에릭슨은 노년에는 누구나 철학하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노년에 신체적으로는 내리막으로 하향할 수밖에 없지만, 삶의 지혜가 쌓여 나름 ‘의미의 수호자’가 된다. 해서 노년은 삶의 완성단계이자 지혜가 완숙하는 단계다. 나는 상향하는 삶의 피라미드를 다음처럼 위계화해 본다. 가장 밑변은 무의식계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본능과 감성-이성-영성으로 중층적 위계를 이루는 것으로 본다. 우리 인간은 심층의 무의식계로부터 평생 영향을 벋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의식계는 본능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는 양면성을 지닌다. 본능은 즉각적이고 야생적이지만, 본성은 즉각적이면서도 순리적․자연적이다.
해서 나는 인간의 심층 무의식계가 본능의 지배를 받느냐 본성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은 천차만별로 벌어진다고 본다. 공자는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性相近), 후천적으로 길들여지는 습성은 서로 멀다고(習相遠) 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본래성은 기본적으로 착한 것이지만, 후천적 습성이 나쁜 쪽으로 물들면 그만큼 나쁜 쪽으로 기운다는 게다. 이 대목에서 <중용> 첫 머리가 떠오른다.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누구에게나 품부되어 있는 게 인간의 본래성이고(天命之謂性), 이 본래성에 따르는 것이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이고(率性之謂道), 이 길을 부단히 닦는 과정이 교육이자 삶(修道之謂敎)이랬다.
하늘이 품부한 본래성에 따르는 삶이 상향적이기 위해서는 감성적-이성적-영성적으로 축이 이어지되, 그 과정이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이성적이기보다는 영성적인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삶이어야 할 게다. 감성은 이성과 영성을 내포하지만, 그 감성의 발현이 감정적 즉흥으로 좌우되느냐 이성적 합리로 기우느냐에 따라 우리는 감성적 존재냐 이성적 존재냐를 판가름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기능>에서 이성은 곧 내율/자율(self-discipline)에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했다. 해서 내면의 나침반에 따르는 삶은 존엄한 삶이다. 그는 다시 이성의 기능을 실천적 이성과 사변적 이성으로 대별했다. 실천적 이성은 현실세계에서 즉각적‧실천적 결정에 깊이 관여하는 반면에, 사변적 이성은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이해의 증진에 기여하는 것이랬다. 해서 사변적 이성은 이해의 완성을 지향한다. 나는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사변적 이성’의 기능에서 이성과 영성의 접합과 만남을 생각한다.
물론 영성은 감성과의 만남을 통해 돌연히 발현되기도 한다. 이른바 돈오(頓悟)다. 수운 최제우의 종교적 체험으로 표현된 ‘네 마음이 곧 내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감성적이면서 영성적 체현의 표현이다. 나는 햇살 좋은 날 산책길에서 밖의 자연과 내안의 자연(본래성)이 소통하고 만나는 것을 감지한다. 그럴 적에는 내가 대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연이 내안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른바 노년에 자연과 직거래하는 삶이다. 자연에 대한 외경은 내 영성의 성장에도 도움을 줄게다.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자연은 성스러움의 표상이다. 그리고 자연은 내 본래성의 고향이다.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인류역사에 기여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영적(spiritual) 휴머니즘으로의 전환이 긴요하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탈종교시대의 열린 종교를 위해 <종교에서 영성으로>(2021)의 전향을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23년 9월에 육신의 헌 옷을 벗고 영의 세계로 홀연히 날라 갔다.) 영성은 “인간정신이 최대한의 잠재력을 얻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
나는 기후위기 시대에 생태적 삶과 영성적 삶의 만남을 소망한다. 그 소망이 체현되는 과정이 내 여생의 숙제다. 나의 삶에서 정신적 성장은 그 끝이 없다. 그게 내 존재의 본질이자 인간됨(human being)의 삶이다. 노년에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내게 정신적․영적 성장이 긴요한 이유다.
생태적․영성적 삶의 체현을 위해 나는 붓다처럼 때로는 늙은이 노자처럼, 그리고 수운 최제우처럼 때로는 해월 최시형처럼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런 성지(誠之)의 삶 과정에 천인합일(天人合一) 혹은 천지인(天地人) 삼합의 세계가 내재할 게다. 그 과정은 지난하다. 하지만 노년에 체현하고픈 내 여생의 숙제다.
노년의 내 일과는 나이 들수록 단조롭고 좀 심심하다. 복잡하고 바쁠 필요가 없다. 단조롭고 느리게 살면서 에너지도 줄이고 쓰레기를 줄이는 게 다음 세대에게도 좋을 게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로운 노년이고 싶다. 상대방이 어찌 느끼는지 모르겠다. 근데 나랑 가장 가까운 마누라에게는 이게 잘 통하지 않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젊으나 늙으나 장담하기 어려운 게 부부관계다. 금년에 우리는 결혼 50주년 금혼(金婚)을 보냈다. 함께 건강하게 살아 간다는 것만으로 행복인줄 알아아야 할 나이다.
최근 내 일상은 이렇다. 다섯 시가 좀 지나면 잠이 깬다. 해가 짧아지면 아마 6시가 지나야 일어날 게다. 일어나면 몸을 추서려 화장실에 간다. 화장실 볼일 보고 바로 양치질을 한다. 양치질이 끝나면 다시 소금물로 입안과 목을 헹군다. 그리고 구슬처럼 둥근 깔게 발판에서 발바닥 자극을 주는 뛰기 걸음을 가볍게 한다. 창문을 활짝 열고 해가 뜨는 동녘을 보면 그날의 날씨를 알 수 있다. 동녘이 맑으면 기분도 좋고 날씨도 쾌청하기 마련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동학의 주문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를 두서너 번 암송한다.
미리 생각해 둔 일이 있으면 바로 서재로 건너가 컴퓨터를 켜고 자판기를 두드린다. 여전히 독수리 타법이다. 그러다가 손녀가 일어날 시간이 되면 전쟁이 시작된다. 손녀는 조금이라도 더 자려하고, 집사람이 정한 기상시간은 어김없이 벨을 울린다. 하던 일을 멈추고 손녀 깨우기에 내가 나서지만 대부분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5분만 더, 3분만 더, 딱 1분만이라고 손녀와 신강을 한다. 대부분 마지막 결말은 집사람이 매몰차게 개입함으로써, 손녀가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손녀 잠자리 이불은 내가 정리한다. 집사람과 함께 잘 때도 이불 개는 건 평생 내차지였다. 지금은 잠자리가 따로 지만 그래도 가끔 이불정리는 내가한다. 참 이상하다. 집사람이 집안일 챙기는 게 철저한 사람인데 이건 좀 허술하다.
아침식사 전에 창간이래로 계속 구독하는 한겨레신문을 대충 훑어본다. 집사람이 아침식사를 이것저것 챙기지만, 손녀는 잘 먹지 않는다. 나는 대개 7시 20분경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 40분이 지나면 곧 지하주차장에 내려간다. 내가 차를 몰아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게 나의 첫 일과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커피를 내려 한잔하면서 9시경에 내가 하던 일은 다시 시작된다. 대개는 쓰기와 읽기를 병행한다. 때로는 어느 한쪽에 집중하기도 한다. 11시 전후해서 쓰레기도 버리고 가벼운 산책 겸 아파트 숲과 가까이 있는 소공원에서 햇살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다. 숲에 새소리가 들리면 한결 기분이 좋다.
12시 경이면 집사람은 간단히 점심을 챙긴다. 점심은 떡이나 빵 혹은 고구마와 과일 등으로 적당히 때운다. 끼니마다 설거지 하는 게 적지 않은 편이다. 때로 내가 설거지를 도와주려 해도 내가 하는 게 집사람 맘에 차지 않아서 아예 맡기질 않는다. 정년 후에 청소는 내가 맡아 하지만 그것도 일부만 내 몫이다. 사실 내가 하는 청소도 집사람이 보기에는 거칠고 허술하다. 그래도 내 딴에는 청소 1차 담당은 내 차지라고 여긴다. 여전히 인정받기는 어렵다. 나이 들면 청소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거처공간을 줄이는 게 좋다지만, 그래도 나는 공간 여유가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내가 경산에 사는 게 이런 면에서 혜택을 좀 누릴 수 있다. 나는 나이 들수록 복잡한 시내의 좁은 공간을 자연히 멀리하게 된다. 그게 내 몸과 마음의 자연(즉, 本然之性)이다.
내게 오후시간은 좀 느슨하고 자유로운 편이다. 점심 식사 후에는 누워서 20-30분 정도 낯 잠을 즐긴다. 집사람은 밤에 손녀 공부 때문에 이래저래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낯에 잠자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밤에 잠은 충분히 자는 편이다. 아마 이런 게 집사람과 나의 건강리듬에서 차이를 가져오는 게 아닌가 싶다. 오후에는 가끔 유튜브에 들어가 주로 기후변화 문제, 죽음과 노년의 삶, 그리고 티베트 명상음악을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유튜브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짬짬이 보는 편이다.
나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내 블로그에 글 올리는 일이다. 글을 쓰려면 읽어야 하고, 읽은 것은 써놓아야 내 것이 된다. 약 12년 간 내 블로그(다음 김병하넷)에 올린(포스팅) 글의 꼭지가 400 편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누적 조회 수가 4만 8천을 넘겼다. 5만이 넘으면 자축하는 이벤트를 가지고 싶다. 내게는 티끌 모아 태산이다. 내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그날 내 블로그의 방문통계를 확인하는 일이다.
아침에 방문 회수를 보고 ‘인기글’에 읽은 게 나오면 기분이 좋다. 가끔 읽은 글 가운데 내 자신이 다시 읽고 점검해서 내용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스스로 읽은 소회를 댓글에 올려놓기도 한다. 내가 써놓은 글이라도 다시 읽으면 새롭게 음미할 부분이 있다. 어쩌다 내가 올린 글에 잘 읽었다는 댓글이 달리면 반가워서 보는 즉시 ‘고맙다’는 회신을 보낸다. 밤에 자기 전에도 반드시 내 블로그 티스토리에 방문 조회를 확인하고 컴퓨터 전원을 끈다.
오후에 내가 즐기는 일상 가운데 하나는 햇살 좋은 날 남천 쪽으로 산책 나서는 일이다. 산책을 하면 햇빛을 받고 생동하는 자연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흐르는 물 사이로 오리가 먹이를 찾아 노는 걸 보면, 그들에게는 노는 것과 먹이 감을 얻는 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연속의 생명활동이 신기하고 놀랍다. 자연과 직거래하는 동안에 나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젊어서는 몰랐지만, 나이 들면서 이런 여유가 생긴다.
내가 산책 중에 때로는 양지 바른 의자에 앉아 쉬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웬 아주머니가 다가와 무슨 책을 보느냐고 묻는다. 무례한 일이다. 그리고는 신천지교회 홍보지를 내민다. 참 어처구니없다. 조용한 나의 산책리듬을 깬다. 자기가 좋다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게 황금률인가? 동양 유가에서는 네가 원치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고 했다. 한국 기독교가 예사로 보여주는 폐해의 일부다. 나는 종교적 믿음보다 영적(spiritual) 깨침이 긴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삶에서 ‘깨침의 진화’는 그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집에서 먹는 것보다 외식하는 경우가 많다. 손녀랑 세 사람이 하면 손녀의 선택이 우선이고, 집사람과 둘이 할 때는 대부분 집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식당을 정한다. 그러나 메뉴선택은 각자 자유다. 어떤 날은 집사람과 외식이라도 해야지 함께 외출할 기회가 생긴다. 그래야 옷차림도 바꾸고 그나마 리듬 전환이 된다. 내가 그냥 편안히 입고 나가려면 제발 <지식과 세상>에 나갈 때처럼 옷차림을 챙기라고 잔소리를 한다. 요즘은 집사람과 외출할 때 나도 복장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나이 들수록 복장이 우아할 것까지는 없어도 깔끔하게 차려 입는 게 서로에게 좋다. 사소한 일상의 의례이자 예의다.
저녁 시간에는 낯에 하던 일이 있으면 마무리 차원에서 계속하지만 많이 하지 않는다. 잠시 뉴스를 보지만 집에서 TV 채널 선택권은 거의 집사람에게 있다. 왔다 갔다 하면서 대충 화면과 주요 자막을 읽는다. 해서 난 의자에 기대고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경우가 드물다. 의자에 앉아 낯에는 하늘을 쳐다보고 저녁으로는 그냥 쉬는 쪽이다. 대개는 9시가 지나면 설설 잠자리에 들지만, 손녀 때문에 중간에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11시에 경산여고에 있는 손녀를 데리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년 12월부터는 손녀와 내가 이런 일로부터 해방된다.)
이렇게 나의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그 하루가 살아 있는 동안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바뀌어야 진정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해서 내게 사소한 일상적 삶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그게 ‘사람됨’의 존재가치일 터이다. 하지만 몸의 노화는 내게 어김없는 현실이다. 노년에는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