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이영식 목사 추모식에 다녀와서
오늘 성산(惺山) 이영식(李永植;1894-1981) 목사 31주기 추모식에 다녀왔다. 오는 길에 눈발이 뿌렸다. 백발이 휘날리던 이영식 목사와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달리는 차창 앞에 교차한다. 나는 1965년 대명 캠퍼스 입학식장에서 성산 이영식 목사를 처음 먼발치에서 봤다. 작은 체구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안 되다가 되는 기 인생인 기라. 나는 맨 주먹으로 이 맹아동산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면서 열변을 토하셨다. 당시만 해도 60대 초반이어서 기력이 쟁쟁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직접 이영식 목사님을 찾아 뵌 것은 1967년 겨울이었다. 학생대표 자격으로 월남을 다녀온 나에게 이태영 학장께서 목사님을 뵙고 월남전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일러주셨기 때문이다. 그 때 목사님은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못 마땅히 생각하고 계신 듯 했으나, 아직 내 귀가 뚫리지 않은 시절이었다. 다만 그 때 뵈온 것이 인연이 되어 목사님 자서전 원고정리를 도와준 기억이 남는다. 또 한 번은 주일 날 이태영 학장께서 ‘특수교육행정’ 원고정리를 위해 나를 라이트 하우스 원 사택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때 이태영 학장이 말하면 나는 그것을 받아 적는 일을 했는데, 옆에서 그 일을 지켜보시던 목사님께서 “좀 천천히 불러주게”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태영 학장께서 어찌나 빨리 부르는지 따라 적기에 혼이 났기에, 목사님의 그 한마디 말이 나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나는 목사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고, 목사님도 나를 따뜻이 맞이해 주셨다. 한 번은 내가 감기가 들린 채로 목사님을 뵈러 갔더니 당신께서 평소 복용하시던 약을 내게 주면서 이 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그 때 나는 목사님의 자상하신 정을 느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내가 모교에 전임강사로 발령 받은 후 1973년 봄에 결혼을 앞두고 집사람과 인사차 라이트 하우스 원에 들렸더니 목사님도 학장님도 부재 중이셨다.
근데 목사님 사모 할머니께서 금방 어딜 가시더니 목사님을 뫼시고 왔다. 들어오시면서 “할마이가 어찌나 급하게 부르든지”하시면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 때 목사님 내외분께만 인사를 드리고 안방에 계시는 고은애 여사께는 미처 인사를 드리지 않고 그냥 나왔는데, 한참 지나고 생각하니 내가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태영 학장님의 주례로 그해 4월 13일 나는 결혼을 했다. 목사님은 내 결혼 축의를 따로 전해 주셨다.
1977년에 내가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라는 책을 처음 냈는데, 그 때 내가 목사님에게 책의 추천서를 부탁드렸더니 기꺼이 응해 주셨다. 나는 우리나라 특수교육 역사의 산 증인이신 이영식 목사의 추천 글을 책의 앞머리에 꼭 넣고 싶었던 게다. 목사님이 추천의 글 초안을 적어 오라고 하셔서 내가 만들어 가니 만족하시면서 “광복기념사업으로 내가 특수교육을 시작했다”는 말을 꼭 삽입하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목사님의 친필 사인을 받아 추천서를 실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이태영 학장께서 그 책을 보시고 수고했다면서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아마 그 고맙다는 의미는 이영식 목사님을 그렇게 역사적 산 증인으로 내가 모셨다는 것에 대한 인사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책의 개정판(1983)이 나왔을 때는 목사님이 고인이 되셨기에 개정판 서문에 내가 그것을 적시했더니, 이태영 총장께서 역시 고맙다고 하셨다. 그렇게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두 분이 한국특수교육을 이끌어 오셨고, 내가 보기에도 이태영 총장님은 목사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한 번은 고은애 여사께서 이태영 총장께서 아버님에게 잘 해주신다고 칭찬 하는 말을 직접 들은 기억이 난다. 목사님도 “은애는 천상 여자인기라”면서 며느리를 치켜 올리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 때가 바로 한창 대구대가 발전을 거듭할 때였다.
1978년에 내가 미국서 6개월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교회에 나간다는 말을 목사님께서 어디서 들어셨던가 보다. 목사님은 지나치시다가 내 연구실에 들려 “교회에 굳이 갈 것 없다. 하느님은 내 속에 있는 기라”고 하셨다. 이미 목사님은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의례적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선 분이었다. 말년에는 외모도 그랬고 생각과 사상이 퍽 자유분방하신 걸로 기억에 남는다. 오늘 추모식에서 막내 따님인 이광자 선생이 아버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면서 ‘나와 자연법칙’을 읽어 주셨는데, 내가 보기에 말년의 목사님 사상이 잘 집약된 문건이다.
(1) 나는 자연과 하나 되는 신념으로 산다.
(2) 나는 자연과 더불어 대화한다.
(3) 나는 자연의 지혜를 체득한다.
(4) 나는 자연과의 약속을 지킨다.
(5) 나는 자연과 함께 즐긴다.
(6) 나는 자연의 능력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
(7) 나는 자연의 자유로움 그대로 산다.
(8) 나는 자연의 빛과 더불어 산다.
(9) 나는 자연의 사랑으로 산다.
따라서 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극복하며 운명이라는 허상과 투쟁하며 산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의 죽음은 승리와 영광의 죽음이다.
말년에 이영식 목사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한 대자연의 자유를 누리셨던 게 틀림없다. 이제 ‘사랑․빛․자유’는 대구대 건학이념을 넘어서서 인류 보편이념으로 우뚝 선다. 우리에게 성산 이영식은 그런 분이다. (김병하, 2012.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