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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 광산의 비극

평촌0505 2024. 10. 19. 11:08

나는 정년하고 13년째 경산 중방동에 살고 있다. 10층에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성암산이 바로 보인다. 동남쪽으로 청도 쪽 큰 산자락 밑을 따라 내려오면 코발트 광산이 있다. 경산 코발트 광산은 1937년 춘길광업소로 시작해 3년 뒤에 보국코발트광업으로 등록해 일본군수회사로 지정되었다. 그곳은 화약 원료 광업소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이곳 코발트 광산은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 약 3,500명을 군경이 학살한 죽음의 계곡이 되었다. 코발트 폐갱도를 비롯해 인근 대원골과 야산도 학살 현장이 되었다.

 

천영애의 위령시 <아부지, 꿈같은 세월이 왔심더>에는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아부지요, 우리는요, 아부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숨도 못 쉬고 살았다 아입니꺼

세상이 전부 아부지 보고 빨갱이라 하고

간첩이라 하니

우리는요, 숟가락질도 벌벌 떨면서 했다 아입니꺼

…(하략)

 

그렇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남은 식구들조차 벌벌 떨면서 살아야 했다. 엄혹한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무엇인가? 아직도 굴절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는 권력 모리배를 어찌할까? 동학농민전쟁 이래로 대량 학살의 제노사이드는 6.25 전쟁 때 남북 모두에 걸쳐 잔혹한 역사의 상처로 남아 있다. 전장에서 죽은 군인들보다 밀고 밀리는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의 죽음이 훨씬 많았다.

 

잔혹한 역사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한 이유다. <골령골의 기억전쟁>(2020)을 낸 박만순은 기억하는 자만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했다. 전쟁을 기억하는 자만이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 작가 한강은 세계 이곳저곳에서 전쟁 중인 터에 노벨문학상 자축 기자회견을 스스로 자제했다. 작가의 내밀한 양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는 6살 때 6.25 전쟁 와중에 폭발물 사고로 오른 손가락을 세 개나 잃었다. 손가락 없는 아이로 자랐다. 그나마 그 손으로 분필을 쥐고 대학 교단에서 평생 일했다. 이틀 전에 아내와 함께 지척에 있는 코발트 광산을 찾았다. 일주일 전에 위령제를 지낸 현수막이 그냥 걸려 있다. 이곳을 둘러보는 중에 집사람은 자기 외삼촌도 당시 계성학교 교사였으나,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당신 외삼촌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했더니 모른단다. 내가 아내에게 이곳이 당신에게도 무관한 곳이 아니잖느냐고 했다. 따라올 때는 거길 왜 가느냐더니 집사람의 표정이 잠시 숙연해진다. 지금은 민족적 해원(解冤)이 절실한 때다. 전쟁을 자극하는 행위나 말은 서로가 자제하는 게 마땅하다. 그럼에도 최근 남북한이 서로 전쟁의 불장난을 자행하고 있다. 지금 정권이 들어서고부터 더 노골적이다. 한심한 작태다.

 

먼저 내 마음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롭다. 내 마음으로부터 내면적 평화를 유지하는 게 긴요하다. 이즘 기후 위기와 전쟁 불안이 실존적 불안으로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해서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다시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