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학교의 어제와 오늘: 그 역사적 성찰
김 병 하(金炳廈)
특수교육과 명예교수
머리말
금년은 우리 대구대가 개교한지 57주년이 되는 해다. 『대구대학교 40년사』(1998)에서는 그 발전과정을 (1) 창학기(1956-1961), (2) 과도기(1961-1972), (3) 확충기(1972-1981), (4) 도약기(1981-1989), (5) 변혁기(1989-1996)로 구분하였다. 이어 『대구대학교 50년사』에서는 (1) 대학의 창학기(1956-1961), (2) 시련과 극복(1962-1971), (3) 교세의 확충(1972-1981), (4) 발전의 큰 걸음(1982-1987), (5) 변화와 개혁(1988-1995), (6) 미래를 향한 도약(1996-2006)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구대 발전과정에 대한 시기구분의 표현은 다소 상이하지만 전체적으로 구분의 기준은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술과정에서 발전의 공(功)은 잘 드러나 있으나, 과(過)가 될 만한 것은 은폐되거나 축소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준엄한 거다. 우리가 마음대로 이리저리 왜곡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는 우리 대구대의 발전과정을 (1) 창학의 시련과 극복과정(1956-1971), (2) 양적발전과 변혁과정(1972-1996), (3) 안정과 정체의 과정(1997-현재)으로 대별해서 보고자한다. 창학의 시련과 극복과정은 창학의 시련(1956-1963)과 그 극복과정(1964-1971)으로 다시 대별된다. 양적발전과 변혁과정은 1988년을 기준으로 구분되며, 안정과 정체과정은 다시 1996년을 기점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1988년은 이태영(李泰榮) 초대총장이 병환으로 쓰러진 때이고, 1996년은 총장직선제가 정착되어가는 때이다. 그래서 1988년은 혼란을 예고한 해이고, 1990년대 중반은 민주화의 빛과 그늘이 공존한 때이다.
필자는 건학 60년을 내다보는 우리 대구대의 역사를 크게 시련기, 양적 발전기, 혼란과 정체기로 개념화해서 해석․평가해 보고자한다. 이것은 건학 이래 우리 대학의 역사를 단지 ‘발전’(developing)이라는 개념으로 미화해서 단순화하지 않고 대학이 대학답게 존재해야할 내적 기준에 비추어 우리 대구대를 반추해 보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 대구대는 ‘역사의 심판대’에 서 있다. 그 심판은 엄중할 게다.
1. 창학의 시련과 극복과정(1956-1971)
성산(星山) 이영식(李永植; 1894-1981) 목사는 광복기념사업으로 남이 하지 않고 외면하는 일을 찾아 시작한 것이 맹인과 농인을 위한 장애인 교육사업이었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기독교 목사인 자신이 앞장서 해야 할 일은 ‘벙어리 봉사사업’인줄 알고, 1946년 대구맹아학교(大邱盲啞學校)를 설립하였다. 광복직후 가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 아무도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던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에 ‘특수교육’의 깃발을 꽂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구는 특수교육의 서울이다. 이 ‘벙어리 봉사사업’이 하나의 초석이 되어 10년 후에 오늘의 대구대학교 전신인 한국이공학원(韓國理工學院)이 설립되었다.
1956년 한국이공학원의 설립은 이영식 목사의 장남인 이태영(李泰榮;1928-1995)의 귀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본에서 공학도로 유학중이던 이태영은 1955년 10월 일본 토꾜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맹인복지대회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한국대표로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공학도로서의 꿈을 접고 장애인교육과 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인생의 일대 전환을 맞는다. 당시 상황을 이탱영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55년 10월 20일로 기억합니다. 그 때 동경에서 고은애 선생과 제가 고학을 하고 있었는데 첫 아시아맹인복지대회가 13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동경 산캐이신문사 국제회의장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이영식 목사님이 한국을 대표해서 참석하실 예정이었는데 당시 이승만 정권의 반일정책으로 인해 방문을 못해서 제가 대신 참석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맹인복지대회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맹인의 정의라든가 각 나라의 맹인복지에 대한 현황이라든가 이런 걸 보고 제가 공학도로서의 일도 중요하지만 맹인복지와 교육이 대단히 시급하다는 걸 알고 새로 눈을 뜬 셈입니다(1985년 9월 12일 이태영 초대총장 회고담).
이처럼 이태영의 아시아맹인복지대회 참석은 후에 대구대 설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태영은 귀국 후 장애인 교육도 시급하지만 이 교육을 담당할 지도자 양성이 매우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아무래도 대학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사업을 해서 맹아학교를 유지 경영하겠다는 생각은 제가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고학할 때 과일 장사를 해 봤는데 도저히 안돼요. 그 이래로 나는 경제수익을 위한 그런 사업은 절대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장애인교육과 복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론개발, 지도자 양성, 연구 이런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가 앞으로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이게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해서 대학을 세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1985년 9월 12일 이태영 초대총장 회고담).
이것이 대구대의 전신인 한국이공학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당시 한국이공학원의 설립 이유를 그 설립신청서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특수학교 졸업생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대학설립을 계획하였으나, 문교당국에서 인문과 또는 특수대학은 허(許)할 수 없고 이공과(理工科)이면 가능하겠다는 형편이어서 이공과를 설립하기로 해서 도에서 학원인가를 하게 된 것이다. 본 이공과는 맹아인(盲啞人) 고등학교 출신자의 최고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일반인도 원하는 자에게 입학을 허할 수 있다.(1956년 한국이공학원장 이영식, 한국이공학원 이사장 최종철 명의로 올린 한국이공학원인가 신청서 중에서).
당시 대구맹아학원 이사회에서는 한국특수교육재단을 구성하고 궁여지책으로 ‘한국이공과대학’의 전단계로 한국이공학원 설립을 추진케 되었다. 1956년 6월 2일자로 경상북도 지사(이근직)는 유기공업학과, 무기공업학과, 가정과학과에 6학급 300명을 모집하도록 인가하였다. 이것이 우리 대구대의 첫 출발이자 장강의 원류(源流)이다. 한국이공과대학의 학장은 이영식, 학감은 이태영이었으며, 실제 행정업무 분장에서 교무는 황성환, 학생 및 도서에 안병즙, 서무에 원영조 등이 담당했다. 그해 9월에 부광식 교수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부임하고, 이어서 이영렬(경제학) 교수가 교무과장으로 부임함에 따라 경제학과를 새로 설치하였다.
이처럼 한국이공학원의 인가를 얻어 경영하던 중에 문교부에서 인가해 주는 대학설립의 준비 성격을 지니는 각종학교로서 1957년에는 ‘한국사회사업학교’의 인가를 얻게 된다. 우리 대구대가 1961년 정규 4년제 대학으로 인가되기까지 4년 간(1957-1961)은 한국사회사업학교가 ‘한국사회사업대학’으로 승격 인가되는 일련의 준비과정이었다. 한국사회사업학교는 처음에 공업화학과와 공업경제학과 2개 학과로 운영하였으나, 1959년에는 가정학과와 사회사업학과를 설치하여 주로 여학생들을 겨냥하여 학과를 운영하였다. 우리 대학의 학보발간의 효시로 1959년 3월 1일자로 『社大女性』이 발간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한국사회사업대학을 인가 신청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운영해 오던 학과 대신에 과감하게 본래의 건학정신을 본격적으로 구현할 목적으로 사회사업학과와 특수교육과 2개 과를 앞세워 인가에 임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이자 현실에 비추어 너무 앞서간 발상이었다.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오천석(吳天錫) 박사의 각별한 이해 끝에 1961년에 입학정원 20명 단설학과인 특수교육과 만으로 정규 4년제 대학의 인가를 득하게 된 것이다. 후에 이태영 초대총장은 “이걸 가지고 인가해 주는 문교부나 인가 받은 우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렇게 해서 단설학과로 한국사회사업대학에 특수교육과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수교육과는 다시 사생교과(경제학)전공과 과학교과(화학)전공으로 나누어 모집하였고,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국사회사업대학 승인과 더불어 초대학장은 당연히 이영식 목사가 맡았으나, 동년 9월에 이태영 학장 취임을 신청하여 1961년 11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이태영 학장은 불과 30대 중반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에는 늘 걱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에서는 부실한 대학교육을 정비하기 위해 대학정비를 서둘렀다. 당시 군사정부의 사립대학 정비령에 의한 정비 대학 가운데 우리 대학이 포함되어, 기존의 4년제 대학을 폐지하고 2년제 초급대학으로 설립인가(1962.2.28)를 받게 되었다.
당시 초급대학으로 격하되면서 설립학과 정원은 특수교육과 80명, 사회복지학과 80명 모두 160명 정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의 전문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 대학의 설립이념이나 취지에 비추어, 2년제의 초급대학 수준에서는 그 전문성을 살리기에는 너무 미약했으므로 1963년 9월 정기 이사회에서 4년제 대학 개편 승격 안을 결의하여 신청하였다. 그 결과 그 해말에 4년제 대학으로의 복권과 동시에 초급대학을 폐지하였다. 그러니까 1961년에 천신만고 끝에 4년제 대학으로 인가 받아 특수교육과에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1962년과 1963년에는 초급대학으로 특수교육과와 사회복지학과 학생모집을 하였다. 그러다가 1964년에 다시 4년제 대학으로 복원되어 특수교육과, 사회복지학과, 산업복지학과 등 3개 학과에 입학정원 60명을 모집하게 되었다.(1965년에 필자가 특별전형 형식으로 특수교육과에 입학하고 보니 4년제 대학 임에도 2학년 선배뿐이고 3,4학년은 비워 있는 상태였다.)
1964년에서 1966년까지는 전체 입학정원 60명에 특수교육과, 사회복지학과, 산업복지학과를 운영하였으나, 1967년에는 입학정원이 배로 늘어나 특수교육과 40명, 사회복지학과 40명, 산업복지학과 40명으로 증원하여 재학정원이 모두 48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 중심으로 우리 대학은 그 특성화가 뚜렷한 대학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 1968년부터 대학입학 예비고사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우리 대학은 신입생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두가 중앙의 명문대학으로 몰리는 마당에 지방대학의 미개척 분야에 학생들이 지원할 리가 없었던 게다. 이런 어려움은 당시 우리 대학의 생존을 위해 참혹한 시련이었지만, 원래 대학 자체가 소규모이고 사회복지와 특수교육 분야로 특성화된 대학이어서 능히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 대학은 당시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제일주의 원칙에 따라 교육정책을 추진하는 와중에 고집스럽게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교육과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복지분야의 전문가 양성과 그 연구개발에 중심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이 분야의 특성화 대학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 대학은 정치변동이나 교육정책의 구비마다 지방의 약소대학으로서 위기의 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역경의 구비마다 이태영 학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관용성, 그리고 교수들의 헌신적 봉사, 학생들의 파이오니아적인 자긍심이 하나로 어우러진 가운데 그 난관을 극복해 올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특수교육과에는 안태윤, 김정권, 서석달 교수가, 사회복지학과에는 김득봉, 황성애, 장훈 교수가, 그리고 산업복지학과에는 장기주, 김인환 교수가 중심이 되어 어려운 조건 속에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 지금은 이분들이 모두 고인이 되었고 김정권(金正權) 교수가 유일하게 생존해 계실 뿐이다. 당시에 이태영 학장은 바쁜 중에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특수교육개론-문제아교육』(1963, 집문사)을 저술하여 직접 강의를 맡았다. 당시에 이태영 학장은 특수교육개론과 특수교육행정을 직접 강의하였다. 같은 무렵에 우리 대학 부학장이었던 이영환(李榮還) 교수는 『사회복지행정: 이론과 실제』(1963, 형설출판사)를 저술하여 이 분야에 큰 기여를 하였으나, 이듬해(1964)에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
초창기에 특수교육과와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은 학술활동에 대한 의욕이 높아 학과 교수들의 지도하에 ‘학회지’를 발간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특수교육과에서는 1963년 7월에 『특수교육과학(特殊敎育科學)』이라는 이름으로 학회지를 창간하였다. 당시 학과장은 안태윤(安泰潤) 교수였고, 학회장은 배연창(裵淵昌; 안동연명학교 설립자)이 맡아 앞장서 일했다. 창간호에는 이영식 목사의 축사, 안태윤 교수의 “특수교사를 위한 현직교육의 방법과 과정”이라는 논문, 그리고 “농아의 평형능에 관한 소고”(이태영, 원영조)가 게재되었고, 신호영, 이석진, 손규철 등에 의한 학생논문이 세 편이나 실렸다. 한편, 사회복지학과(당시 학회장: 최영두) 에서는 1963년 10월에 『복지(福祉)』라는 제호로 사회복지학회지 창간호를 발간했다. 이태영 학장의 “목표를 끝까지 추구하자”라는 축사가 있었고, 이영환 부학장은 “무관의 여왕 아담스의 생애와 그의 업적”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사회복지학회 연구부에서는 “복지기관 운영의 문제점(고아원 실태조사보고)”을 보고했다.
이처럼 당시에 대학논문집이나 연구소논문집이 나오기 전에 학생이 주도해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의 학회지가 발간되었다는 것은 당시 학생들의 자긍심이나 향학 열의를 짐작케 한다. 한편 우리 대학의 특수교육연구소는 1963년에 설치된 이래 그간 특수교육 관련 통신자료를 개발하고, 아시아․아프리카 장애아동 작품전시회를 통해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장애아동 교육과 복지 증진에 기여해 왔다. 그러던 중 1968년 10월에 연구소(당시소장: 김정권) 논문집으로 『특수교육연구』를 처음 발간하게 되었다.
연구소논문집 창간호 발간에 즈음하여 이태영 학장은 간행사에서 “본 연구지가 후진된 우리나라 특수교육 현장과 학계를 연결하여 실증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특수교육 이론을 형성발전 시키는 연구활동의 기반이 될 것을 믿습니다.”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특수교육 연구의 기본이 인간애의 구체적 실천에 있음”을 강조하여 과학적 실증성과 인간애의 존엄을 함께 아우르고자 했다.
『특수교육연구』 창간호에는 안태윤 교수의 “한국맹인의 고등교육에 관한 일 연구”, 김정권 교수의 “정신박약아의 성격특성에 관한 일 연구”등이 발표되었고, 현장연구 논문으로 김천년, 조병수, 이계택, 문미자 등에 의 한 네 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같은 해에 사회복지연구소에서도 논문집을 창간했고, 한국사회사업대학 대학논문집도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대학논문집 창간호에는 강회양, 김정권, 서석달, 안태윤, 이규식, 장훈 교수 등에 의한 6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이 시기에 우리 대학은 몇 차례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교육도시 대구에서 대학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관의 구비마다 이태영 학장은 지방의 약소대학이라는 설움을 딛고 대학을 이끄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다.
2. 양적 발전과 변혁과정(1972-1996)
우리 대학이 양적으로 급격히 성장한 시기와 우리나라가 고도경제 성장을 추진한 시기는 맞물려 있다. 게다가 70년대의 지방대학 육성책에 힘입어 우리 대학은 양적 확대에 매진해 오던 중 1981년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되고, 이듬해에는 교명도 ’대구대학교‘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합대학 승격이후 우리 대학은 힘찬 발전을 거듭해 오던 중 이태영 초대총장이 병환으로 쓰러지고 밖으로는 민주화의 바람이 몰아침에 따라 변혁과 갈등을 되풀이하는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는 중에도 교수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총장선출 직선제가 관철되고 미국서 병마에 시달리던 이태영 총장이 마침내 소천(召天)함에 따라 대구대의 실질적인 운영 주체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종합대학으로 덩치가 엄청나게 크진 반면에 그에 따르는 요구도 다양하게 분출되는 가운데 좀 더 강력한 리더십과 중장기 발전계획에 따른 혁신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총장직선제 도입은 민주화의 명분을 살리는 데에 기여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대학교육의 수월성을 책임성 있게 감당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말았다. 이하에서는 이 시기의 우리 대학 발전과정을 ‘양적 발전기’(1972-1988)와 ‘변혁의 진통기’(1989-1996)로 대별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양적 발전기(1972-1988)
70년대에 우리 대학은 꾸준한 학과 증설과 종합대학의 전단계로 학부제를 도입한 것으로 그 양적 발전의 외양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1971학년도 한국사회사업대학 입학정원은 특수교육과, 사회복지학과, 경제학과 각 30명씩 90명과 특수교육과 야간부(2부) 30명으로 모두 120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5년 후인 1976년에는 특수교육과 주간 120명(영어전공 40, 과학전공 40, 특수교육전공 40), 특수교육과 2부(야간) 120명(국어전공 40, 사생전공 40, 수학전공 40)으로 특수교육과만 해도 입학정원이 240명으로 늘어났다. 이 때 특수교육과 밑에 나열한 교과전공은 후에 사범대학의 독립학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특수교육과는 우리 대구대의 산파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전국 유수의 사범대학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 확장설계의 주역으로 김정권(金正權: 1963-2002 재직)교수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사회복지학과는 주간 40명과 야간 40명으로 늘어났고, 경제학과도 1,2부 모두 80명, 그리고 1975학년도에는 복지행정학과를 설치하여 역시 이듬해에 주야간 모두 80명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에 1977학년도부터는 학부제를 도입하여 또 한 차례 양적 확장을 가져 왔다. 즉, 1977학년도에 교육학부에는 특수교육과 밑에 1,2부 공히 국어교육전공, 영어교육전공, 수학교육전공, 사회교육전공, 과학교육전공, 특수교육전공을 두어 입학 정원이 36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또 사회복지학부는 사회복지학과와 복지행정학과를 두어 1,2부 합쳐 160명의 입학정원을 확보하였다. 산업학부는 주간에 경제학과 야간에 지역사회개발학과를 두어 입학정원 80명을 확보하였다.
이어 1978학년도에는 교육학부에 기존의 전공 외에 역사교육전공, 물리교육전공, 초등교육전공, 지리교육전공, 생물전공을 증설하여 특수교육과 밑에 1,2부 합쳐 420명의 입학정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산업학부 대신에 경상학부를 두어 기존의 경제학과 외에 경영학과와 회계학과를 신설하여 입학정원 120명을 확보했다. 사회복지학부는 기존의 사회복지학과를 사회복지전공과 산업복지전공으로 나누고, 복지행정학과와 지역사회개발학과를 주야간 모두 개설하여 입학정원이 240명으로 늘어 났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대학교의 12개 단과대학 가운데 그 역사적 중추가 된 단과대학은 특수교육과가 있는 사범대학, 사회복지학과가 있는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가 있는 경상대학 등 3개 단과대학이랄 수가 있다.
1979학년도에는 기존의 교육학부, 사회복지학부, 경상학부 외에 이공학부를 두어 건축공학과, 토목고학과 공업경영학과 등을 신설하여 입학정원 160명을 확보하였다. 이듬해에는 기존의 4개 학부 외에 인문학부, 자연과학부를 신설하여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거의 마무리한 셈이다.
학부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우리 대학은 특수교육 분야와 사회복지 분야를 중심으로 대학원과정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우리 대학의 대학원과정은 1973년 특수교육학과 석사과정 20명으로 출범하여 이듬해에는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이 개설되었다. 이어 1975년에는 특수교육학과에 박사과정이 개설되고, 1977년에는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 그 뒤를 이어 경제학과에 석박사과정이 개설되기에 이른다. 그 후 복지행정학과(‘79)와 지역사회개발학과(‘81)에도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
이처럼 우리 대학이 승승장구(乘勝長驅)로 양적 발전을 거듭해 오던 중 1981년에 마침내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고 이듬해에는 교명도 오늘의 ‘대구대학교’(大邱大學校)로 바꿔지게 되었다. 한사대학교(韓社大學校)에서 대구대학교로 교명이 바꿔지는 과정에는 숨은 일화(逸話)가 있다. 당시 우리 대학 영어영문학과에는 권오택(權五宅)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는데, 권 교수는 대구공고 출신으로 고교시절에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당시 권오택 교수는 음으로 양으로 우리 대학의 현안문제 해결에 많은 기여를 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세간에는 이태영 총장이 이순자 여사의 오빠뻘이 되는 관계라는 등 다소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 소문의 진원은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이 우리 대학을 방문하여 희사한 금액에다가 우리 대학 자체에서 마련한 기금으로 전국 대학에서는 유일하게 맹인들을 위한 ‘점자도서관’을 신축하였다. 오비이락(烏飛梨落)격으로 그 점자도서관 개관행사 시에 전두환 대통령을 대신해서 이순자 여사가 와서 개관식 탶을 끊어 주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두 분은 같은 성산(星山) 이(李) 씨였다.
이런 와중에 이태영 총장은 우리 대학의 교명을 ‘대구대학교’로 하고 싶었으나, 지역사회 여론이 모두 반대쪽으로 기울고 있는데다가 영남대학의 전신인 구(舊) 대구대 동문들의 반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대구대학교’의 대구를 ‘대구’(大丘)로 표기하여 올렸는데, 청와대 대통령의 결재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大邱’로 바로잡아 재가해준 결과 감히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생전에 이영식 목사는 “안 되다가도 되는 기 인생인 기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가 싶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태영 총장은 대구대학교 초대총장으로 1982년 3월 4일 정식 취임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학원 창설 36주년 대학 개교 26주년을 맞는 해였다. 총장 취임사에서 이태영 총장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인간 존엄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 일정한 사명감을 가지고 절대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들입니다. ...(중략)어떤 삶도 개성이라는 독자성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고 더 빨리 갈 수도 없고 더 늦출 수도 없는 절대성을 지닌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어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인 까닭에 지극히 존엄한 것입니다(1982.3.4. 이태영 총장 취임사 중에서).
그는 총장 취임사에서 평소 자신이 믿어 온 천부적 인권의 존엄과 그에 따른 삶의 자각과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이날 총장 취임식에서는 평소에 이태영 총장께서 존경하여 마지않던 일본의 장애인 성자로 일컬어지는 쇼치사부로 박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후이 쇼치 박사는 중중뇌성마비 아들을 위해 적립한 적금을 찾아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3억원 이상에 상당하는 장학금을 쾌척하였으며, 100세를 훌쩍 넘긴 지금도 건재하다.
종합대학 승격 이후에는 일반대학원 외에도 특수대학원이 줄을 이어 설치되었다. 1982년에는 사회개발대학원이 설치되어 초대원장에 최재원 교수가 취임하였다. 이듬해(1983)에는 교육대학원(초대원장: 김정권 교수)이 설치 인가되어 17개 전공에 걸쳐 계절제로 학생모집을 하였다. 그리고 80년대에 접어들어는 경산 진량벌에 본격적으로 캠퍼스를 개발하여 대구 대명캠퍼스와 경산 진량캠퍼스가 공존하는 가운데 전체적으로 그 중심축이 경산 진량캠퍼스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활기차게 양적 발전을 거듭해 오던 중 8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안 밖으로 중대한 격변의 진통을 겪게 된다.
격변의 진통(1989-1996)
이 무렵 우리 대학은 안 밖으로 격변의 진통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기 마련인가 보다. 1987년 소위 6월 민주항쟁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고 대학가에는 한 차례 거센 민주화의 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이 민주화의 바람 앞에 이태영 총장은 온 몸으로 모든 문제를 감당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평소에 대학행정 책임자로서 지나치게 업무가 과중되어 오던 중 1988년 봄에는 마침내 병원에 장기입원하게 되었고, 총장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그 해 가을에는 미국으로 지병 치료를 위해 출국해야 했다. 이 때 이태영 총장의 나이는 만 59세로 한창 능숙하게 집무를 수행해야 할 때였으나, 안타깝게도 병마에 시달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약 7년간이나 미국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95년 11월 29일 이국땅에서 쓸쓸히 운명하고 말았다.
한편, 1987년 가을에는 민주화 운동의 성과에 힘입어 대학에도 교수협의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대학은 인문대학에서 가장 먼저 교수협의회(초대회장: 권재선)가 결성되고 이어 사범대학에서도 교수협의회(초대회장: 김병하)가 결성되자 이듬해에는 대학 전체 교수협의회가 결성되어 대구대교수협의회 초대의장으로 권재선(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선출되었다. 전술한 것처럼 이태영 총장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 장기간 총장공석 사태로 이어지자 우리 대학은 민주화의 분출과 기존체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보수 세력 간에 심한 갈등을 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이태영 총장의 무게가 원체 막중한 것이어서 총장 공석 와중에 우리 대구대는 선장 잃은 배처럼 난항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대학에서 총장직선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4월 교수협의회에서 ‘학원정상화를 위한 제언’이라는 성명서를 평의회 의결로 채택 발표한 데서부터다. 교수협의회의 총장직선제 도입이 끈질기게 제기되는 가운데 1989년 6월 29일 개최된 총장대행 선출을 위한 전체교수회의에서 원영조(元英祚) 교수가 총장대행으로 선출되었다. 원영조 총장직무대행은 대학건학 이념에 따라 이영식 목사의 사랑․빛․자유와 이태영 총장의 대학경영 철학의 연속선상에서 대학을 안정되게 이끌려고 최선을 다했다. 원영조 총장직무대행은 우리 대학 주소를 경북 경산 진량 내리리 15번지로 변경하고 대학본부를 경산으로 이전하여 진량 캠퍼스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정착 시켰다. 당시 원영조 대행은 가능하면 이쪽저쪽 의견을 청취하여 대학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으나 민주화의 분출요구를 적절히 반영하고자 하는 미국 쪽 이태영 총장 일가의 판단미숙으로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1990년 신학기에 접어들며 미국서 장기간 신병치료 중이던 이태영 총장은 이상춘(李相春) 교수를 부총장에 임명하여 총장 직무를 대행토록 하였다. 이상춘 부총장 체제는 교무처장 권기덕, 학생처장 육종수, 기획처장 심의순 등으로 교체하고 대학원장으로 신상준 교수가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학내 민주화 운동은 이태영 총장의 장기간 공석과 신병치료에 따른 각종 의혹이 난무하는 가운데 내면적으로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1993년 2월에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우리 대학에서는 다시 총장직선문제가 현안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재단이사회는 대구대 제4대 총장으로 신상준(申相俊) 교수를 임명하고, 부총장에 최대식(崔大植) 교수를 임명하였다. 신상준 총장체제의 출범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총장직선제를 현실화하게 하는 데에 일종의 화약고 구실을 하였다. 이 무렵 교수협의회에서는 ‘비상대책 전체교수총회’를 개최하여 “총장임명 거부와 직선총장 선출” 문제를 하나로 묶어 강력한 투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학내분란의 와중에 교육부는 1994년 2월 22일자로 대구대에 임시이사 파견을 단행하여 임시이사 이사장에 김기동 전영남대총장이 취임하여 학내민주화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사태가 수습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총장직선제는 그 효력을 발하게 되면서 난항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994년 3월에 조기섭(曺己燮) 총장이 제5대 총장으로 선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조기섭 총장은 교무처장 김헌무, 학생처장 정동국, 사무처장 이종한, 기획처장에 윤덕홍 교수 등을 임명하여 소위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다. 1년 반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에 학내에 20개의 연구소가 난립해 있던 것을 인문과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소, 기초과학연구소, 과학기술연구소, 장애인종합연구소 등으로 통폐합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전자계산소를 정보통신센터로 개편하여 캠퍼스에 전산망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정보화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개혁을 앞세워 소위 이탱영 총장체제의 공신들에게 명예학위 취소 등에 따른 신분상의 위협을 가하기도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조기섭 총장이 정년퇴임함에 따라 학내는 제6대 총장선출 문제로 다시 구성원 간에 심각한 갈등이 노출되었다. 1995년 8월 말 조기섭 총장의 퇴임이 임박함에 따라 제6대 총장선거에서 윤덕홍 후보가 권기덕 후보를 한 표차로 물리치고 당선되었으나, 교육부 민원감사 이후 임시재단 이사회에서 윤덕홍 당선자의 승인을 보류하였다. 그 후 전체 교수회의에서 윤덕홍 당선자의 재신임을 부결함으로써, 결국 임시 과도체제로 이사회에서 박정옥 교수를 부총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직무를 대행케 했다. 이처럼 업치락 뒤치락 하는 와중에 그 해 11월 29일 이태영 총장이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끝내 운명함에 따라 학원과 대학 전체는 큰 슬픔에 젖어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총장직선 문제를 둘러싸고 학내 교수들 간에 의견대립이 첨예화 하는 가운데 1996년 2월 7일에 제6대 총장선거가 실시된 가운데 외부영입 인사인 박윤흔 전법제처장이 총장으로 당선되었다. 박윤흔 총장은 온건 보수층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본부보직에 기용하는 한편, 포용과 화합으로 대학을 이끌어 가고자 나름의 노력을 하였으나 학내의 깊은 갈등을 봉합하는 데에는 영입인사로서 상당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장직선제는 그간의 비싼 대가를 치루면서 민주적 절차와 제도로 자리를 잡아가기에 이른다.
외부영입 총장으로서 박윤흔 총장은 무엇보다 그동안 누적된 구성원간의 갈등과 분열의 골을 메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취임사(1996.3.8)에서 천명하였다. 그러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효의 화쟁(和諍)이나 불교의 중도(中道)는 양 끝을 버리면서 동시에 양 쪽을 포괄하는 높은 지혜와 관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박윤흔 총장체제에서 보수 쪽의 구성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뜻을 펼치는 기회로 적극 활용하였으나, 소위 학원 민주화에 앞장선 진보 쪽의 구성원들은 다음 총장선거에 대비하여 자신들의 내부적 결속을 다져 나갔던 시기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대학의 총장직선제는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한 하나의 대안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특히 임시이사체제에서 총장직선제는 민주적 절차로 쉽게 활용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수용되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대학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방대학의 육성책에 힘입어 대학의 양적인 발전에서 어느 대학과도 견주기 어려울 정도로 가속화의 에너지를 발휘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무엇보다도 이태영 초대총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그 원천이 되었다. 특히 이 무렵 우리 대학은 지방대학으로서 서울사무소를 두어 이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다른 지방대학에 비해 필요한 현안문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에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광활한 진량 캠퍼스 시대를 열어 감으로써 우리 대학은 지방의 거대 명문대학으로 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태영 총장의 탁월한 구상으로 우리 대학은 노령화 시대에 대비하여 1975년에 ‘노인복지대학’을 설립하였다. 노인 문제를 대학차원에서 어느 대학도 관심을 갖기 전에 우리 대학은 노인복지대학에 이어 노인복지대학원(1978), 장수대학원(1980)을 설치하여 노인들의 평생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던 중 1984년 대구대 평생교육원으로 편제를 확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전통과 축적된 경험을 살려 지금은 우리 대학 평생교육원이 전국적으로 그 프로그램과 운영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편, 이태영 총장이 병환으로 쓰러지기 전 마지막 작품으로 장애인의 교육-복지-재활을 총체적으로 연관지어 ‘재활과학’을 구상해 오던 중, 1987년에 재활과학대학을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출범시킴으로써, 우리 대학의 특성화 축을 마지막으로 완성한 셈이다. 재활과학대학은 직업재활학과, 언어치료학과, 물리치료학과, 심리재활학과, 재활공학과 등 5개 학과로 특성화 분야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특수교육을 선두로 해서 사회복지로 외곽을 넓혀 오던 중에 다시 ‘재활과학’을 접목시켜 전국적으로 장애인 교육-복지-재활의 메카가 되었으며, 이 분야의 외국 전문가들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탁월한 프로그램을 갖춘 모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특성화에 힘입어 우리 대학은 1980년 이래로 1996년 제7차 교육과정개정에 이르기까지 교육부로부터 특수교육분야의 국가수준 교육과정개발을 위촉받아 그 일을 수행해 왔다. 이것은 어느 개별 대학 차원에서 감당할 수 없는 국책사업이었다. 1982년 우리 대학 특수교육연구소에서는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연구를 위탁(문교부: 교육1012-204) 받아 수행하였다. 이 때 4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제정을 위한 개발책임은 이태영 총장이 맡았으나, 실제 연구조정책임은 김정권 교수가 담당했다. 이어 제5차 와 제6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 작업도 우리 대학 특수교육연구소가 맡아 그 일을 추진하였다.
이어 1990년대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위원회에서는 제7차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일반교육은 한국교육개발원에, 특수교육은 대구대에 위촉하여 김정권 교수는 솔선수범해서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연구와 개정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7차 교육과정 개정은 말이 개정이지 거의 ‘제정’에 막 먹는 차원에서 패러다임적 전환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이 때 우리 대학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응하는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발과 운영의 모델을 적극 제시하고자 국가에서 요구하는 이상의 많은 일들을 추진했다. 이를테면 정신지체 특수학교용 전자도서 개발은 그 중요한 예가 된다.
이처럼 이 시기에 우리 대학은 이태영 총장의 강력하고 원대한 리더십에 힘입어 전국의 어느 대학과도 비견할 수 없는 웅비의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필자는 이 시기의 발전 양상을 ‘양적(量的) 발전’으로 규정했는데, 이것은 발전의 또 다른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질적(質的) 제고’를 위한 막중한 부담을 감당해야하는 지혜와 노력을 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태영 총장은 ‘양적 확대’에서 ‘질적 심화’를 위한 전환점에서 당신께서 평소 그처럼 강조하던 건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태영 총장의 무게가 원체 막중한 것이었던 만큼 그가 약 7년간 외국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 내부적으로 분출하는 민주화 요구와 그에 따른 갈등을 그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 대학은 재정적으로 퍽 건전하고 대학 경영상에도 특별한 비리가 없었음에도 총장 장기부재와 총장직선제 도입이 맞물려 교육부에서는 임시이사를 파견하여 학내분란을 수습코자하였다. 우리 대학은 여니 사립대학처럼 비리대학이 아니면서도 일종의 ‘경영미숙’으로 구성원들의 요구를 적절히 담아내지 못한 까닭에 관선이사 파견을 초래한 특이한 사례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랑․빛․자유의 인류 보편이념으로 우리 학원을 건학한 이영식 목사와 큰 뜻을 품고 우리 대학을 실질적으로 여기까지 이끌어온
이태영 총장이 하늘나라에서 볼 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도도하다. 그 흐름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 대구대는 공의(公義)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두 어른의 유족들은 모두 심원(心源)으로 돌아가 건학정신을 거듭 반조(返照)하고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다가 다시 관선이사체제로 돌아가면 어찌할 건가? 기우(杞憂)이길 바란다.
3. 안정과 정체(1997-현재)
『대구대학교50년사』(2006)에서는 대구대 40년 이후의 마지막 10년을 ‘미래를 향한 도약’으로 설정했다. 이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보니 과연 그간(2006년 이후) 우리 대학이 미래를 향해 도약을 해 왔다고 봐야 할지 의문스럽다. 그래서 필자는 1997년에서 현재까지에 이르는 최근 16년을 ‘안정’(安定)과 ‘정체’(停滯)로 표현했다. 총장직선제가 제도로 정착되면서 외양적으로 대구대는 혼란의 격동을 겪고 겨우 안정을 찾은 듯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내면적으로 도약은 고사하고 안일한 정체의 수렁에 빠져들지 않았는지 걱정된다.
이 시기의 ‘안정’은 겉보기에 잠정적으로 물결이 가라앉은 상태이지 언제 어떤 바람으로 물결이 요동할지 모르는 상태의 안정이다. 말하자면 휴전 상태지 평화유지가 아니다. 휴전을 평화로 착각하고 있으니, ‘정체’될 수밖에 없다. 이런 기조에서 이하에서는 역대총장 재임 중의 주요업적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하면서 약간의 논평을 가하고자 한다.
박윤흔 총장 재임기(1996.2-2000.2)
전술한 것처럼 박윤흔 총장은 그간 이태영 총장 장기 부재중 일어났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구성원 간에 파인 깊은 골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우선 외형적으로 우리 대학의 상징인 정문 설치와 그 조경을 완성하였고, 장애인 기숙사도 신축했다. 특수교육․재활 테크노파크 사업단을 출범시키는 한편, 우리 대학에 산․학․연협력원을 설치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99년 말에는 국책사업인 두뇌한국(BK)21 사업 사회분야에서 지방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우리 대학의 ‘특수교육 교육․연구단’(단장: 김병하)이 선정되어 7년간 그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1999년 교육부가 주관한 전국 사범대학 종합평가에서 우리 대학교의 사범대학이 최우수 대학으로 평가․인정받았다.
이 외에도 박윤흔 총장은 우리 대학의 국제교류 기회를 확대하고, 대학홍보 전략도 강화하였다. 그리고 대학발전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학 발전기금은 물론, 기숙사 건립기금, 발전기금 활용 예탁제, 장학기금 모금, 연구기자재와 시설기금 조성 등에 주력하였다. 또 재임 중에 캠퍼스에 초고속 전산망을 구축하여 정보통신 분야의 인프라를 튼튼히 한 것도 주요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개혁 쪽의 구성원들은 영입 총장에 대해 다분히 냉소적인 반응이었고, 총장의 업무수행 방식에 강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덕홍 총장의 재임기(2000.2-2003.3)
90년대 중반 혼란기에 총장선거에서 당선되고도 그 취임이 보류되었던 윤덕홍 교수는 약 5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낸 끝에 재도전하여 우리 대학의 제7대 총장에 취임하는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윤덕홍 교수가 총장에 취임하자 상대적으로 보수진영은 개혁 쪽을 외면하거나 매도하기 일 수였다. 총장선거가 거듭될수록 그 골은 깊이 파였다. 윤 총장 재임 시에 우리 대학은 원격대학 설치계획을 승인 받아 후에 대구사이버대학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2001학년도에는 교원임용고시의 합격률이 전국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같은 해 BK21 2차 연도 평가결과 특수교육 교육․연구단이 사회분야에서 최우수 연구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윤덕홍 총장은 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교육인적자원부 부총리로 발탁되어 자리를 옮김에 따라 제8대 총장선출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4개월간 이강언(국어교육과) 교수가 총장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이런 게 우리 대학으로서는 다행인지 어떤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재규 총장 재임기(2003.7-2005.8)
윤덕홍 총장에 이어 제8대 총장으로 이재규 총장이 당선․취임한 것은 학내 구성원들이 선택한 힘의 축이 개혁에서 다시 보수 쪽으로 회귀한 것을 의미한다. 이재규 총장은 경영학 전공교수답게 의욕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대학경영을 통솔했다. 그가 총장이 되고 나서 두 측면에서 뚜렷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캠퍼스 환경이 눈에 띄게 달라지면서 2004년에는 우리 대학이 ‘아름다운 캠퍼스 10’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대학 행정직원들의 근무자세가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만큼 이재규 총장이 행정업무를 열화같이 닦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 행정직은 신이 내린 직업이라 할 만큼 무사안일에 젖어 있던 오랜 관행이 눈에 띄게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강하면 꺾인다. 이재규 총장은 열화같이 업무를 추진하는 가운데 행정직원들이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언사를 그침 없이 쏟아냈기에 그 뒷감당을 주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행정직원들이 총장퇴임을 줄기차게 제기함에 따라 마침내 자존심이 강한 이재규 총장은 스스로 명예퇴직을 선택하여 중도에 총장직을 물러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재규 총장은 재직 시에도 그랬고 명예퇴임 후에도 개인적으로 우리 대학에 발전기금을 가장 많이 쾌척한 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재규 총장의 중도사퇴(명예퇴직)에 따라 제9대 총장이 선출되기까지 약 2개월 반 동안은 박용 교수가 총장 직무를 대행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재규 총장의 중도사퇴는 총장 개인의 돌출적인 언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으로는 총장직선제의 눈에 보이지 않는 폐단이 은연중에 작용하여 야기된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 나무에 올려놓고 밑에서 쥐어흔들면 누구든 떨어지기 마련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 대학에서 아주 잘못된 전례다.
이용두 총장 재임기(2005.11.-2009.10)
이용두 총장은 우리 대학 스팩트럼 상에 중도 좌에 해당하는 전자공학 전공 교수로 80년대 초반부터 우리 대학에 봉직해 왔으며, 이영식 목사와 이태영 총장과는 직접 대면해 왔기에 우리 대학의 건학정신과 뿌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었다. 취임 후에 대구대 50주년 선포식을 통해 9대 총장으로서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용두 총장은 대학운영의 기조로 맞춤형 교육을 통한 교육중심 대학 모델을 강조했다. 지방대학으로서 우리 대학은 연구중심 대학보다는 교육중심 대학으로의 위상제고가 더 절실한 것으로 판단했다.
재임 중에 이용두 총장은 학생기숙사를 비롯해서 학생복지 증진에 무게를 두는 한편,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특히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의 교육프로그램 인증을 통해 경쟁력 있는 공학 기술 인력을 양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공학 쪽을 중심으로 큼직한 연구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에도 주력했다. 그리고 이용두 총장은 전임 총장이 등한히 해 온 지역 기관장들과의 유대와 상호협력을 위해 초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맥락에서 재임 중에 지방자치 단체장들로부터 학생기숙사 건립 투자를 적극 유치하기도 했다.
홍덕률 총장 재임기(2009.11.- 현재)
홍덕률 총장은 대학 민주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고난을 겪고 마침내 우리 대학 제10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벽두부터 ‘학생이 행복한 대학’을 내세워 학생들의 행복증진에 밀착하는 행정과 스스로 학생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을 중시했다. 홍 총장 재임 시에 구성원들이 그처럼 열망하던 정이사체제로의 전환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 겨우 이루어졌다. 하지만 형식만 정이사체제이고 이사진 구성은 구재단 쪽과 개방이사 쪽으로 팽팽하게 양분되어 재단분규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홍 총장은 임시이사체제에서 정이사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성사를 이루었으나, 그 후 정이사들 간의 힘겨루기에 밀려 금쪽같은 임기를 다보내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도 홍덕률 총장은 재임기간에 정부지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우리 대학이 산학협력선도대학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올렸으며, 교육역량사업도 계속 따내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우리 대학의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이 결실을 맺어 평생교육 진흥을 위한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총장직선제를 통해 학내 구성원들의 참여에 의한 민주역량은 얼마간 제고되었는지 모르지만 총장선거에 따른 역기능적 폐단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민주’라는 이름으로 우리 대학이 내면적으로 얼마나 대학다운 모습으로 변모되었는지 회의가 든다. 결국 외현적 민주화가 내면적으로는 정체(停滯)를 불러 온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 대학의 구조개혁만 하더라도 그 당위의 절박성에도 불구하고 제6대 총장선출이래 제대로 손도 데지 못하고 있다.
맺음: 문제와 과제
우리 대학의 건학정신인 ‘사랑․빛․자유’는 인류 보편적 이상과 맞닿아 있다. 우리 대학은 1950년대 중반 우리나라가 절대빈곤 상태에 허덕이고 있을 때, 높은 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걸고 장애아동의 교육과 소외계층의 복지 구현을 앞세워 비록 그 출발은 초라했으나 그 뜻은 높고 컸다. 어찌 보면 우리 대학의 건학과 그 특성화는 시대를 너무 앞질러 갔다. 그러기에 우리 대학은 건학(1956)에서 약 15년(1970년대 초반) 간은 절명(絶命)의 위기를 몇 차례나 겪어야 했다. 그러고도 우리 대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영식 목사의 남다른 결기(決起)와 이태영 총장의 관용과 인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대학은 극히 소규모의 특성화 대학이었기에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며 지방대학 육성책과 대학교육 수요의 지속적인 증가에 편승하여 우리 대학은 양적으로 승승장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우리 대학은 1981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광활한 진량 캠퍼스를 개발하여 전국 10위권에 진입하는 거대 명문사학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교육에 관한 한(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양적인 성장이 반드시 질적인 수월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종합대학 승격이후 우리 대학은 과히 패러다임적 전환에 상응하는 구조적 개혁이 요청되었으나, 그간 탁월한 리더십으로 우리 대학을 이끌어 온 이태영 초대총장이 병환으로 쓰러져(1988) 총장의 장기부재 중 우리 대학은 극심한 내홍(內訌)을 겪었다.
이태영 총장은 7년간의 오랜 투병 끝에 이국에서 쓸쓸히 운명(1995.11.29)하고 우리 대학은 특별한 비리가 없었음에도 총장 부재중 일종의 ‘경영미숙’으로 임시 관선이사체제로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현안문제로 관선이사 파견과 총장직선제 관철은 서로 맞물려 있었다. 1990년대 초에 총장직선제가 도입되었으나, 총장직선은 제6대 총장선거(1996)를 고비로 우리 대학에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 대학은 11대 총장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다. 이번 총장선거가 마지막이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총장직선에 따른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제도의 잘못인지 사람의 잘못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 총장직선은 민주화 과정에 따른 과도적 조처이지 대학발전을 위한 최선의 대안은 아니다.
대학은 연구하고 교육하는 곳이다. 대학 행정 책임을 맡은 총장이 일을 잘하면 10년이고 20년이고 일관되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대학은 대학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총장직선제에서는 원천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다. 입맛이 까다로운 교수들 누가 직선총장에게 재임기회를 주겠는가. 그래서 우리 대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발전을 위한 긴장의 끈은 점차 느슨해졌고, 이런저런 명분으로 구성원들은 자기 손으로 총장을 갈아 치우는 제미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대학존립의 내외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에도, 우리 대학은 구조개혁에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미 때는 늦었다.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의 주체는 교수다. 때문에 연구의 질과 교육의 질은 바로 교수의 손에 쥐어져 있다. 다른 대학에 비해 우리 대학은 개혁의 적기를 놓친 게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대학의 명운은 총장 한 사람에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교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진정 학생이 행복한 대학이려면 교수가 잘 가르치고 연구에 열중해야 한다. 근본이 바로 서야 지말(支末)이 산다. 나무뿌리가 튼실해야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대학의 뿌리는 교수다.
어느 대학이든 지배적인 ‘교수문화’란 게 있다. 과연 지금 우리 대학을 지배하는 ‘교수문화’의 주류는 무엇이고 그 실체는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은 한 번 편한 쪽으로 길들어지면 그 길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습기(習氣)라는 게 무서운 거다. 적어도 학생이 캠퍼스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교수는 연구실을 지켜야 한다. 밤늦도록 그리고 주말에도 많은 연구실에 불이 켜져 있어야 ‘대학’(大學)이다. 원래 ‘크게 배우는 일’은 시도 때도 없어야 한다. 그래서 지성(至誠)은 쉼이 없다(無息).
우리 대구대가 살 길은 이 길 뿐이다. 구조개혁은 늦어도 하면 된다.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은 이런저런 명분으로 얼버무리다 보면 어느 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끝장이다. 당장은 어찌해서 견딜만해도 한 번 추락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시중에는 대구대가 교수 대우도 좋고 제일 편한 대학으로 회자되고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잘 나갈 때에 신독(愼獨)하고 어려움에 미리 대비해야 살아난다. 솔직히 지금은 암담한 심정이다. (2013.07.02)