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1827-1898)은 죽기 한 해 전 수운 선생이 득도한 날에 스스로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법을 단행했다. 이것은 제사상의 밥그릇 위치를 벽을 향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향해 차리는 방식으로 제사법을 변혁한 것이다. ‘향아설위’는 조상이 저쪽 벽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셔져 있으므로 나(자손)를 향해 상을 차리라는 게다.
요즘은 제사 문화도 많이 간편화되고 제례로서 기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내 경우도 장조카가 조상 제사를 한 날로 모아 지내는 걸 보고 아예 참례를 포기했다. 그 대신 부모님에게는 내 나름 ‘향아설위’하는 쪽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내친김에 나는 아들딸에게 따로 제사를 지내지 말고, 그냥 너희끼리 만나 식사하면서 덕담이나 나누라고 당부하고 싶다. 함께 만나 부모를 회상하면서 자기들 삶의 근황을 이야기로 공유하면 좋을 것이다.
해월은 ‘향아설위’의 이치를 잘 납득하지 못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만 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은 한울님으로부터 몇만 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해 심고(心告)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습니다.”
천지신명의 기운을 받아 부모는 나에게 생명과 성령(性靈)을 주었다. 그 성령은 나로부터 내 후손에게 자자손손 이어진다. 그 이어짐의 축적이 인류 문명사를 형성할 터이다. 하지만 21세기 인류는 기후생태 위기, 불평등 위기, 전쟁 위기가 다중위기로 얽혀 있다.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의 그늘이다.
김지하는 ‘향아설위’는 후천개벽의 상징이자 가장 완벽한 집행이랬다. ‘향아설위’를 통해 천지부모의 성령이 지금 나의 심령에 와 닿고, 다시 나의 후손에게 그 성령이 진화하는 것이다. 해월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부모의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이 ‘영세불망’(永世不忘)이요, ‘천지부모’ 네 글자를 지키는 것이 만사에 형통하는 것”이랬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과연 후손들에게 어떤 성령을 보태줄 수 있을까? 그리고 후손의 성령이 어떻게 진화하도록 안내할 건가? 라고 나를 향해 묻는다. 본래성에 따르고자 한 나의 삶은 내가 평생 어떤 세상살이를 했느냐에 따라 후손에게 이런저런 모습으로 반조(返照)될 게다. 과연 나는 아들딸과 손주에게 어떤 의미의 수호자로 기억될까? 두렵다.
노년의 내 삶은 하늘이 명하는 본래성에 얼마나 합치되는지, 그것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두렵다. ‘향아설위’는 내게 곧 엄중한 ‘향아설문’(向我設問)이다. 나를 향한 그 질문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