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다중위기 시대다. 기후생태 위기, 불평등 위기, 전쟁과 폭력 위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가운데 나는 기후생태 위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편이다. 최근 조창오 교수(부산대 철학과)의 <폭력의 위기와 그 대응-한강 소설의 폭력론>(2025)을 접했다. 한강의 소설은 폭력에 의해 ‘고깃덩어리’로 전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조창오는 이렇게 진단한다.
한강 소설은 생존 경쟁을 우선시하며, ‘살아남기’만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를 정면으로 고발한다. 어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보다도 자신의 목숨 유지에만 매달리게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폭로한다. 누구도 애써 고귀한 삶에서 멀어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애써 자신의 가치를 낮추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생존 사회는 우리를 점점 더 생존 기계로, ‘고깃덩어리’로 몰아간다.
이 대목에서 나는 80줄 평생 살아온 나의 삶을 겸허히 반조(返照)해 보게 된다. 누구나 고귀하고 존엄한 삶을 바란다. 하지만 당대 한국 사회는 우리를 각자도생하는 생존 기계로 내몬다. 나는 평생 의도적으로 폭력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의 경쟁적 생존 구조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이런저런 모습으로 폭력적 언어와 생각을 표출했을 터이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부담을 떠넘겼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파시즘을 싫어하지만, 내 안의 파시즘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두 측면에 걸쳐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평생 교수로 일하면서 살아왔다. 과연 나는 학생들에게 말이나 생각으로 폭력적이지 않았던가? 결코 장담할 수 없다. 교수의 권위 혹은 터무니없는 권능을 앞세워 때로 그랬을 터이다. 특히 젊어서 학생들에게 그런 객기를 부린 게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다.
다른 하나는 지식인으로서 나 자신은 당대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는 의지와 행동을 또렷이 관리하지 못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2012)에서 “영원한 각성의 상태가 지식인의 표상”이랬다. 나는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폭력에 저항하는 올곧은 지식인으로 자신을 철저히 관리한 것도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그냥 평범한 교수였다. 그런 삶의 연장에서 정년하고 나이 들면서 나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를 체(體)로 삼아 부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극적 이타(利他)를 용(用)으로 삼고자 한다. 갈수록 적대적 갈등과 폭력이 노출되는 한국 사회에서 ‘자리이타’의 삶 또한 쉽지 않다.
노년의 내게 폭력에 대응하는 삶은 잘해야 ‘자리이타’의 길이다. 내게 이기(利己)가 아닌 자리(自利)의 길은 그 끝이 없다. 이타는 언제나 자리를 보장하지 못하지만, ‘자리’의 길은 결과적으로 이타에 연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