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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은 '마음'의 소통이다

평촌0505 2013. 7. 13. 08:22

 

<모자이크어린이집 부모강좌; 2013.06.15>

 

『통합은 ‘마음’의 소통이다』

 

 

1.

   모든 교육은 ‘심성함양’이자 ‘본성회복’입니다. 특수교육에 몸담아 오면서 특수성이란 걸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우리는 자칫 교육본질을 등한시하지 않았는가를 뒤늦게 되돌아보게 됩니다. 되돌아봄은 깨침이자 성숙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특수교육이라 하면 맹아동에게는 점자지도나 보행훈련, 농아동에게는 언어지도나 보청기 착용, 지적장애아동에게는 행동수정이나 생활훈련, 신체장애아에게는 물리치료나 보장구 제공 같은 것을 연상해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특수교육에서 ‘교육’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특수교육에서는 ‘통합교육’이 주요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특수아동이라 해서 이들만 따로 분리해서 교육할 게 아니라, 일반아동과 함께 어울려 교육받게 하자는 겁니다. 명분으로야 그 좋은 통합교육을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교육은 실천적 문제입니다. 즉, 명분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찌 교육뿐이겠습니까? 인간사가 다 그렇지요. 장애아동의 통합교육을 위해서는 ‘통합’의 전제조건 충족이 무엇보다 긴요한 과제입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합’은 공염불입니다. 그렇다고 그 전제조건이 충족되기까지 무턱대고 통합을 마냥 보류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간 통합교육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남게 될 테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에게 통합교육은 그런 면이 다분히 있습니다.

 

  어차피 통합교육의 전제조건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없는 그런 것이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으로 뭘 들 수 있을까요? 앞에서 나는 교육은 결국심성함양 혹은 본성회복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통합도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통합은 마음의 소통”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강의 주제도 “통합은 ‘마음’의 소통이다”로 잡았습니다. 가장 함축적이면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통합’은 네 마음과 내 마음의 소통(疏通; communication/interaction)입니다. 물론 여기서 ‘소통’은 일방적 코뮤니퀘(communique)가 아니라 쌍방소통(two-way communication)입니다.

 

  이 쌍방소통의 주요 전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나를 되돌아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 방문 시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임했더니, 손님을 초청한 주인이 파격적으로 하루 더 머물다 가라는 제안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즈음 NLL 문제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역지사지’로 접근하여 서해평화공동구역 설정을 제안한 게 ‘영토 포기’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자구에만 얽매여 콘텍스트(전후맥락)를 놓친 격입니다. 손가락 끝을 보고 그게 진짜 달인 줄로 착각한 것이지요.

 

  미국에서 통합교육을 지칭하는 ‘통합’이 원래는 흑백통합을 의미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흑인아이와 같은 통학버스를 타고,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백인아이들이 굳이 흑인아이와 잘 어울려 놀지 않더라도 그 ‘통합’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상호교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물리적인 통합이 시급하고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장애아동에게 통합교육은 그런 수준의 ‘통합’은 오히려 분리교육보담 더 역기능적일 수 있습니다. 즉, 장애아동에게 통합교육은 반드시 분리교육보다 좋다는 단순 논리가 통할 수 없는 복잡한 교육적 문제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에서 Mainstreaming(주류화)으로서의 통합교육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학급에서 장애아동이 불편함 없이 교육받을 수 있는 내적(질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통합’은 장애아동에게 물과 기름입니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에 통합교육을 지칭하는 용어로 Inclusion이라는 말이 새로 등장했습니다만, 내가 보기에 미국의 현실에서 조차도 소위 ‘Full Inclusion'은 아득한 이상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결이 통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고 , 그래야 진정 Inclusion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통합’은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 간의 ‘이해’(理解; understanding)의 과정이자 ‘상호주관’(inter-subjectivity)의 만남으로 규정하고자 합니다. 여기 ‘이해의 과정’은 바로 앞서 말한 ‘역지사지’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해의 과정’은 네 주관과 내 주관이 서로 만나는 ‘상호주관의 만남’입니다. 교육은 ‘서로주관’의 만남입니다. 교사의 주관과 학생의 주관이 서로 만나야 마음의 소통으로서 교육이 가능합니다. 장애학생의 주관과 비장애학생의 주관이 만나야 ‘마음의 소통’으로서 통합이 가능합니다. 심성함양이 교육의 본질적 목적이라면 ‘마음의 소통’은 통합교육의 궁극 실재입니다.

 

 

2.

 

   교육의 과정에서 ‘마음의 소통’으로서 통합은 여러 차원에서 작용합니다. 좀 더 분석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부모와 자녀 간의 ‘마음 소통’ 문제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극진한 짝사랑입니다만, 자녀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 구요? 그게 서로 코드가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부모의 욕심에서 비롯될 때에 흔히 그렇게 됩니다. 이를테면 부모 자식 간의 ‘마음 소통’에 실패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잘 자랄 수 있는 본래성(本來性)이 과일의 씨앗처럼 내장(內藏)되어 있습니다만, 부모의 욕심 때문에 이 ‘본래성’이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이런저런 때와 먼지로 가득 덮여 버릴 수 있습니다. 본래성이 엉뚱한 데에 마실 나가 있으니 실성(失性)하게 되는 겁니다.

 

  또 장애자녀를 매개로 한 부모(부부) 간의 ‘마음 소통’은 어떤가요? 여기 오신 아버지-어머니 내외간에 서로 맘이 잘 통합니까? (앞에 앉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아니요’ 라며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부부간에 맘 소통 참 어렵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답이 없다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으니 부부간의 다툼은 다반사입니다. 게다가 장애자녀를 가진 가정의 부부간에는 자녀의 장애 때문에 갈등이 더 심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장애자녀로 인해 부부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 지는 가정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아이로 인해 하늘이 우리를 시험해 보는지도 모른다고 자성(自省)하는 겁니다. 모든 게 맘먹기에 달렸습니다.

 

  학교에서 교사와 아동학생간의 ‘마음 소통’은 어떤가요? 앞에서 교육은 결국 ‘마음 소통’이라고 했습니다. 학생-교사 간에 ‘마음 소통’이 되어야 학생은 교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고, 교사는 학생을 동반자로 ‘이해’하게 됩니다. ‘스승’은 학생에게 존경 받는 교사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존칭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존경하는 스승을 맘속으로 간직하지 못하는 학교교육은 실패한 교육입니다. 학생이 맘속으로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야 교권이 바로 섭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교권이 왜 이처럼 추락했는지 원천적으로 되짚어 봐야 합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일차적 책임은 언제나 가르치는 사람 쪽에 있습니다. 오늘날 특수교사는 장애학생을 돌보는 일(caring), 관리하는 일(training), 교육하는 일(educating) 중 진정 무엇이 자신의 본업이라고 생각합니까? 실제로는 세 가지의 일이 한데 섞여있습니다만, 당연히 본업은 교육이고 나머지는 전부 부차적이거나 보조적입니다. (특수)교사들 가운데 스스로 이걸 착각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게 특수교육에서 전형적인 ‘본말전도’(本末顚倒)입니다.

 

  통합교육에서는 특수교사와 원적학급 교사 간에 동반자적 협력(co-operation)을 퍽 강조합니다. 강조하는 만큼 잘 되지 않는 게 교사 간의 협력적 소통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학력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원적학급 교사의 입장에서는 학급평균 점수를 갉아먹기만 하는 특수학급 학생이 늘 부담스럽습니다. 특수아동은 특수교사가 그냥 알아서 적당히 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만 통합이지 실제로는 ‘소록도’ 교육입니다. 말인 즉은 통합교육이지만, 실제는 ‘제외교육’입니다.

 

  통합교육에서 장애아동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절실히 와 닿는 건 또래 아이들 간의 ‘마음 소통’ 문제입니다. 맹학생이 학업성취 면에서는 일반학급에서 성공적인 통합교육을 받고 있다손 치더라도 쉬는 시간에 늘 혼자 외톨박이로 앉아있으면서 옛날 맹학교 시절을 맘속으로 그리워하고 있다면 이게 정녕 성공적 통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통합은 함께 격의 없이 어울리는 교육입니다. 옛날(1950년대)에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심한 뇌성마비학생이 있었지만, 우리는 교실에서나 운동장에서나 격의 없이 그와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때는 마을공동체 문화가 바로 학교공동체 문화로 이어졌기에 특수교육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자연히 마을과 학교에서 통합(inclusion)이 된 겁니다. 원래 통합은 가장 자연스러운 겁니다. 인위적인 통합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습니다.

 

  학교에서 또래 간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집에서 형제자매 간의 ‘마음 소통’도 절실합니다. 한 가정 안에서 형제자매 간에 소통이 원활치 않다면 항차 학교에서 또래들 간의 소통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기에 창피하다든가, 아버지 어머니가 왜 우리한테는 역차별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등으로 불만이 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형제자매 간에 장애를 가진 동생이나 형(혹은 누나)에게 스스로 알아서 잘 대해줍니다. 그게 본래 사람의 심성입니다. 가정 안에서 장애자녀와 비장애자녀들 간에 마음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면 내가 보기에는 장애당사자보다 비장애자녀들 쪽의 마음문제에 달렸다고 봅니다. 네 아픔이 곧 내 아픔이라는 맘이 가족들 간에는 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하는 사단(四端) 가운데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으뜸입니다.

 

  마음의 소통으로서 통합이 성공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실 안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 이웃, 지역사회 안에서 다면적으로 소통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닫히면 장애아동의 마음은 더 굳게 잠기기 쉽고, 내 마음이 열리면 그만큼 장애아동의 마음도 쉽게 열립니다. 그래서 마음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마음 알아차리기(mindfulness)가 중요합니다. 베트남 출신의 세계적 불교지도자 틱낫한(Thich Nhat Hanh)은 불교 수행에서 ‘Mindfulness'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 말은 틱낫한 스님이 특별히 지어낸 용어로 우리나라에서는 ‘마음 챙김’, ‘마음 다함’, ‘마음 깨침’, ‘마음 알아차리기’ 등으로 옮겨서 사용됩니다. 틱낫한의 저서 가운데 『마음 챙김의 신비』(The Miracle of Mindfulness, 1975)라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 이현주가 옮겨 최근에 ‘틱낫한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불광출판사에서 냈다). 요즘 와서 우리나라에 틱낫한 스님의 어록과 글이 부쩍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즘 모두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방증(傍證)합니다. 이 ‘마음 챙김’에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기적으로 바꾸는 그런 신비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통합은 ‘마음의 소통’이고, 그것은 곧 교육의 신비로 이어집니다.

 

 

3.

   “통합은 ‘마음의 소통’이다”는 이 주제는 결국 교육을 종교 차원까지 끌어 올리는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으뜸되는 가르침이 종교(宗敎)이고, 가르쳐 길러내는 것이 교육(敎育)이라면, 그 교육의 궁극은 결국 종교와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은 결국 마음의 실재에 연관되고, 종교는 그 마음의 궁극적 실재(ultimated reality)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나는 심층종교와 특수교육의 만남을 다시 강조합니다. 작년 8월 나의 정년기념 세미나에서 나는 일부러 “심층종교와 특수교육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강의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층종교는 의례 중심의 표층종교와 대비됩니다. 교회 가서 기도하고 성당에서 미사 올리고, 절에 가서 불공드리는 의례적 행위 이면에 담겨 있는 예수 가르침의 본질, 붓다 가르침의 본질을 문제 삼는 것이 ‘심층종교’입니다.

 

  나는 ‘인간학’으로서 특수교육학을 생각하면서, 특수교육은 결국 철학과 종교에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최근에 더욱 다지게 되었습니다. 2011년 교수노릇 40년에 정년을 1년 남겨놓고 『한국특수교육론: 우리나라 특수교육(학)의 정체성』(2011, 대구대출판부)이라는 책을 내 딴엔 맘먹고 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었는지 아직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만, 사실 글이든 말이든 피드백이 없으면 당사자로서는 난감하지요.

 

  어쨌건 그 책을 내고 나서 나는 뭔가 『한국특수교육론』에서 ‘한국’의 고유명에 걸 맞는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년하자마자 곧장 정년에 따른 공백이라 할까 허전함을 달랠 요량으로 위 책의 후속편으로 『유학․ 불학․ 프로테스탄티즘의 한국특수교육론』(2013, 한국특수교육문제연구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한국특수교육사상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특수교육과 심층종교의 만남을 좀 더 체계적으로 드러내 보고 싶었던 겁니다. 이 책에 대한 내 의도가 독자에게 어떻게 비칠지 역시 알 수 없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쯤해서 종교 차원의 ‘마음 소통’ 문제를 짚어 봅시다. 유학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해서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인간에게 품부되어 있는 본래성(本來性)으로 인간의 성(性)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앞에서 ‘심성함양’은 곧 ‘본성회복’이라 했던 겁니다. 『중용(中庸』에서 교육은 이 본래성이 시키는 바에 따라서 인간이면 마땅히 가야할 길인 도(道 ; tao)를 닦는 과정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학이 우리 특수교육에 시사하는 중대한 함의를 두 측면에서 해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는 교육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가 함부로 교육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엄중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특수교육은 교육본질의 복원이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교육의 가능성이 모든 아동에게(장애가 아무리 무겁고 심할지라도) 품부(稟賦)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해서 교육에는 그 부류가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타이완의 지적장애 특수학교에 가보면 입구에 ‘有敎無類’라는 말을 커다랗게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유독 우리들 ‘마음 안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바로 보기(즉, 見性)만 하면 깨친 사람(즉, 成佛)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교수행은 곧 우리에게 마음공부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심성함양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수행은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교육과정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불학의 가르침은 곧 ‘마음공부’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공부는 곧 ‘마음소통’과 직교(直交)합니다. 즉, 내 마음공부가 바로 서기만 하면 다른 사람과의 마음소통이 원활해지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학에서는 말로하지 않고 무언중에 마음으로 통하는(알아차리는) 교육(즉, 不言之敎)이 으뜸이라고 했습니다.

 

  유학과 불학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즉 마음의 수준에서 우리 특수교육에 지대한 함의를 제공해 주고 있음에도 실천적으로 특수교육에 특별한 기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론의 실천적 과제는 우리들 마음의 문제로 남겨놓은 셈입니다. 그에 비해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은 우리나라에서 근대특수교육의 실천에 그 선구적 도관(導管)이 되었습니다.

 

  주지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특수교육은 19세기 말 평양에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인 Rosetta Sherwood Hall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이래, 20세기 초에는 역시 평양에서 이창호(李昌浩) 목사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평양광명맹아학교(平壤光明盲啞學校)를 설립하여 맹교육과 농교육을 실천했습니다. 이처럼 평양은 프로테스탄티즘의 보급과 더불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성지(聖地)가 되었습니다. 한편, 광복직후에는 이영식(李永植) 목사가 대구맹아학교(大邱盲啞學校)를 설립함으로써, 남한에서는 대구가 특수교육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특수교육의 성립과 전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래 혹은 그 전파와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사상적 배경에 기초하여 저는 유학-불학-프로테스탄티즘을 가로지르는 즉, 회통(會通)의 한국특수교육론을 정립코자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유학-불학-프로테스탄티즘을 가로지르는 마음의 요체는 ‘자애’(慈愛)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유학의 입장에서는 ‘인자’(仁慈)라 할 테고, 불학의 입장에서는 ‘자비’(慈悲)로, 기독교에서는 ‘박애’(博愛)라는 말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이 삼자를 가로지는 마음은 ‘자애’(慈愛)입니다. 원래 한자에서 ‘慈’라는 말의 뜻은 숲이 우거진 상태를 지칭합니다. 결국 ‘보듬는 마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저는 유학-불학-프로테스탄티즘을 회통(會通)하는 ‘마음의 소통’을 통합의 궁극 실재로 오늘 여러분들께 제기하고자 합니다. 이게 아직 여러분들에게 좀 생뚱맞게 들린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어쩌면 내 맘이 아직 영글지 못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모자이크어린이집의 통합프로그램을 매개로 부디 ‘마음소통’의 공동체로 거듭 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07.11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