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즘 학교교육에서 학생인권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 만큼 학생인권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교권(敎權)은 안전한가? 물론 아니다. 학교폭력, 왕따, 학생자살, 게다가 교실붕괴, 교권추락, 교사들의 명퇴 희망 급증... 이런 것들이 중층적(重層的)으로 얽혀 오늘의 학교교육 위기를 초래하였다.
어찌할 건가? 내가 보기에 교육 문제에 관한 한 대응요법적인 외과적 수술이나 법적 규제만으로 절대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학교폭력 가해사실을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한다고 학교에서 폭력이 줄어들겠는가? 그와 같은 조처가 과연 교육적으로 온당한가? 그러면 근원적으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 우리는 교육의 근본과 원칙에 충실해야지 가시적 지말(枝末)이나 단발적 조처(규제)에 매달려서는 그 개선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장애학생의 인권과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교권을 하나의 틀로 연관해서 성찰해 봐야한다. 교육에서 학생 따로 교사 따로는 절대로 교육이 아니다. 교사-학생은 실과 바늘이다. 그래서 교사는 어떤 경우에나 학생 편에서 학생인권을 우선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학생과 그 부모는 교사의 교권을 존중해 주어야 학교교육이 바로 선다. 물론 교사의 교권은 다른 누구보다도 교사 스스로가 자신의 전문성 신장과 윤리적 성찰에 의해 굳건히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사는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일에도 기여하게 된다.
【2】그러나 불행하게도 목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공교육 체제하에서 교육이 국가에 의해 집단관리 되면서 학교는 본의 아니게 질서를 명분으로 폭력적 수단이 정당화되기 일 수였고, 경쟁은 교육의 질 관리를 위한 방편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군사문화가 학교문화에 침윤되어 체벌 없는 학교교육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해묵은 일반적 현상에 불과하고, 특수교육에서는 여기에 한 겹 더 다른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장애아동에 대한 부모의 ‘과잉보호’ 현상이다. 외국에서는 가정에서 ‘아동학대’가 종종 문제가 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적으로 ‘과잉보호’가 문제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조차 장애학생은 인권의 주체로 대접받기보다는 보호의 대상으로 격하되기 일 수다. 장애학생에게 ‘과잉보호’도 일종의 인권침해다.
그 부모가 낳은 자식은 다 귀한 존재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하늘이 내린 천부적 인권을 꼭 같이 타고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즉, 天人合一 혹은 人乃天)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그 전통이 언제부터인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학교폭력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브라질의 교육철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 Freire)는 재배되는 것은 식물이요, 길들여지는 것은 동물인 반면에 우리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될 존재로 규정했다. 그에게는 우리 인간에게 교육만이 희망이었다. 특수교육은 그 희망의 마지막 증거이어야 한다. 단언컨대, 특수교육에서 장애아동은 보육(caring)과 치료(therapy)의 대상으로 머물게 아니라 교육함(educating)의 존재로 우뚝 서야 한다. 일찍이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해서 인간 교육에는 그 부류가 따로 없다면서 인간교육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우리가 장애학생의 인권을 진정 존중하는 출발점은 그들에 대한 교육가능성의 확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불학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다’라는 불퇴전의 믿음을 강조한다. 내가 곧 부처라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起信)과 그런 믿음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중용」(中庸) 첫 머리에는 교육의 본질과 그 궁극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즉,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이른바 성(性)이고, 그 性에 따르는 것이 이른바 도(道)이고, 그 도를 닦는 것이 이른바 교(敎)라고 했다. 여기서 교육은 性-道-敎로 이어지지만, 거꾸로 그 교육이 교육다워지기 위해서는 敎-道-性으로 줄기 있게 연관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즉, 교육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된 본래성(本來性; human nature)이 시키는 대로 인간이 가야 할 마땅한 길(道; right way)을 끊임없이 닦는 과정(process)이다. 그리고 「중용」에서는 인간이 가야 할 마땅한 길을 지극한 맘으로 닦는 것을 ‘지성’(至誠)이라 했다. 그래서 이 ‘지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고 했다. 「중용」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마디로 교육은 ‘심성함양’(心性涵養)이자 ‘본성회복’(本性回復)이다.
【3】우리 특수교육이 교육다운 교육을 하고 있는가는 단적으로 장애학생의 ‘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에 얼마나 의미 있게 관여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특수교육이 장애학생의 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에 일차적(원칙적)으로 의미 있게 관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사가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쳐 내야 한다. 모든 교사는 그가 최전선에서 자라나는 학생교육을 담당하는 일꾼이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를 자기 속에 체화(體化) 혹은 내면화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학생 따로 교사 따로’ 원죄는 ‘교과 따로 교사 따로’에서 비롯한다. 교사가 교과를 내면화하여 교과적 삶을 살 때, 그 교과와 더불어 교사의 인품이 하나로 어우러져 학생의 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교사의 존재 이유이자 운명이다. 원칙적으로 이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사람은 교단에 서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특수)교육이 바로 선다. 교사에 의한 교권의 처음과 끝은 여기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결국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나 학생에게 존경받지 못하거나 인격적 감화를 주지 못하는 교사는 자신의 교권(敎權)도 결국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특수)교육은 지난(至難)하다. 특수교육은 ‘교육 중의 교육’이고 그 교육을 담당하는 특수교사는 ‘교사 중의 교사’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 특수교육은 변두리 교육이 아니라, 학교교육의 중심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