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나는 내면적 마음공부로 불교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던 중 지구차원의 문제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자연히 관심이 쏠린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기후위기는 실존적 문제로 체감하게 되었다. 해서 작년에는 <지식과세상>을 매개로 ‘기후위기 인문학’이라는 작은 교실을 열기도 했다. 금년에는 ‘찾아가는 기후․생태위기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직접 찾아가는 작은 교실을 운영하고 싶다. 첫 번째로 찾아갈 곳은 <질라라비장애인야학>으로 점지해 두고 있다.
그러던 차에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2023)을 만났다. 이 책을 통해 생태위기 시대에 새로운 불교 행동철학으로 ‘에코다르마’(Eco-Dharma)를 숙고하게 된다. 지은이는 불교학자이자 선(禪) 수행 지도자인 데이비드 로이(David R. Loy)다. 전통불교의 가르침은 개인적 각성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서로 상호의존적 연기(緣起)적 존재임을 깨치게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생태위기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이다. 우리에게 생태위기는 인류가 당면한 영적 위기이자 문명적 위기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이 경이로운 지구와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지구와 관계 맺는 방식 또한 재구성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돕는 사회적 참여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생태위기와 사회정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의문투성이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구조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개인의 변화라는 길과 사회의 변화라는 길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개개인의 각성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고, 명상과 같은 사색적 수행이 우리 행위의 바탕이 되어 그것을 영적인 길로 변화 시키는 방법이다(19쪽).
이런 맥락에서 생태적 위기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에코 다르마(eco-dharma)다. 이것은 생태적인 관점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을 결합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책에는 자연 속에서의 수행과 더불어 불교 가르침의 생태적 의미 탐구, 그리고 지금 요구되는 생태운동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른바 자리이타적(自利利他的) 삶이다.
저자는 “도구주의적 자연관이 우리의 생태적 위기의 중심에 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해방운동’은 지구와 지구생태계를 이루는 거대한 그물이 단지 한 종(인류)의 이익을 위한 자원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랬다. 해서 생태위기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위기만큼이나 영적인 문제다. 우리 개인의 고통과 집단이 겪는 고통 사이의 관련성을 분석하는 것은 에코 다르마를 실천하는 길을 열어 준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개인적 깨침을 우선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에게는 지구차원의 공멸을 중단시키기 위한 집단적 깨침 또한 절실하다.
대승불교에서는 6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보살도를 강조한다. 대승불교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의 과정을 중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태보살의 길에 들어서도록 안내한다. 이 책은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에 대응하는 데 불교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20세기에 인간이 얻은 세속적 풍요는 지구생태 시스템의 균열을 초래했다. 이제 지구시스템의 균열은 지구에 몸담은 인간 존재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가 몰두해온 경제성장과 소비주의는 지구의 생태계 순환과 양립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도 지구생태계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문명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환경을 착취해 왔다. 독보적인 기술의 힘, 전례 없는 인구 증가, 계속 확장된 경제성장 시스템이 하나로 결합된 결과 지구의 생태적 자연계를 수익성이라는 목표에 종속 시킨 것”을 나무란다.
생태위기의 필연적 결과로 인류는 집단적으로 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해서 생태위기는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에 대한 위기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치경제적 결단 이상의 문제로 생태적․영성적 접근을 생각한다. 작년에 고인이 된 길희성 교수가 세속적 휴머니즘의 대안으로 영적 휴머니즘을 제기한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저자는 우리에게 “생태위기는 또한 불교의 위기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기후위기에 상응하는 불교 빙산의 바로 밑(끝)부분에 ‘에코다르마’라는 새로운 개념을 올려놓자고 했다.
기후변화가 훨씬 더 거대한 생태위기의 일부이듯, 에코다르마는 불교의 사회적 참여의 한 방편이다. 저자는 “불교인들이 노숙자와 교도소 재소자를 도우면 그들은 보살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왜 이렇게 많은 노숙자가 있는지, 왜 이렇게 많은 유색인종이 교도소에 있는지를 물으면, 다른 불교인들은 그들을 좌익 또는 급진주의자라고 부르면서 그런 사회적 행동은 불교와 관계가 없다고 말한 것”을 환기 시킨다.
이처럼 불교에서 개인적 구원을 강조하는 한, 그들은 사회정의 문제와 생태위기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긴다는 게다. 이것은 열반과 사바세계를 단지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위험을 반영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사바가 곧 열반이랬다. 즉, 땅에 걸려 넘어진 자는 반드시 그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결국 오늘날 지구적 생태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당대 불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불교의 길과 목표는 우리를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문제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참여를 방해물이라고 여겨 반대하는가? 당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진정으로 다루기 위해 우리는 그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티베트 불교 가르침에 “깨침은 비행기 밖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나쁜 소식은 낙하산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땅이 없다는 것”이랬다.
우리에게 손바닥과 주먹은 ‘상대적 실재’지 둘이 아니다. “당신의 손이 펴지고 쥐어지고를 반복한다. 손이 항상 주먹이거나 항상 펼쳐져 있다면, 당신은 마비된 상태일 것”이다. 생로병사는 현상적 세계의 주먹이고 그 깨침은 손바닥과 같다. 생로병사를 경험할 실체적 자아가 없는 한, 늙고 병들고 죽는 건 ‘공’(空)하다.
나 자신을 비롯해 실재하는 모든 존재의 세계는 ‘고통’(dukkha)으로 시달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떨어져 나와야 하는 비행기다. 낙하산은 우리의 현실적 결핍을 채우려는 현실 프로젝트다. 우리가 버려야 할 집착 가운데 뗏목의 비유는 이 점을 잘 시사한다. 다르마는 우리를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도록’ 돕는 방편이지, 강을 건너고 나서도 등에 지고 다니는 뗏목처럼 다르마 자체가 저절로 구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데려다 줄 가이드북이나 로드맵이다.
불교는 나를 해체하는 하나의 길이다. 우리가 불교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면 자유로울 게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수행하느냐가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디딜 곳 없는 상태’(groundlessness)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 디딜 ‘땅이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낭떠러지 끝에서 과감히 내려놓아라. 죽어야 다시 태어나리라. 그대가 죽기 전에 죽어라!”
불교에서 텅 빈 공과 본래성은 둘이 아니다. ‘디딜 곳 없음’ 자체가 우리가 디뎌야 할 곳이기도 하다. 해서 ‘공’은 우리 본래성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대승기신론>에서 참으로 그러한 진여(眞如)는 그 자체로 텅 빈 것이면서 동시에 좋은 것(진선미)으로 가득 찬 것이랬다.
저자는 우리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이 경이로운 지구와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 할 때, 우리가 몸담은 지구와 관계 맺는 방식이 재구성된다고 했다. 우리가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 깨침이 꽃을 피우는 방편이다. 마음챙김과 같은 사색적 수행은 우리의 참여운동을 영적인 길로 인도한다. 개인적 깨침과 사회 참여는 동전의 양면처럼 수행의 과정에 하나로 얽혀 상보적으로 상승한다.
생태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많은 도시인구가 다양한 형태의 과밀 거주와 오염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자연결핍증후군’으로 고통을 받는다. 도시생활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도구들이다. 도구는 기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기술은 보다 효과적으로 자연을 도구화한다. 기술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로운 것(물성)이 뭔지에 집중할 게 아니라, 지구의 안녕과 지속 가능을 위해 뭘 해야 할지 집중해야 한다.
자연에 대한 도구적 관점이 오늘날 생태위기의 핵심이라면, 지구와 지구생명체들의 거대한 그물망이 인간의 이익만을 위한 자원 이상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는 “내가 강이고 강이 나”라고 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가 나와 무관하지 않고 신성하다. 땅위에 신성하지 않는 곳이 없다. 오직 신성한 곳과 신성함이 훼손된 곳이 있을 뿐이다. 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성스럽다.
저자는 “인간의 고통과 생태계의 고통은 동일한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우리가 개인의 고통에서 집단의 고통으로, 개인의 깨침에서 집단의 깨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함의한다. 불교에서 깨침은 우리가 다른 존재나 지구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므로, 우리가 공존하는 가운데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적․생태적 위기에 집단적 참여를 정당화한다.
불교에서 깨침은 개인적 각성을 기반으로 한다. 비행기에서 떨어져 나와 나의 기반이 없음을 경험하는 것은, 단지 나의 진정한 본래성을 깨치기 위함이다. 내가 디딜 땅이 없다는 걸 깨치는 것은 자아중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 깨침은 당연히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길이다. 그로부터 나는 “우리 모두에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삶의 중심이 옮겨간다.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자연이다. 지구는 우리 집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은 ‘천지부모’를 말했다. 인간의 몸은 바다, 강, 산, 그리고 나무를 구성하는 것과 동일한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피는 본래 고향인 바다를 복제하기 때문에 짜다. 우리는 적어도 98%의 DNA를 침팬지와 공유한다. 우주 전체가 온생명으로 상호의존한다. 그 온생명 속에 낱생명으로 내 몸이 유지된다. 틱낫한은 “붓다는 개인적인 깨침을 얻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자연 파괴의 과정을 멈추기 위한 집단적인 깨침이 긴요한 때”라고 했다.
저자는 오늘의 생태위기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만큼이나 영적인 문제”랬다. 위에서 인용한 틱낫한의 주장은 육체적 생존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는 영적인 진화가 필요하다는 걸 환기시킨다. 지구의 면역체계를 훼손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 있을까? 생물권의 생태계가 얼마나 회복력을 발휘하고, 지구의 집단면역 반응이 얼마나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인류세에 그 열쇠는 인간의 손에 쥐어져 있다.
저자는 생태위기에 대응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너무 늦든지 않든지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구 인구는 1947년 25억 명에서 60년이 지난 2018년에 77억 명으로 무려 3배 이상 늘었다. 유엔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전 세계적으로 현재의 산업농법으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기간이 60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지구평균기온 2〜3도 상승을 피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장 불길한 티핑 포인트는 메탄의 위험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70배 이상이나 강력하다. 만약 동토층의 모든 메탄이 방출된다면 10조 톤의 이산화탄소량과 같다고 한다. 현재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모든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약 500억 톤의 이산화탄소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메탄 배출이 주는 위험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인류세에 이미 늦었다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물음 앞에 저자는 개인적, 집단적, 제도적 행동과 더불어 우리가 생태보살로 거듭 나기를 말한다. 지금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은 곧 불교의 가장 도전적 숙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는 결코 종교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붓다의 시대보다 훨씬 강력한 기술발전을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생태위기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보살도(菩薩道)라는 불교수행의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켰다. 보살의 길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열린 비전을 구현하는 영감의 원형이다. 저자는 “더 사회적이고 생태적으로 참여하는 방편을 찾아 나서고, 집단적․제도적인 고통의 원인을 해결하고자 노력할 준비가 된 보살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패러다임”이랬다. 생태위기가 갈수록 다급해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방관하는 삶은 정신적․영적 범죄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지구는 우리가 생태보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이것은 땅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생명에게 내리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天命)이다. 지금은 생태보살들이 땅에서 일어나, 땅을 보호하고 치유하는 법(dharma)을 드러내 보일 때다. 이제 우리가 생태보살로 행동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