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나다운 삶의 이야기

평촌0505 2024. 11. 14. 15:29

 

누구나 자기다운 삶을 산다. 그러는 동안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는다. 삶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해방둥이인 나는 이제 80줄에 접어든다. 내 세대 위의 기준으로 치면 벌써 고인이 되었거나 상노인이 되는 나이다. 노년에 내 삶의 이야기는 어떻게, 얼마나 이어질까? 작년 여름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엮은 삶의 여정을 기필했다. 200자 원고지 약 450쪽 분량이다. 길지 않다. 앞으로 좀 더 채워 갈 게다. 하지만 얼마나 더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다운, 그리고 나만의 삶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하지만 내가 과연 나다운 삶을 살았는지, 나만의 특별한 삶의 이야기가 하나의 서사가 될 만한 게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자기 나름 삶의 이야기하기는 할 수 있다. 내 삶을 진솔하게 세상에 내놓고 발화하는 게 어쩌면 내 존재 이유일 터이다. 노자는 되돌아보는 게 도의 움직임(反者, 道之動)이랬다.

 

나다움과 나만의 이야기를 위해 나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로 내 평생 살아오면서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 두 가지를 들고 싶다. 그 하나는 6.25 전쟁 와중에 여섯 살 때 폭발물 사고로 오른 손가락 세 개가 잘린 것이다. 그로부터 나는 손가락 다친 아이가 되었다. 해서 자라면서 오른손을 포켓에 넣고 다니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나는 정말 전쟁이 싫다.

 

그래도 다친 손으로 글씨를 썼고, 교단에서 분필을 쥐었다. 나는 5남매의 막내로 비교적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특히 어머니는 평생 내 편이었다. 내가 손을 다친 게 어머니에게는 응어리가 되었다. 자랄 때 어머니는 나를 보고 천강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아마 좀 어리석고 순진하다는 경상도 사투리인 것 같다.

 

나는 중학교까지는 고향(구미 고아 평촌)에서 공부하고 고등학교는 큰형님이 계시는 부산(동래고등)에서 공부했다. 2 때부터 나는 철학과 쪽으로 관심을 가졌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고 그냥 철학을 하고 싶었다. 64학번으로 서울서 철학을 공부했으나, 중도 포기하고 대구로 내려와 특수교육 쪽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이게 내 평생 두 번째로 일어난 중요한 이변이다. 내게 특수교육은 평생 구원투수가 되었다. 특수교육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한 후에 나는 모교(대구대)에서 오랜 세월(40) 동안 특수교사를 길러내는 교수로 일했다. 나는 정년 고별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다시 태어나도 교수하고 싶다고 했다. 지나고 보니 어릴 때 내가 손을 다친 일과 평생 특수교육 쪽에 교수로 일한 게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어쩌면 내 운명인지도 모른다.

 

둘째로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인연은? 해월 최시형 선생은 천지부모’(天地父母)랬다. 천지와 부모는 동격이라는 게다. 내게 일차적 인연은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다. 40억 년에 이르는 생명의 진화사 연장에서 지구라는 행성에서 내가 태어난 게다. 기적과 같은 신비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에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공부까지 하고 평생 교수로 일했다. 문맹인 어머니는 내게 구비철학자로서 평생 내 몸과 마음의 힘이 되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셨다.

 

부모님 다음으로 내 평생 중요한 동반자는 당연히 아내다. 작년에 결혼 50주년 금혼을 넘겼다. 아내와 함께한 미운 정 고운 정이 그냥 내 삶에 베여 있다. 지난봄부터 무릎 쪽에 퇴행성 염증이 생겨 약 3개월간 걷기에 불편을 겪는 마누라가 나를 슬프게 했다. 노화는 피할 수 없다지만, 내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을 터이다. 아내는 우리 집 홈닥터처럼 온 가족의 건강을 건사했다. 나는 결혼 전에 위궤양으로 고생했으나, 결혼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니 자연히 좋아졌다. 지금도 아내는 내 건강을 잘 챙겨준다.

 

손녀 지현이는 내가 회갑이 되던 해에 태어나 나랑 띠동갑(닭띠)이다. 손녀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19년이나 함께 살았다. 아내는 할머니로서 손녀 키우는 일에 올인했다. 나도 손녀를 무척 사랑했다. 손녀는 우리 집 오아시스였다. 아내가 지난봄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기실은 손녀가 서울로 대학을 가니 내심 허전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손녀는 할머니와 이래저래 다툴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 사랑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우리 노부부에게 손녀를 향한 내리사랑은 그 끝이 없다. 손녀도 경산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한 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김민남(경북대 명예교수) 학형은 우정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나와 각별한 인연이다. 그 인연이 55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나와 아내가 처음 만나는 인연을 만들어 준 게 김민남 교수였다. 현직에 있을 때도 우리는 이런저런 일로 만났지만, 정년 후에는 <지식과 세상>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11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경북대 교수사회에서 양심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고, 대구 시민단체에서도 존경받는 어른이다. 나는 김민남 교수의 학문적 열정은 물론, 사회적 참여와 문제의식에 많은 자극을 받는다. 나와는 끈질긴 인연이다.

 

끝으로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뭘까? 나이 들면서 내 삶의 주요 부분은 읽고 쓰는 일로 채워진다. 아내는 내가 정년하고도 얄밉게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낸단다. 자유시간이 많아진 만큼 자연히 읽고 쓰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생각하고 읽고 쓰고 말하기는 서로 맞물려 있다. 나는 산책하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읽고 쓰기에 시간을 보낸다. 해서 내 블로그에 글 포스팅하는 빈도가 아직은 늘어나고 있다. 이런 리듬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겠다.

 

나는 심호흡과 명상도 짬짬이 한다. 그리고 유일한 사회적 활동으로 <지식과 세상> 조합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담론을 나눈다. 시간과 여건이 허용하는 대로 아내와 여행하는 것 또한 내게는 소중한 일이다. 아내는 여행을 좋아한다. 평범하지만 이런 게 나다운 삶의 이야기 줄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