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무상(無常)하다. 해방둥이인 내가 팔순을 맞는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에 보리쌀 씻다가 나를 낳았단다. 광복을 20여 일 앞둔 때(1945년 음력 6월 18일)였다. 어제가 79년 전 그날이다. 어머니가 그립다. 내게 살아온 날은 길고 살아갈 날은 그리 많지 않다. 격변의 세월을 살았다. 식민 통치하의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지금은 선진국 반열에 든 나라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가 압축성장한 만큼 나도 압축적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서 내 평생은 분단 시대의 삶이다. 이제는 분단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분단의 끝자락이 잘 보이질 않는다. 분단의 선은 강대국의 냉전체제 산물이지만, 그게 하나의 체제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 내부의 책임도 크다.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어려운 때가 청년기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심리적으로 갈등이 많았던 시기였다. 맹자가 항산(恒産) 연후에 항심(恒心)이 가능하다는 걸 체감했다. 그래도 나는 용케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비교적 일찍 교수가 되었다. 나는 철학에서 특수교육 쪽으로 전공을 바꾼 게 인연이 되어, 평생 모교에서 특수교육학 교수로 일했다. 그로부터 교수로서나 가장으로서 내 삶은 비교적 평탄했고, 정년 후의 내 삶도 그 연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노년에 나는 두 갈래로 심신의 부담을 안고 산다. 신체적으로는 건강의 한계다. 나이 들어 노화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근데 내 건강도 하향곡선이지만 집사람의 건강 상태가 올해 들어 표나게 떨어지니 난감하다. 결혼하고 51년을 함께 살아왔으니 이래저래 내 책임이 적지 않을 터이다. 70대 후반에 우리나라 여자들이 겪는 흔한 무릎 관절염으로 걷기에 불편함을 겪는다. 나도 계단 오르내릴 때 오른쪽 무릎의 불편함을 느끼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그러려니 하고 산다. 부득이 아내의 건강 문제에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노년에 나는 해를 거듭할수록 기후생태 위기를 시대적 화두로 절감한다. 이대로 가면 지구는 그냥 제 갈 길로 가겠지만 인류는 큰 재앙을 면하기 어렵다. 인류세에 기후생태 위기에 따른 문제는 지구의 80억 인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그 책임은 주로 잘 사는 나라의 부유층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생태 문제도 채무국과 채권국으로 뚜렷이 대별 된다. 북반구의 잘사는 나라들(이른바 G7)은 채무국이고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은 채권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는 가난한 나라부터 집중적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세대별로 보면 잘 사는 나라의 기성세대일수록 그 책임이 크다. 그 책임의 우선순위에 나 자신도 모면할 도리가 없다. 노년에 내게 주어진 시대적⁃사회적 책무다. 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도 기후생태 위기의 담론화와 그 위기를 완화하는 데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이 있다. 내게 건강 문제는 노화에 따른 필연적이고도 개인적인 문제다. 의연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기후생태 위기는 범 인류적인 실존적 문제이기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숙제다. 그것은 당대의 급격한 변화가 초래한 도전적 난제다. 인간중심의 역사철학으로부터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지만, 지질학적으로는 홀로세의 마지막 세대이면서 인류세의 첫 세대이다. 그만큼 노년에 도전적 과제를 안고 산다. 팔순 즈음에 이래저래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