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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도전과 지구 철학

평촌0505 2024. 8. 22. 10:55

 

1.

 

인류세’(Anthropocene)는 홀로세(Holocene)에 대응해 파울 크뤼천이 2000년 멕시코 국제회의에서 짜증스럽게 불쑥 뱉은 말이다. 불과 20년 남짓 사용되기 시작한 인류세개념은 이제 과학, 인문학, 예술,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 본래 인류세는 지질연대표를 지칭하는 용어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의 이행은 기후를 포함한 대기권, 해수면을 포함한 수권, 생물권, 그리고 지구 표면을 구성하는 물질과 그 이동방식을 포괄한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의 이행은 이른바 상전벽해’(桑田碧海). 그 변화를 보여주는 많은 도식(탄소배출, 콘크리트와 철강생산, 컴퓨터 보급, 육류 소비, 플라스틱 소비, 쓰레기 배출 등)19세기까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특히 1950년대 이후부터는 그 선이 수직으로 급상승하고 있다. 놀랍게도 지난 70년 동안 지구는 엄청나게 변했고, 새로운 궤적에 들어서고 있다.

 

인류세는 기본적으로 지구과학 개념이지만, 다학문적 접근을 요한다. 인류세 책: 행성적 위기의 다면적 시선(J. A. Thomas, M. Williams, J. Zalasiewicz, 박범순, 김용진 옮김, 2024)은 인류세의 다학문적 접근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 책을 기반으로 인류세를 지구시스템과학 입장에서 이해하되, 역사철학적 해석에 그 주안점을 두고 논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기후생태 위기의 인문학에 대한 내 나름 내축된 의도 때문이다.

 

카이스트에 <인류세연구센터>를 설립한 박범순 교수는 인류세라는 심오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이 정치, 사회, 문화를 지배하는 힘(기준)이 되었다. 1950년부터 2010년까지 저인망 어업, 자원채굴, 건설로 인해 이동된 퇴적물은 인류가 생존한 30만년 동안 이동된 양보다 거의 5배나 늘어났다. 오늘날 약 80억 인구가 사는 지구라는 인공적인 고치(artificial cocoon)는 이른바 기술권’(technosphere)이라 불린다. 이제 기술권은 생물권보다 비중이 클 뿐 아니라 갈수록 생물권을 파손하고 있다. 이런 대변동을 총칭하는 말이 인류세. 인류세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철학적 도전을 제기한다. 현대 문명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우리에게 선사했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기후생태 위기는 양날의 검과 같다. 이제 우리는 자연을 압도하는 오만한 존재인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2009년에 결성된 인류세 실무단’(Anthropocene Working Group)에 따르면 인류세의 뚜렷한 시작점은 20세기 중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급격한 인구증가, 산업화, 세계화라는 대가속’(Great Acceleration)의 결과, 최근 지층 내에 축적된 보존지표의 배열과 20세기 중반 시점이 일치하고 있다”(2019)고 했다. ‘인류세의 도래는 현대 문명이 초래한 거대한 가속의 결과다. 그런 만큼 인류세의 역사철학은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 과제. 피할 수 없는 난제다. 굳이 도전적 과제라 함은 오늘날 약 80억에 이르는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이 보이질 않는데, 지구자원은 그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예측하기 어려운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와 급전환점(tipping point)이 위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다. 갈수록 인류세의 과학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인류세는 우리에게 문제가 아니라 곤경(predicament)이다. 문제는 해결 가능하지만, 곤경은 다면적 자원과 지혜가 필요한 도전적 과제다. 역사학자 로빈(Robbin, 2008)문제는 사람들이 이 변화된 세계에 어떤 책임을 지고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다. 그 답은 단지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이지 않고 인문사회적이고 생태적이랬다. 곤경에 처한 인류가 인류세를 역사철학의 도전적 의제로 삼아야 할 이유다.

 

인류세는 지구시스템의 총체적 인식을 위해 동원되는 엄청난 데이터 수집과 컴퓨터 모델링 측면에서 초객체의 문제다. 2018년에 밍크스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에서 지나치게 방대한 데이터로 인해 제6차 평가보고서 작성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실토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추정치에는 토지사용 변화나 생물다양성에 대한 정보도 없고, 기후변화에 관한 것만 포함되어 있다.

 

인류세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시공간의 규모와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때문에 인류세라는 초객체를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정치-경제체제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인지 난해한 과제다. 우리가 인류세를 마주하는 것은 과학적이면서 인문학적인 과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인류세의 철학으로 인간중심적 세속적 휴머니즘으로부터 영적(spiritual)이면서 생태적 휴머니즘(eco-humanism)으로의 전향을 생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비교종교학자인 길희성 교수는 영적 휴머니즘: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2021)에서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의 이행을 강조했다.

 

아마도 인류세의 궤적은 두 갈래로 전개될 것이다. 그 하나는 거침없이 가는 인류세의 궤적이다. 화석연료 사용이 좀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에 따라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이 훼손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지구 생태계 구조가 전면적으로 균열되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의 궤적은 인간이 생물권의 필수적 물질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저장하는 에너지와 소비하는 에너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지구시스템의 균열이 그나마 완화조정되게 하는 과정이다. 선택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인류세에서 전자는 경착륙이고 후자는 연착륙이라는 차이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현재 인류가 생물권과 맺고 있는 관계는 호혜적이라기보다 기생적이다. 마치 거머리가 숙주의 피를 빨아들이듯이, 인간이라는 기생충이 생물권에서 계속 에너지를 대량으로 뽑아내고 있다. 우리가 자연과 호혜적인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1인당 토지사용과 에너지자원 사용량을 상당 부분 조정해야 한다. 이것은 물질문명의 주요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과 연관된다. 그리고 식량생산을 위한 토지사용을 더욱 효율화하고, 야생지(광합성의 보물창고)를 가축 사료용 농지로 전환하는 걸 자제해야 한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보면 간단하지만, 정치-경제적으로는 복잡한 난제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도전적인 이유는 지구행성 시스템에 미치는 규모와 지속 가능성에 심각한 위기(한계) 때문이다. , 인간 시스템의 영향력이 전 지구적이면서 공시적으로 지구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 연구자인 맥닐(J. R. McNeill)은 인류세의 역사적 맥락을 태양 아래 새로운 것(Something New Under the Sun)(2000)이랬다. 이 책은 국내에서 20세기 환경의 역사(2008)로 출간되었다. 맥닐은 20세기에 인간이 초래한 환경변화가 2차 세계대전, 공산주의 출현, 대중의 문자해독력 증가, 민주주의 확산, 여성해방 운동과 같은 획기적 사건들의 중요성마저 왜소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역사학자가 핵심적 분석 대상으로 삼은 큼직한 역사적 사건을 능가하는 파급력을 지닌 환경변화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가속화되는 과정이다. 맥닐의 통찰이 비범한 이유는 환경 문제 맥락에서 진즉에 인류세 역사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세의 단일 원인으로 자본세를 지목하거나 이산화탄소 배출만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인류세 역사가 새롭고 복잡한 시스템적 딜레마라고 주장한다.

 

인류세 역사는 역사학자들을 백지상태로 만들어서, 역사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증거는 무엇이며, 엄청나게 혼란한 현실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이야기 서술을 할 것인지 묻는다. 인류세의 역사적 특징은 전례 없이 새롭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류세를 살아본 적이 없다. 인류세 역사는 생태학보다는 지구시스템과학이라는 포괄적 과학에 기초한다. 견고하고 오래된 지구시스템에 최근 인간의 비대한 힘으로 파열이 생겼다는 새로운 인식, 그 힘의 속도와 강도, 그 연관성에 대한 총체적 관심이 인류세 역사의 틀을 형성한다.

 

인류세가 새로운 역사 분야라는 것은 전 지구적 규모의 차원을 중시한다는 것, 그리고 지구시스템과학에 주목하는 것과 더불어(그 위에) 인간성 자체를 새롭게 상상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존재성과 삶 자체를 다시 반추해 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바꿀 수 없는지, 무엇을 성취하고자 희망해야 하는지 등에 걸쳐 과거 인본주의적 개념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인류세의 역사는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기묘한 빛을 비추는 이상하고 새로운 프리즘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신(신화)을 만듦으로써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인간이 곧 신이 되고자 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랬다. 인류 역사의 종착점이 인류세라면, 인간의 역사를 풍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정립하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이 바로 인류세 역사의 핵심적 질문이자 수수께끼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인류세의 첫 세대로서 나 자신의 존재성과 삶의 의미(가치)를 다시 반추해 보게 된다.

 

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 고향(시골)에서 전형적인 농촌생활을 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 만해도 우리나라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고 북한이 더 잘 살았다. 7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는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고도 경제성장을 유지했다. 이른바 유례없는 압축성장을 성취했다. 지금은 한국이 후기산업사회와 디지털 혁신 덕분에 세계적으로 잘 사는 선진국 반열에 든다. 당대에 나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지금은 잘사는 나라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급변의 세월을 살았다. 따라가기조차 버겁다.

 

필자가 인류세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체감하게 된 것은 2019년 코로나 환란 이후부터다. 그로부터 나는 인류세를 화두로 삼아 <기후생태 위기의 인문학> 쪽으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나는 인류세에 대응하는 삶의 양식으로 생태적영성적 삶과 친해지고 싶다. 아직 영글지 못하지만 내게 생태-영성적(Eco-Spiritual) 삶은 내면적 나침반이다.

 

지성사와 탈식민주의 역사학자인 차크라바르티(D. Chakrabarty)기후의 역사: 네 개의 테제(The climate of history: Four theses)(2009)라는 논문에서 세계화, 지구 온난화, 자본주의, 기후변화의 과정이 동시에 수렴되는 현재 상황이 무서울 정도로 새롭다고 했다. 그는 이제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가르던 오랜 인문학적 전통이 붕괴됐다. 계몽주의 이래로 자유를 논의했던 어느 시기에도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였다는 인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인류세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 안의 존재임과 동시에 지구의 행성적 힘이 된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된 게다. 인류세에서 인간존재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지질학적인 존재. 인류세 역사에서는 인간의 힘이 지질학적이고 물리적인 힘의 원천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존재의 정치적윤리적 함의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인류세 역사는 네 가지 측면에서 다른 시대의 역사와 구분된다. 그 첫째는 전례 없이 크고 새로운 곤경을 핵심적 주제로 다룬다는 점이다. 둘째는 거대한 규모와 시공간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이다. 셋째는 지구시스템과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지금까지 우리 인간을 이해하던 개념과는 매우 다르게 행성적 힘으로서 인간존재를 다루면서 그것이 정치적 도덕적으로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이론적인(역사철학적인) 렌즈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생태적 완충지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완충지대가 없다.

 

근대국가는 경제적 성장과 풍요를 집요하게 추구했다. 성장지상주의는 인류세를 촉발한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GDP로 측정되는 재화와 용역 산출량은 1960년에 1조 달러 남짓했으나, 2018년에 80조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세계적 GDP의 성장은 부유층의 과소비와 빈부격차의 심화를 초래했다. 우리는 매년 지구 두 개 분량에 해당하는 자원을 소비하는 가운데 점차로 생태학적 빚더미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사이언스>(2015) 논문에 따르면, 인간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범위를 규정하는 9개의 행성적 한계 가운데 이미 4개 영역이 무너졌단다. 즉 질소와 인에 의한 생화학적 순환, 생물권 온전성, 토지 사용의 한계, 그리고 기후영역에서 안전 경계를 이미 넘어섰다는 게다. 우리는 이미 위험지대에 발을 딛고 있다. 인류세에서 볼 때, 경제학은 우울한 과학이다. 경제학에 토대한 무한한 성장은 인류세 도래의 주범으로 작용했다.

 

생태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을 재결합하는 방식으로 환경경제학과 생태경제학이 등장했다. 환경경제학과는 달리 생태경제학의 기본 입장은 경제를 유한한 전 지구적 시스템의 일부로 이해한다. 생태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생태적 한계 안에 종속시키며, 자원사용과 분배에 대한 결정을 궁극적으로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의제로 인식한다. 진정한 인류세의 도래를 위해서는 기존의 근대적 상자 밖에서사고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지구시스템이 새로운 인류세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이 지구의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잠재적인 급전환점을 기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 지역 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려운(탄력적) 정치철학적 숙의가 필요하다. GDP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후생지수, 진정한 진보 지수, 인간계발 지수, 지구행복도 지수 등이 심각히 고려되어야 한다.

 

생태경제학자들은 정치경제를 재편함으로써 개인이 공평하게 지구의 지분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정한 지구 지분’(fair Earth share)에 따르면, 부유한 지구 북반구 나라들은 번영하는 공동체를 건설하되 내부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소비과잉을 줄여야 한다.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하는 지구 남반구 나라들은 적절한 의식주를 공급하면서도 가능하면 환경 파괴를 줄이는 발전 경로를 택하도록 한다. 생태적 한계, 복지확충, 불평등의 완화가 생태경제학의 요지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기후위기는 근원적으로 자본주의가 초래한 재앙이다. 이송화일(2024)기후위기는 단지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가부장제와 인종주의와 함께 자본주의가 가져온 재앙이랬다. 해서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체제 전환이라는 정치적 해법이 긴요하다는 게다. 그는 개발과 성장에 목매는 자본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기후생태 위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질학적 주인공(행위자; agent)이 되었다. 인류세의 철학(2022)에서 저자는 지질학적 행위자로서 인간세계가 자기완결성을 완화하고 생태계와 만나는 지점을 그 사이(in-between) 어딘가에 있는 것, 모든 가능성이 한계 지워지지 않는 중간’(middle)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 했다. 그곳은 인간세계가 자연계와 접하고 만나는 곳으로, 자연과 일체화되는 곳과는 다르다고 했다. 이 지점은 자연세계와 구별되면서도 인간세계의 자기 완결성이 빠져나오는 곳이라 했다. 그 지점은 아직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인간의 궤적과 지구행성의 궤적이 무관하다는 착각이 가져온 예기치 않은 결과가 바로 인류세. 인류세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궁극적 질문은 어떤 제도와 정책, 기술을 채택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가이다. 지구시스템이 우리의 선택에 제한을 주기도 하지만, 그 최종 결정은 지구시스템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몫이다. 필자는 진정한 인류세(authentic anthropocene)개벽세’(cosmic-opencene)를 고민한다. 그 연장에서 개인적으로는 '생태-영성적' 삶의 체화를 소망한다.

 

2.

 

인류세의 철학은 인간(인류)에 대한 전례 없는 도전적인 역사철학이다. 필자는 인류세 철학의 연장에서 혹은 그 대안으로 기후의 철학을 생각한다. 최근 이진경과 최유미는 지구의 철학: 모면할 길 없는 기후위기 시대의 삶에 부침(2024)을 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의 철학은 지구의 철학으로까지 확장·전치되어야 할 게다. 저자는 지구의 철학이란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지구를 주어로 하는 철학이랬다. 지구를 주어로 삼는다지만, 기후위기 시대에 지구를 철학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인간이다.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책의 서론에서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등 인간을 주어로 하는 이론과 개념 안에서, 지구를 주어로 (전치)하는 사유가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들이 지구에 대해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의해 말하게 해야 하는 것이랬다. 이런 의미에서 지구의 철학은 지구에 의해 가동되는 유물론적 사유. 결국 지구의 철학이란 인간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거대한 사물’(행성)인 지구에 의해, 인간을 주어로 하는 사유가 와해 되고 비틀리고 재가동되게 하는 것이다.

 

지구를 둘러싼 대기, , , 빙하, 바람, , 나무도 모두 그 나름 힘을 갖고 행동하는 주어다. 해서 인간 혹은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행동이라 하는 것은 동물 중심적 단견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이 주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고질병이다. 요즘 나는 가끔 소공원 숲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오솔길 나무를 손으로 잡고 그냥 서 있곤 한다. 그런 채로 나무와 하늘을 쳐다본다. 그 순간 나는 흙-나무-하늘과 하나로 교감한다. 이른바 자연과의 직거래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김훈 작가는 산문집 허송세월(2024)에서 산책길에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찬다.”면서, 그는 노년에 이런 식의 허송세월로 바쁘댔다.

 

지구는 인간이 하는 대로 받아 주고 되돌려준다. 되돌려줄 때 지구는 그저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주어다. 반응하는 능동적 주어다. 그렇게 반응할 때도 원한 없이 반응하고 복수심 없이 되돌려주는 주어다. 인간의 역사는 지구에서 생존의 동맹자를 찾는 과정이었을 게다. 아마 지구에게는 우리 인간이야말로 끝내 실패한 동맹자로 기억될 것이다. 인간은 동맹자들을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하면서 그 성공에 취해 몰락해 간 종으로 기억될 터이다.

 

지구가 대상 아닌 주어로 등장한 것은 인간들이 더는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기후변화가 심각해진 사태를 인지하면서부터다. 이른바 인간이 더 이상 주체일 수 없다는 게 드러난 사태까지 온 게다. 해서 지구를 주어로 삼는 사유는 주체 철학의 최종적 해체를 통해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 저자는 모면할 가능성이 없는 파국적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 위기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수긍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 그는 옳지만 실행될 리 없는 것을 재차 촉구하며 목소리의 톤을 올리기보다는, 모면할 수 없는 파국 속을 살아내기 위한 감각과 사유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구의 철학이란 파국적 기후위기를 수긍하고 살아내기 위한 철학적 지도의 이름이랬다. 이런 지도를 그려보기 위해 <기후의 철학>이 기필 된 것이다. 비장한 철학의 결단이다.

 

지구의 철학(2024)에는 인류세는 인간들이 쫓아가는 빛에 의해 지표면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욕망하는 빛의 강도로 인해 지표면 아래 땅속으로까지 스며든 짙은 흔적이랬다. 지금의 기후위기가 흔히 이산화탄소의 밀도(비율)로 표상되긴 하지만, 지질학적 변화에 따른 위기는 단지 이산화탄소 문제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해양과 대지, 대기의 기온, 심지어 지하의 토양과 광물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격변이 맞물려 있다.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지구가 통합된 하나로 탄생함에 따라 그것을 영유하는 인간은 발견의 권리를 행사해온 하얀 얼굴을 가진자들이다. 그들은 전체 인간을 표상하는 지위를 차지하고, 그 결과로 휴머니즘이 나왔다. 지구는 모든 인간적 활동의 절대적 외부다. 따라서 인류세란 인간의 의지나 이성 바깥의 그 불가능성을 인간의 힘으로 지층에 새겼음을 뜻하는 역설적 개념이다. 기후생태 위기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우리 인간이라는 지반을 떠나야 한다. 인간이라는 지반 바깥에서 인간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시대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이들과 동맹해야 한다. 어떤 존재도 특권화되지 않는 존재론적 평등성의 평면으로 내려가야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3(敬天·敬人·敬物)사상과 조동일(2024)만인-만생-만물의 대등론을 떠올리게 된다.

 

인류세는 곧 자본세. 20세기 중반 이래 지구적 위기를 대대적으로 가속 시킨 또 하나의 분기점이 대량생산-대량소비를 내세운 자본의 힘이다. 위기로 귀착된 역사의 실제 추동력이 인간이 아닌 자본이라는 사실이 사태의 해결을 더욱 난감하게 한다. 저자는 모든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를 돌려놓는 것보다 자본에 포섭된 인간들, 인간의 일부를 돌려놓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했다. 위기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 위기의 효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게 위기의 심각함을 알아도 해결할 수 없게 하는 이유다. 오죽하면 자본주의 종말을 상상하느니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지구의 철학에 따르면 인류세나 자본세나 모두 가망 없는 전쟁의 이름이다.

 

지구의 철학(2024)에서는 기후 특이점에 따른 멸종의 특이점과 여백을 주목한다. ‘특이점이 온다!’는 예언으로 요란하던 때가 있었다. 이 예언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과 나노기술이 융합해 거대한 가속의 전망으로 얻어낸 것이다. 이 새로운 미래의 탄생지는 실리콘밸리였고, 그 중심적 성도는 실리콘밸리 기업가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며 사회경제적 동향뿐만 아니라 지구 시스템에도 거대한 가속이 일어난다. 여기 거대한 가속은 자원의 소모와 기후변화 그리고 사회경제적 변화 모두가 하나의 특이점을 통과 했음을 의미한다.

 

동일한 거대한 가속임에도 과학기술의 특이점은 쉽게 수용되지만,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기후 문제는 독립성이 가정된 두세 개 변수의 변화를 통해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다. 게다가 기후변화는 그에 연관된 수많은 변수의 측정 불가능한 연쇄효과로 발생한다. 그 연쇄효과는 음의 되먹임을 통해 상태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양의 되먹임을 통해 서로의 효과를 순환적으로 증폭시키기도 한다. 연쇄효과를 통해 가속화된 변화가 다른 종류의 순환적 연쇄를 끌어들일 때 티핑 포인트라는 또 다른 분기점이 예견된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1750년대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280ppm에 불과했으나, 현재 이산화탄소 농도는 420ppm을 넘어서고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 임계치는 450ppm을 넘지 말아야 한다. 대기의 온난화와 해양 산성화, 부영양화에 따른 산소 부족은 흔히 대멸종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3인조라고 한다. 세 가지 모두가 되먹임됨에 따라 지구의 상태가 지금과 아주 다르게 급상승하는 티핑 포인트가 예상보다 빨리 도래할 수 있다. 우리에게 기후위기는 어느 하나의 변인에서 오는 게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연쇄된 변인들이 서로 얽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양상으로 나타나는 사태를 지구 한계라는 개념으로 요약한다. 질소와 인(비료)에 의한 토양과 해양의 오염 문제, 그리고 생물들의 멸종 심각성은 온난화로 요약되는 문제보다 더 절박하다는 게다. 이는 경작과 목축 중심으로 진행되는 토지이용 방식의 문제가 알려진 것보다 심각하다는 의미다. 멸종률의 증가는 물론, 비료와 농약,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의 증가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다. 현재 상태는 지금처럼 계속된다면인간조차 생존하기 힘든 상황으로 이어진다. 파국으로 치닫는 지구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빨리 줄이는 것을 말하지만, 지금의 탄소 기반 문명안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대량생산-유통-소비에 이르는 강고한 경제활동이 여전히 탄소를 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게다가 탁월한 기술은 사람들을 탁월하게 불러들이고 탄소를 탁월하게 배출한다. 요컨대 탁월한 기술은 탁월한 에너지 소모 기술이다. 기술은 자본 없이 개발되기 어렵고, 자본주의적 이윤 없이는 지속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서 지속 가능한 기술이란 자본에 포섭된 기술이다. 이윤 없는 기술은 없다. 이런 기술이 경제 논리 자체를 등지고 있는 기후위기를 해결해 주리라는 약속은 지불 불가능한 부도수표의 남발에 지나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는 멸종으로 귀착될 파국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른바 여섯 번째의 대멸종이 인간 자신의 멸종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인간세계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지만, 그게 결코 지구의 종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또 생명의 종말도 아닐 터이다. 다른 생명체들이 진화의 역사를 시작할 문턱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단절을 통해 구도를 바꾸는 역사적 비약의 문턱이다.

 

재난 연구자들은 지구적 파국 위험이라는 특별위험 등급을 전 세계 인구의 10% 정도가 죽는 사태로 규정한다. 따라서 종 전체가 단기간에 절멸하는 식의 극적인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루한 고통을 견디어 내는 장기적 지속의 종말이 될 것이다. 저자는 멸종이나 종말은 모든 개체의 멸절로 규정되는 어떤 사태가 아니라, 그 개체들의 삶이 겪는 극한값이랬다. 출구 특이점을 만들지 못하는 한 우리는 종말이라는 극한값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다. 끝내 포기되지 않을 것 같은 성장이나 발전은 그 극한값을 향한 가속페달이다.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적 비약과 결합된 경제적 동력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비약을 초래했을 때, 대멸종 또한 대량개발-대량멸종의 사태로 비약했을 것이다. 경제적 팽창의 비약적 특이점이 있었던 시기에 기술 혁신의 특이점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기에 생명체 멸종 속도가 비약하는 특이점이 있었다. 그 연장에서 기후변화가 티핑 포인트를 넘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특이점이 형성된다.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곡선의 추세를 바꿀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왜냐하면 죽어간 것들을 살려낼 길도 없고, 인류가 서식지를 잃은 것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며 생존의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후 위기의 징후로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해를 거듭할수록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될 터이다. 개인의 경우에도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출구 없는 삶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고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혹하다. 따라서 종말이 정말 올 것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말인가이다. , 어떤 종말을 살아 낼 것인가이다.

 

종말은 종결이 아니라 물음이다. 그것은 속 편한 가정들이 제공하는 모든 출구가 침수되는 심연이면서, 결코 풀릴 것 같지 않은 물음과 문제가 탄생하는 어둠이다. 종말의 불가피성이란, 황무지를 수긍하고 거기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출구 없는 세계에서 출구를 찾아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종말론은 출구가 있는 종말론이었다. 구원의 약속을 위한 배경으로서의 종말론, 거기에는 종말이 없다. 약속된 구원의 출구가 있다면 그게 어찌 종말인가! 말하자면 종말의 문제를 허무주의라는 비난으로 밀쳐내지 말고 진지하게 사유하자는 게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근거 없는 희망과 근거 있는 절망이 있을 때, 그래도 우리의 선택지는 희망이어야 하는가? 기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진 것은 우리가 근거 없는 희망으로 가던 길을 계속 고집했기 때문이 아닌가? 근거가 있어도 절망할 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출구가 없는 종말이 아닌가?

 

우리는 누구든 반드시 죽는다는 걸 안다. 죽음을 긍정하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차분히 생각한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숙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는 게 현명한지 반추하게 될 것이다. 종말을 수긍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떻게 죽어가고무엇을 남기는가에 따라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다른 조건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60개 조에 이르는 세포들의 거대한 군체(colony). 게다가 그 수보다 많은 미생물이 사는 서식지다. ‘는 그 세포나 유전자 수 이상으로 많은 미시적 영혼들의 의사를 그때마다 하나로 바꾸어 움직이는 거대한 공동체다. 죽음의 긍정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죽음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최대치의 긍정이다. 다세포생물인 우리 몸의 생은 때가 되면 죽어 주는 세포들의 지혜 덕분이다. 저자는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세포의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의 지혜가 생물학적인 연속성을 갖는다는 게 퍽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세포 이하의 미시적 영역에서 작동하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거대한 미시적 지혜는 어쩌면 생명의 역사에서 철학이 처음 탄생하는 순간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죽음의 긍정이란 소멸이 곧 탄생인 생성에 대한 긍정이다.

 

죽음마저 긍정하는 이중의 긍정 철학에서는 출구를 찾으려는 시도와 과정에서 종말을 사는 나름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수용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멸종의 여백을 늘리는 방법들이다. 그것은 공존하는 길을 향한 열린 마음이다. 죽음을 수긍하는 사람은 자신이 남길 유산 속에서 스스로 남은 삶을 본다. 어떻게 남은 삶을 살 것인지, 이후 살아갈 것들 속에 무엇이 되어 남을 것인지를 숙고한다. 저자는 죽음마저 자기 바깥의 생명 속에서 수긍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죽음 철학을 말했다. 이것은 내 안에 흘러넘치는 수많은 타자들을 따라, 나를 넘어선 거대한 타자들의 흐름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저자는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선을 이유로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최선(지순)의 도덕이 아니라, ‘적절성(adequacy)의 윤리라고 했다. 이 윤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도덕적 정언명령에 대해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라는 권유다. 말하자면 멸종이나 종말의 무게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기후에도 좋고 자신에게도 좋은 포용적 중도의 길을 찾으라는 게다. 본래 중도쌍차쌍조’(雙遮雙照). 양극단을 버리되 동시에 하나로 회통(會通)하는 지혜다.

 

죽음을 긍정하는 것은 죽음에 삶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향해 마냥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긍정이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평온하게 삶을 온전히 밀고 가는 여유다. 도래할 죽음을 향해 때로는 가벼움의 감응으로 웃으면서, 상황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강박적인 당위보다 포용과 유머가 더 강인하다. 해서 영화감독 이송화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2024)라고 했다. 그는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해 나서서 춤을 출 수 없다면(행동할 수 없다면), 그곳은 이미 죽은 행성이랬다.

 

기후생태 위기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난제다. 장기적으로 멀리 보고 열린 마음으로 대응하는 게 지구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다.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