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참회록
오늘 이정옥 선생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그녀의 지도교수로서 참회의 글을 띄웁니다. 교수는 자기 기준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몸에 베여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 입장에서 볼 때는 별것 아닌 일에도 버럭 화를 냅니다. 내 딴에는 많이 자제한다지만 학생들은 화내는 나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 걸 이제 와서 느낍니다. 이정옥 박사는 내가 정년하는 지난 1학기에 마지막으로 지도한 사람입니다. 왜 빨리 논문을 쓰지 않느냐고 내가 여러 번 닦달을 했지요.
2013년 1월 7일 이른 아침에 자는 잠에 숨을 거둔 이정옥 선생의 삶을 병원 빈소에서 그녀의 가까운 친우들로부터 자상히 들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내가 처음 듣는 생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공부하는 일만 족쳤지 그녀의 건강과 가정생활, 생계를 위한 힘든 일상, 농학생들을 위한 봉사활동 등 엄청 과부하 된 이정옥 선생의 삶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정옥 선생은 늘 상냥한 웃음으로 나를 대해주었고, 그냥 내 기준으로 일을 맡겼지요. 내가 쓴 글을 꼼꼼하게 교정해 줄 뿐만 아니라, 긴요한 조언을 해 줄 때는 그냥 고마워했지요. 그것도 내 기준으로 잠시 그랬을 뿐입니다.
나는 이정옥 선생 영정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제자 빈소에서 눈물을 흘린 게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은 약 20년 전에 내 연구실에서 일한 적이 있는 마음씨 착한 학부생 권순분 선생이 요절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수년 전에 미국서 학위를 받고 거기서 교수로 일하던 배성직 교수가 금의환향하였다가 말기 간암으로 운명하고 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정옥 선생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합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게 이정옥 선생을 통해 어김없이 확인되었습니다. 인도의 옛 잠언에 사람은 태어 날 때는 혼자서 울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지만, 죽을 때는 모든 사람이 슬피 울고 혼자서 웃으며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이정옥 선생은 그랬습니다. 나는 그녀의 빈소가 너무 호젓할까 봐 속으로 걱정했습니다만, 뜻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대구대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인들과 농학생들이 그의 빈소를 찾아와 애도했습니다. 성당 영결 미사에도 이곳저곳에서 이(로사)정옥과 인연이 있는 신부님이 여섯 분이나 참석해서 교단에 도열해 서 있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어제 나는 이정옥 선생에게 빚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기 위해 ‘이정옥 선생을 보내며’ 라는 추모사를 이렇게 지어 올렸습니다.
이정옥 선생!!
살아남은 우리가 차마할 말을 찾지 못하겠구려. 그대가 짊어진 삶의 십자가를 그 누구도 대신 질 수가 없기 때문이오. 그대는 평생 몹쓸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가족의 대들보가 되었고, 농인들의 입이 되었소. 그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려니와 그 누구도 이정옥 선생처럼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었소. 그대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감지할 수 있을 뿐이오. 왜 우리는 그대가 삶의 멍에를 지고 힘들어 할 때,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못하고 그대를 보내고 나서야 ‘역지감지’(易地感之)를 들먹이는지 참으로 부끄러워지는구려. 마침내 살아 있는 우리가 이정옥 선생 영정 앞에 염치없는 존재로 폭로되고 말았구려.
어찌 철탑 위에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만 열사(烈士)인가! 이 땅 대학사회의 오만한 지적 권력 앞에 평생 주눅 들어 살아가야할 시간강사 이정옥 선생! 그대는 어렵게 학위를 받고도 감히 어디에 서류조차 내 볼 엄두도 못 냈다오. 죽기 살기로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그 살벌한 경쟁 터에 낄 여지조차 없었던 게요. 차라리 한 발 물러선 그대가 아름다운 지성인이었소. 그대는 우리 대학 농학생들에게 참으로 존경 받는 은사이자 멘토였지요. 그대 빈자리를 누가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구려.
이정옥 선생의 46년 삶의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이정옥 선생은 이 땅의 농인들이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게 스스로 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자 했습니다. 그대는 이 땅 농인들에게 또 다른 예수였습니다. 우리는 특수교육을 머리로 했지만 그대는 특수교육을 몸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몸을 마침내 소진(消盡)케 했습니다. 그리고 잠들 듯이 조용히 그 몸을 해방시켰습니다. 이제 이정옥 선생을 보니 “잘 살면 잘 죽는다”는 말이 어김없는 진리로 와 닿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어요. 그 곳은 자유와 평화가 있을 겁니다. 당신의 삶과 죽음은 오늘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를 한 없이 부끄럽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뒤늦게 깨우쳐 줍니다. 미안하오. 부디 잘 가오, 이정옥 선생!! 떠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2013년 1월 8일
경산에서 당신의 지도교수 김병하가 지어 바칩니다.
이 글은 추모사라기보다는 지도교수로서 나의 참회록입니다. 부디 현직 교수로 있을 때에 학생들과 따뜻한 가슴으로 소통하면서, 뒤늦게 나처럼 제자를 향한 참회록을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정옥 선생을 내 기준으로 그냥 가르쳤지만, 그이로부터 훨씬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프레이리는 “교육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라 했던가 봐요. 교육은 참으로 지난(至難)합니다. 그 지난함이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인가 봅니다. 오늘 다시 끝 모를 참회가 내게 밀려옵니다.(김병하; 2013.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