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고르게 못 살았지만, 지금은 퍽 고르잖게 잘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평등과 격차가 지역간, 세대간에 심화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적대감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게다가 분단체제가 굳어지면서 지구상의 문제가 한반도에 집약되어 있다는 엄중한 현실을 체감한다.
피케티는 당대 인류가 직면한 최대 문제로 ‘불평등’과 ‘민족’을 꼽는다. 결국 그 문제의 핵심은 재산과 국경의 문제로 압축된다. 재산은 불평등 문제를 상징하고, 국경은 민족 문제를 상징한다. 불평등 문제는 경제적 또는 기술공학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다. 결과적으로 ‘불평등-격차’는 개인의 문제로 귀속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회개혁의 문제다. 우리가 지역 청년의 정체성 문제를 사회개혁 차원으로 연관 지우는 이유다.
이정우 교수는 『왜 우리는 불평등한가』(2021)에서 세계적으로 자본 배분율이 상승하고 노동 배분율이 하락하는 것은 공통적 현상이지만, 한국의 경우 그 속도와 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심하다는 게다. 지금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저성장, 저고용, 불평등 심화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1)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막아야 하고, (2) 대기업의 갑질을 근절하고, (3) 국민복지 지출을 늘리고, (4)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자 지역 청년들을 위한 제안이기도 하다.
제이슨 히켈(J. Hickel)은 현대사회(자본주의 체제)에서 ‘격차’(divide)는 피할 수 없거나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랬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격차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경쟁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곧 능력과 실력주의로 포장되고 합리화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일꾼으로서 청년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사회개혁이라는 외연적 문제와 일꾼으로서 청년 개인의 내면적 문제를 어떻게 연관지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히켈은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탈성장’의 정치경제학을 말했다. 그는 GDP가 올라가면 일자리가 창출되고 학교와 병원이 더 좋아진다는 게 지금까지는 통했지만, 불행히도 더 이상은 아니랬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더 많은 소득이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평등, 더 좋은 인간관계, 더 강한 사회적(복지적) 안전망이라는 게다. 그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적 포섭·착취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글로벌 북부의 성장이 글로벌 남부의 노동, 토지, 에너지, 기타 물적 자원을 광범위하게 착취했다는 게다. 비슷한 맥락에서 파슨스((J. Parsons)는 『탄소 식민주의』(2023)에서 오늘날 기후변화의 영향은 더 부유한 국가에서 수출하고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성장의 대가로 수입하는 식으로 거래된다. 이런 식으로 글로벌 경제가 기후위기를 악화시킨다고 했다.
결국 북반구가 누리는 경제적 이득은 남반구의 환경 손실을 토대로 구축된다. 게다가 잘 사는 나라의 환경안보에 필요한 자금은 글로벌 남반구의 노동자들을 날로 가혹해지는 기후위험에 내몲으로써 발생한 기업의 이윤으로 충당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최근 ‘탄소 식민주의’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탄소 식민주의는 단순히 물류적 가림막이 아니라, 식민적 권리를 조작하는 자본주의 시장 기반의 ‘도덕적 가림막’으로 추출과정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체제다.
필자는 체용론(體用論)에 기반해서 불평등과 격차를 조절하는 사회개혁을 용(用)으로 삼고, 일꾼으로서 청년의 내면적 가치를 체(體)로 삼아 논의를 이끌어가고자 한다. 물론 여기서 ‘체용’은 불이(不二)다. 나무로 치면 뿌리(체)와 가지(용)의 관계다. 사회개혁은 제도의 문제에 깊이 연관되기에 용(用)이라면, 일꾼으로서 청년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정신과 마음의 문제이기에 체(體)의 문제로 보고자 한 것이다.
사회개혁은 정치와 경제에서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면적으로 제도의 개혁을 통해 불평등-격차를 해소 완화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추진·보완되어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회개혁은 일꾼으로서 청년의 자기 정체성 정립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사회적 자원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각자도생의 살벌한 경쟁과 세습적 자본주의 체제가 강고해질수록 사회개혁의 당위는 절실하지만, 그 제도의 정비는 참 더디고 소극적이다. 우리에게 숙의의 참여민주주의가 절실한 이유다.
일꾼으로서 청년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이것은 <지식과 세상> 연구 프로젝트의 질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수레의 바퀴처럼 두 측면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 하나는 학교교육을 통한 자기실현의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교육(self-disciplinary)을 통한 내율(자율)의 과정이다. 이훈도(2024)는 개인의 삶과 꿈을 실현하는 독특한 개별성이 존중된 교육과정으로 개별화된(individualized) 진로 설계와 운영역량을 말했다.
생애에 걸친 진로교육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신명을 바쳐 몰두하는 과정(process)이다. 연속적이자 일생에 걸친 삶의 목표로서 기대 목표/종착역(end-in-view)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 내축에 따른 도달 가능한 목표이자 과정이다. 진로교육은 그런 수준의 목표를 겨냥하는 것이다. 기차는 종착역을 향해 계속 달리는 과정에서 기차다움을 실현한다.
자기다움의 내면적 가치 실현의 과정으로서 청년의 정체성 정립은 청년 자신의 내율과 존엄의 실현 과정에서 드러난다. 지눌 보조(普照; 1158-1210)는 《수심결(修心訣)》에서 “밖에서 찾지 말라! 빈손으로 돌아가지 마라!”고 일렀다. 여래의 씨앗이 내 안에 있으니(如來藏), 밖에서 구하지 말고 스스로 깨쳐 수행(修行)하라는 게다. 일꾼으로서 청년의 삶은 전형적으로 자기 수련(修練)의 과정이다. 김민남은 덕목은 곧 부단한 수련의 과정이랬다.
《중용》은 ‘성’(誠)의 철학이다. 이미 성(誠)해 있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誠者, 天之道也),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誠之者, 人之道也)라 했다. 이어 성지(誠之)의 절차 혹은 방법 원리로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을 말한다. 이른바 學問-思辨-行의 순환이 성(誠)하고자 노력하는 삶의 전형적인 과정이다. 일꾼으로서 청년의 삶은 곧 ‘성지’(誠之)의 삶에 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