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 들어 부쩍 시절이 불안하다. 자연히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지만 빈부격차에 따른 양극화가 심하다. 나라 간이나 나라 안에서 적대감이 늘어나니 세상이 불안하다. 게다가 정보네트워크 홍수 속에 삶이 혼란스럽다. 국내적으로는 탄핵 정국에 휘둘려 민심이 양분되고 갈등이 증폭된다. 국제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관세 정책이 무역 질서를 어지럽힌다. 미국 우선주의가 국제적 갈등을 부추긴다.
21세기는 다중위기 시대다. 핵전쟁 위기, 기후생태 위기, 난민과 폭동 위기, 불평등 양극화 위기, 폭주하는 정보와 불확실성 위기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다. 이런 지구적 위기가 한반도에 집약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나는 해방둥이로 농업사회-산업사회-정보사회로의 이행을 당대에 모두 체험했다. 게다가 홀로세에서 인류세로 교차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첫 세대다.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이런 다중위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혜와 자정(자기관리)능력이 긴요하다. 누구나 존엄하고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 자칫 파도에 휩싸이기는 쉬워도 그 파도를 타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이른바 위기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이중과제에 대응하는 삶이다.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Nexus)>(2024)에서 디지털 네트워크가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으로 무정부 상태를 경계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주요 쟁점에 대해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질서와 제도에 대한 신뢰가 일정 수준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주요 쟁점에 대한 공개 토론은 규칙에 따라야 하고, 합의가 쉽지 않을지라도 최종 결정을 도출하는 합법적 장치가 존중되어야 한다. 여론을 조작하는 소셜미디어와 이해할 수 없는 알고리즘이 공론장을 지배하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대화가 가장 필요한 때에 합의도출이 어렵게 된다.
솔직히 우리는 민주적 정보네트워크가 붕괴하는 현실을 뻔히 보면서도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른다. 그러니 더욱 불안하고 피곤하다. 이런 게 디지털 시대의 특징적 모습이다. 정보네트워크가 너무 복잡해졌고, 불투명한 알고리즘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 결과 왜 우리가 서로 다투고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때일수록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자정 장치가 절실하다.
사회적 자정 장치는 무정부 상태나 파시즘에 빠지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공적 윤리의 확립이다. 이즘 나는 탄핵정국의 막바지에 탄핵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맞서는 것을 보면서 불안하고 피곤하다. 아예 TV 뉴스를 기피하고 싶다. 언론 매체가 적대감을 조장할 뿐 대화와 타협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태의 본질과 진실을 일관되게 파고드는 심층보도가 참 아쉽다. 탄핵정국에서 건강한 중도는 설 자리가 없다.
사회적 자정 장치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부터 뭔가 힘을 보태야겠지만, 이 나이에 쉽지 않다. 화쟁(和諍)을 위한 나름의 기준은 있지만 그 표현을 자제한다. 해서 나는 개인적 자정 장치를 그 뿌리(즉, 體)로 삼으면서, 그 용(用)으로 사회적 자정을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나 개인의 자정 방편으로 다시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생각한다.
당장 내 힘으로 사회를 바꿀 수도 없고, 또 내 인생 자체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내 나름 좀 다르게 살 수는 있다. 나 자신부터 조금씩 다르게 사는 방편(이른바 to live better)으로 ‘자리이타’의 삶을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自利)은 내면의(영적/정신적) 깨침을 우선하는 삶이다. 아마도 그 전형은 공부하고 수행(修行)하는 삶일 터이다. 우리에게 공부와 수행은 그 끝이 없다. 해서 <중용>에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고 했다.
우리네 삶에서 자리(自利)는 응당 이타(利他)를 수반하지만, 그 반대로 이타는 언제나 자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사람은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노라고 팔 걷고 나서는 정치 모리배나 종교 선동가다. 공연히 잘 돌아가는 세상을 그들이 어지럽힌다. 참 피곤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