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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출가와 몸의 해혼

평촌0505 2012. 12. 3. 11:50

마음 출가(出家)와 몸의 해혼(解婚)

 

  교수 노릇 끝내고 정년하고 나니 해방둥이인 내 나이 예순 여덟이다. 이래저래 내 삶을 되돌아 볼 때이다. 인도 사람들은 나이 60이 넘으면 산간 숲속을 여행하면서 자유로운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문화를 삼림(森林)문화라 일컫는지도 모르겠다. 인도 노인네들 삶의 모습에 내 맘이 끌린다. 석가, 공자, 예수는 젊은 나이에 구도(求道)를 위해 가출을 했지만, 나 같은 사람이야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해서 가족 건사하고 내 앞 닦기에도 급급했다. 그것조차 제대로 하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아들 하나 딸 하나 모두 제 앞 닦을 정도가 되었고, 아직은 우리 내외가 건강하니 다행인가 싶다. 그리고 연금 받아 생활하니 거기에 맞춰 살면 된다.

 

  마음 출가(出家)라? 어차피 내 몸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둥지를 틀고 이제껏 살아 왔으니 나는 속절없이 재가(在家)의 속인이다. 내 몸은 세속에 길들여져 있고, 가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어김없는 현실이다. 이 현실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내 운명이다. 근데 몸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나이에 ‘마음’의 자유야 누가 구속할 수 있으랴. 구속할 수 있다면 그건 천명(天命)이자 내 본래성의 성명(性命) 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뜻’일 뿐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여(眞如) 혹은 여래(如來)의 길을 따르고자 할뿐이다. 좀 거창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게다.

 

  이제 나는 마음의 자유천지를 위한 순례 혹은 여행을 하고 싶다. 성지순례(聖地巡禮)니 역사순례니 하는 것도 그냥 뜻에 따라 발 닿는 대로 하면 된다. 지난 8월 말에 정년퇴임하고 내년 2월에 이집트 고대문명 탐방을 계획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집 사람이 깃발을 들어서 손녀랑 함께하는 가족여행이다. 주제는 정년기념이다. 그러니 나의 ‘마음 출가’ 여행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무슨 성지순례니 하는 명분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날 처지도 못된다. 소설가 박범신은 성지순례 간다는 핑계로 혼자서 여행을 곧잘 떠나곤 하는가 본데 아직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집사람이 쉽게 허용하지도 않을뿐더러, 쓸데없이 이런저런 의심만 살게 뻔하다. 집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해외)여행 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정년하고 가까운데 산책은 혼자서 자유롭게 다닌다. 집 가까이에 있는 남천(南川)은 쉽게 갈 수 있어 좋다. 조금 한가한 날은 영천 은해사(恩海寺) 뒤편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운부암(雲浮菴)이 좋다. 원래 예로부터 남에는 ‘운부’ 북에는 ‘마하’라 할 정도로 ‘운부암’은 남한 제일의 선원(禪院)으로 꼽히는 곳이다. 지형이 구름에 떠 있는 연꽃 형상과 같아서 ‘운부’(雲浮)라 한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면서 은해사에서 3.5Km 떨어진 완만한 계곡을 걸으면 참 좋다. 어쩌다가 차가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근데 내가 생각하는 ‘마음 출가’ 여행은 혼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정처 없이 산 좋고 물 좋은 계곡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명실공히 가정과 가족을 떠나는 ‘출가’(出家) 여행이다. 이 ‘마음 출가’를 언제 한 번 집사람에게 진지하게 제의해 볼 참이다.

 

  내년이면 내가 집사람과 결혼 한지 꼭 40년이 된다. 결혼(結婚)해서 맺은 인연으로 아들 딸 낳고 출가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해혼’(解婚)은 결혼해서 맺은 끈을 푼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이성(異性)관계를 푼다는 게다.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52세에 가족들 앞에서 ‘해혼’(解婚)을 선언하고 부인과 남매처럼 지나기로 약속하고 잠자리도 따로 했다. 인도의 간디는 37세부터 부인과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나는 다석 선생보다는 17년, 간디보다는 약 30년 이상 더 오랜 세월동안 부부생활을 해온 셈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해혼' 할 때도 된가 싶다. 내가 다석 류영모 선생의 '해혼' 이야기를 집사람에게 했더니 굳이 가족들 앞에서 선언할 것까지 없이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단다. 내가 들어도 그게 현명하다. 우리 나이쯤 되면 대부분 그런 게 자연스럽다. 근데 요즘은 대체로 살기가 좋아진데다가 나이 들어 맘먹고 하는 일 없이 편히 지나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도 색스를 꽤나 밝히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사람은 식색(食色)을 절제하지 못하면 몸과 맘이 함께 망가지기 십상이다. 나이 들어 한 번 망가지면 끝장이다. 식색(食色)에 관한 한 인간은 동물의 세계로부터 배워야 한다. 요즘 세상 꼴을 보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은 동물에 대한 모욕이다. 동물보다 훨씬 악랄하고 끝없이 타락한 게 인간의 실상이다.

 

  동양에서는 인간됨의 조건으로 ‘삼리양생’(三理養生)을 든다. 여기 삼리(三理)는 몸의 양생인 생리(生理), 마음의 양생인 심리(心理), 지혜의 양생인 철리(哲理)를 일컫는다. 생리-심리-철리의 삼리가 조화롭게 서로 도와 양생할 때에 인간은 심신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된다는 게다. 우리 인간은 감성(感性)과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이 하나로 뚫리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그래서 류영모 선생은 몸나와 제나에서 얼나로 솟는 삶을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몸나와 제나는 탐진치(貪瞋痴)의 지배를 받는 삶인 반면에, 얼나는 탐진치를 극복한 삶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아버지 하느님과 내가 부자유친(父子有親)하는 삶이다. 불교식으로 보면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간 삶이다. 인간은 나이 들면서 「중용」에서 말하는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삶의 자세가 아름다운 게다. 이즈음에 와서 내가 생각하는 마음 출가와 몸의 절제는 일종의 대자유를 향한 내 삶의 날개 짓이다. 날개는 날기 위해 있는 게다. (2012.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