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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평촌0505 2024. 4. 3. 09:34

내 마음의 고향은? 조동일 교수는 학문은 결국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랬다. 평생 객지에서 헤매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곳이 자기 학문의 뿌리인줄을 뒤늦게 깨치게 되었다는 게다. 그에게 구비문학은 학문의 본향이었다. 나는 학문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라고 생각한다. 내 고향은 선산(지금은 구미) 고아 평촌이다. 낙동강변의 들이 넓고 서남쪽으로 금오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다.

 

내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 ‘본래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돌아가기다. <중용> 첫머리에는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본래성(天命之謂性)이고, 이 본래성에 따르는 것이 곧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率性之謂道)이랬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흔히 고향은 사춘기를 보낸 곳이랬다. 그렇다. 고향은 자라면서 이런저런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고, 사춘기 쩍의 내밀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자랄 때 어머니는 나를 두고 ‘천강스럽다’는 말을 자주했다. 이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다. 경상도 사투리로 타고난 성품이 좀 어리석고 순진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은근히 나를 좋게 표현하는 뉘앙스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이 좀 실성하다”고 했다. 하늘이 품부한 본래성을 잃어버렸다는 어머니 특유의 ‘구비철학’이 잘 반영된 표현이다. 어머니는 문맹이었지만 내게는 훌륭한 구비철학자였다. 구비철학은 문자철학에 선행한다.

 

내게 어머니는 몸의 본향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으니 내게 어머니는 생명의 모태이자 본래고향이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천지부모’(天地父母)를 말했다. 천지는 온생명의 바탕이고, 부모는 내게 낱생명을 주었다. 해서 천지와 부모는 동격이다. 어머니는 어째서 내게 마음의 고향인가? 어머니는 항상 내편이었고,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해 주었다. 해서 내 마음이 어머니 마음이고, 어머니 마음이 곧 내 마음이었다. 하나로 통하는 마음자리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막내며느리인 집사람의 권유로 49재를 올렸다. 그로부터 나는 불교 의례에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해 여름 나는 <대승기신론통석>(이홍우, 2006)을 만났다. 내게 사람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고전 책과의 만남도 각별하다. 평생 살아오면서 <대승기신론>은 나의 마음자리에 가장 신비로운 영향을 주었다. 여기 마음자리는 곧 본래성의 회복이다. 마실 나간 내 마음을 고향집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기신론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게 남겨준 마음(영혼)의 선물(유훈)이었다.

 

어머니와 기신론은 나를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지만, 다시 마음의 고향을 떠나지 않고 여생을 사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기신론의 말미에 수행의 이익을 권하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 가지 좋은 삶을 실천하게 하더라도, 한 끼 밥 먹을 동안 이(기신론) 가르침에 관하여 ‘바른 생각’(正思)을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후자의 공덕은 전자의 공덕과는 비길 수조차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이 논설을 구하여 그 의미를 세심히 살피고 그에 따라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을 하면 그가 쌓은 공덕은 한도 끝도 없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며, 설사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가 각각 무수급의 세월을 두고 그 공덕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하다. 법성(法性)의 공덕은 끝이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의 공덕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한 끼 밥 먹을 동안 기신론의 가르침에 관해 바른 사색(正思)”을 한다는 것은 언뜻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그에 따라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을 하면 그 공덕은 한도 끝도 없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은 두 번 다시 마음의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불교용어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돈오’(頓悟)라면, 기신론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는 건 ‘점수’(漸修)다. 몰록 깨침은 한 끼 밥 먹을 동안 가능하지만, 닦아 수행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지속되어야 하니, 그 공덕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게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씨앗처럼 여래(如來)를 내장한 ‘여래장’(如來藏)의 존재이므로, 다소간에는 누구나 진여(眞如)를 구현하고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다. 기신론에서는 진여와 무명(無明)이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방향을 따르는 삶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훈습’(薰習)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결국 참으로 그러한 진여의 나로 돌아가기다. 그것은 하나인 마음의 자리다.

 

여기 ‘훈습’이라는 것은 비유컨대 사람의 옷이 그 자체로는 냄새가 없지만 사람이 그 냄새를 오랫동안 배게 하면 냄새를 풍기는 것과 같다. 우리 마음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진여’ 그것이 나타내는 ‘깨끗한 마음’은 원래 물든 것이 아니지만, ‘무명’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물든 양상(染相)을 띠게 되며, ‘무명’이 나타내는 ‘물든 마음’은 원래 깨끗한 것이 아니지만, 진여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깨끗한 기능’(淨用)을 나타내게 된다는 게다.

 

결국, 기신론에서 ‘수행’(修行)이라는 것은 ‘진여로 돌아가는 훈습’의 과정이다. 근데 그 수행의 길은 끝이 없다. 일찍이 공자도 사람의 본성은 비슷하지만, 습성은 서로 멀다(性相近, 習相遠)고 했다. 하여 습성(習性)이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나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간 마음이 다시 마실 나가지 않게 다잡아야 할 터이다. 노년에 내 삶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